〈 64화 〉제1부. # 10화. 오빠를 돌려줘! (8)
64.
아까.....
대체....
아까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밀려왔지만 벌써 전송 된 문자 때문에 그에게 연락도 할 수도 없었다.
명록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자신의 마음 속 숨어 있던 나쁜 수진이 불쑥 튀어나와서 일을 망쳐 버렸다.
그냥 거짓말이었다고, 괜히 심술이 나서 그랬다고 전화해서 말하고 싶지만.......
명록이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까 두려워하지 못했다.
마음이 심란하니 모든 게 거슬렸다.
수진은 전등불도 꺼버렸다.
눈을 자극하는 형광등의 불빛이 거북해서 견딜 수 없었다.
어두워진 방안,
외로운 크리스마스 이브.
아파트 창문 건너로 길 건너 교회에서 세운 커다란 트리의 화려한 불빛이 번져 들어왔다.
수진의 마음은 더욱 칼로 베인 것처럼 아파져 왔다.
눈시울이 왠지 뜨거워지는 듯싶어서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그렇게 그녀의 연애, 첫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나가고 있었다.
**************
" 어이~~ 이봐~ 사랑하는 후배~ 이런 날 칙칙한 모텔 방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나와 함께 나가자~! "
모텔 방문을 열고 승필 선배가 명록에게 같이 나가자고 꼬시고 있었다.
쫙 빼어 입은 모습이 벌써 단단히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저녁 먹을 때부터 클럽에 간다고 계속 얘기하더니만 진짜 갈 모양이었다.
박 과장님은 만사 귀찮다고 잠이나 자야겠다고 일찍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하긴.....
그 나이 때 뭐가 신나겠냐만은......
결과적으로는 명록도 박과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만사 귀찮고 마음도 완전히 가라앉아서 우울 그 자체였다.
" 승필 선배...... 나 저녁부터 몸이 으슬으슬 한 게 영 안 좋아요. 미안한데..... 혼자 가세요. "
약간의 연극.
약간의 표정 연기.
불쌍한 듯한 그의 표정에 승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 알았다...... 약 챙겨 먹고 푸욱 자라~ 낼 모레 보자~~ "
한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이마를 툭 찍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솔직히 그를 쫓아가지 않은 것은 아까 수진에게 받은 문자 때문이었다.
괜히 기분 풀겠다고 클럽에 가서 승필 선배가 여자를 꼬시는 걸 보면 속이 뒤집어질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가 클럽에서 여자라도 하나 건지는 날이면 바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필 선배.....
오늘 운이 좋은 거라고요......
옆에 짐승 하나 붙이고 갔다가 봉변당할 뻔 했다고요......
그게 다 갑자기 날아든 문자 한통 때문이었다.
수진이 보내온 문자.....
[ 친구들하고 클럽 가서 노는 중. 걱정 마. 오빠도 좋은 시간 보내.]
크...클럽!
정말......
정말 클럽에 간다는 게 사실일까......?
클럽......
그녀의 문자에 명록은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 서운하기도 했다.
아니....
정말 그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물론......
이 날을 많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수진이 얼마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둘이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이브.
여자들은 처음이라는 것에 특히나 의미를 둔다는 것은 승필 선배 통해 들었다.
그리고.....
기념일 이런 거에도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승필 선배도 하나하나 의미를 두고 잘 챙겨주라고 했던 것들이 그런 날들이었다.
하지만.
회사 일이라는 게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자신도 이런 날 그녀 곁에 있지 못한 것이 마음 편한 것이 아닌데......
떡 하니 보내온 문자가......
친구들과 클럽에 가서 놀겠다는 수진의 문자에 정말 서운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친구들.
나희.....
영연......
그리고 설아!
그냥 그녀들과 함께 수진이 주점에 같이 간다고 해도
걱정이 될 판이었는데 클럽이라니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문자를 받자마자 바로 수진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망설였다.
자기가 없다고 그런데 가겠다니......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통화했다가 자신의 서운함이 튀어 나와서
둘 사이에 안 좋은 말이라도 오갈까 봐 걱정되어 차마 걸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닌 거 같아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그냥 마음 그대로 있는 말을 담아 문자를 보냈다.
최대한......
어른스럽게....
부드럽게....
속에서 타는 열불나는 마음은 감추고 담담하게 보이도록 적었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도 살짝 담아서.....
전송했다.
[ 메리 크리스마스. 이제 들어왔어. 회사일 때문에 너한테 가지 못해서 나도 많이 속상하다..... 너라도 재미있게 놀고 조심히 들어가렴. 보고 싶다. 수진아. 사랑해....]
발송하고 한참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흠......
그러나.....
그녀에게서 연락도.....
문자도 없었다.
한숨 쉬고는 명록은 사온 술병을 까기 시작했다.
한병....
한병.....
빈 병들이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안주로 사온 주전부리를 먹으며 마시는 술에 취기가 돌면서 순간
수진에 대한 마음이 울컥해서 저리 치웠던 휴대폰을 집으러 엉금엉금 기었다.
휘청거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헛손질하던 명록이 드디어 휴대폰을 잡았다.
그리고 단축번호 1번을 길게 눌렀다.
익숙한 멜로디.
한없이 이어질 듯한 유행가를 들으며 수진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
언제 잠들었지?
잠에서 깬 수진이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찾았다.
거기에 어느새 명록이 보내온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 10여 통이 들어와 있었다.
[ 메리 크리스마스. 이제 들어왔어. 회사일 때문에 너한테 가지 못해서 나도 많이 속상하다..... 너라도 재미있게 놀고 조심히 들어가렴. 보고 싶다. 수진아. 사랑해....]
깜박 잠든 사이 수신된 명록의 문자.
클럽에서 논다는 그녀에게 재밌게 놀라는 그의 문자.
이런 걸 어른의 여유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속상하다는 말을 조금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자신이 클럽에서 남자애들 사이에 있어도 수진을 믿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많이 전화도 했잖아......
조금은 그가 싫어하길 바랐는데......
바로 전화라도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기다리다가 깜빡 잠들었다.
그런데 그사이 그에게서 전화가 왔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메시지.
질투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속상하다면 자신이나 변명하고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의 메시지에 수진은 더욱 속상해졌다.
그 뒤 한참 지나서야 걸려온 부재중 전화들......
순간......
왠지 소심해 보이는 명록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수진은 오늘 주려고 준비했던 선물을 손에 쥐었다.
손끝이 푹 들어가며 매끄러운 포장지 속 곱게 접힌 푹신한 스웨터가 만져졌다.
오빠가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기뻐해 주는 모습을 보고.....
그를 끌어안고 싶었는데.....
미처 전해주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 아직 남아있는 스웨터가
지금의 그녀처럼 애처로워 보여서 꼭 끌어안았다.
오빠의 품도...
이렇게 따듯했는데...
마지막 데이트, 모텔에서의 그날 밤이, 그의 품 안이, 그리고 그의 체온이 미칠 듯이 그리워지는 수진이었다.
벌써 세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이제라도 전화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숙소를 쓰는 명록에게 전화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문자라도 보낼까 했지만, 클럽에서 논다고 해놓고 지금 문자를 보내면
명록에게 괜한 오해만 살것 같아 손끝이 오래도록 망설이더니 결국은 보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수진이 휴대폰을 내려 놓고 침대에 웅크려 앉았다.
새벽 3시의 하늘 치고 창밖이 너무 밝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수진이 일어나 창가에 가까이 가자,
커다란 눈송이들이 작은 조각빛들을 반사하며 어두운 밤을 환히 빛내고 있었다.
어느새 서울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모두들 이브가 오면 바라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지금 창문 밖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럴 때......
하필 이럴 때......
왜 화이트 크리스마스인 걸까.....?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지금....
명록만 그녀 곁에 없었다.
명록의 보낸 문자를 계속 읽고 또 읽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회사 일 때문에 너한테 가지 못해서 나도 많이 속상하다.....
오빠도.....
속상하대잖아.....
아아....
왜....
난 거짓말을 한 걸까....
수진은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에게 전해줄 스웨터 꾸러미를 꼭 끌어안은 채.....
양손에 쥔 핸드폰 액정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명록의 문자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
" 으으........ "
핑 도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눈 주변이 까칠까칠한 것을 느끼며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방에 뒹굴고 있는 술병들......
방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이 걷어차기라도 했는데 제대로 서 있는 병이 하나도 없었다.
속이 거북하고 목은 말랐다.
냉장고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이는 생수병을 하나 꺼내 뚜껑을 따자마자 바로 입술로 가져갔다.
차가운 물의 감촉.
액체가 꿀렁거리며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크리스마스의 아침.
축복과 행복이 함께 한다는 이날의 아침....
그런데....
이렇게 초라하게 맞이할 수 있는 걸까.
축복의 날이라는데 왜 이리 비참한 걸까......
그간 자신이 맞았던 어떤 크리스마스 아침보다 훨씬 거지 같은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깨어질 듯한 두통이 머리를 시리게 울려왔다.
인상을 쓰면서 머리 양쪽을 손가락을 지그시 누르자 압박 속에서 두통이 조금 가셨다.
순간 어제 술을 마시다가 기분이 상해서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헉!!!!
혹시 술김에 그녀에게 실수한 것은 아닌가, 가슴 철렁이는 명록이었다.
서둘러 휴대폰부터 찾았다.
침대 아래쪽에 기어들어가 있는 것을 간신히 찾아서 끄집어냈다.
먼지를 털고
핸드본 액정을 살펴보니.....
헉!
수진이 보낸 문자가 보였다!
서둘러 확인해보니 그녀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열렸다.
[ 미안해. 오빠 속상해서 그냥 집이었는데 외로웠어. 미안해... 오빠 보고 싶어. 미안해.....]
새벽 4시 58분에 보낸 그녀의 문자.....
미안해....
속상했어....
집이었는데 외로웠어.....
보고 싶어....
미안해....
순간 명록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뭉클해졌다.
지난밤 그녀가 친구들과 클럽에 갔다고 오해하고 속상해했던 자신이 그토록 미워질 수 없었다.
수진을 믿지 못하다니....
아....
대체.....
수진이 자기가 없다고 클럽 같은데 갈 리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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