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제1부. # 10화. 오빠를 돌려줘! (6)
62.
젠장......
박 과장은 대체 왜 나를 갈구지 못해서 안달인지......
하긴 승필 선배정도 되면 저 입을 콱 다물게 할 수 있겠지만 명록도 자신의 능력이 그렇지 못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갈굼을 당할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역시 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지사였다.
속 타는 마음에 소주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사이 박 과장이 말을 이었다.
" 야. 촬영 건은 어떻게 됐어? "
명록은 바로 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 아.... 네. 우선 촬영팀과 미팅은 했는데 갑자기 배우가 고사해서 다음 차기 배우로 연락을 하고 있나 봅니다. 세트도 아직 준비가 미진해서 직접 소품 담당하고 있는 업체와 만났는데 그쪽 담당자도 예산 문제로 골치 아파졌더라고요. 내일 새벽같이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
박 과장은 명록의 말이 끝나자마자 인상을 팍 썼다.
" 그게 뭐냐? 아무 것도 진행된 게 없잖아? 제일 빨리 진행되어야 할게 촬영이야! 촬영! 컨셉 필름이라도 서울 올려보내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다가 일 년 정도 걸려서 장편 영화 찍겠다! 에잇! "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르고 바로 원샷해버렸다.
승필은 바로 소주병을 잡아들고 박 과장의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 첫날인데 너무 급하게 가지 말죠. 제가 맡은 게 생각보다 빨리 끝날 거 같으니까 그때 바로 명록이 서포트 해주면 어떻게든 빨리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누굽니까. 제일기획 최고의 에이스 아닙니까, 하하! 거기에 에이스 중 에이스 과장님이 함께 인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흐흐... 우선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지금은 기분 좋게 마시세요. 과장님. "
왠일인지 청산유수처럼 아부성 발언을 말하고 있는 승필이 힐끔 명록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평상시 보비위는 할 줄도 모르는 승필이 저러는 건 분명 자신을 위한 행동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웃는 것은 분명 은혜를 베푸는 것에 대한 확인도장이었다.
으.....
아무래도 자신이 명록을 살렸으니
채무 수첩에 갚아야 할 빚 하나 체크하겠다는 의미인가 보다......
박 과장은 그의 술을 받은 뒤 이어나오는 건배에 다시 쭉 들이켰다.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 그들을 보면서 명록은 한시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승필의 언변에 넘어가서 박 과장도 더는 잔소리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순간 명록은 오후에 문자 한 통 보내고 수진에게 아직도 한번 통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흑.....
완전 삐쳐있을 수진의 얼굴이 생각나서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 저,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올게요. "
박 과장과 승필의 시선이 잠시 자기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냥 무시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계속 흐린 날씨는 아직도 아무런 변화 없이 밤하늘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 하늘을 보며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악 멜로디.....
시간을 보니 10시가 조금 넘었다.
벌써 자나......?
받지 않는 전화에 많이 화나서 일부러 안 받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져 갔다.
언제나 수진이 전화를 받지 않을 때면 머리를 내미는 상념들.
하긴.....
오늘처럼 대개 수진을 서운하게 만들고
전화를 걸었을 때 안 받는 경우니까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전화 받지 않을 거 같은 예감에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끊으려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 오...오빠?! "
갑작스러운 수진의 목소리에 급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 수진아?! "
" 아, 미안. 오빠...... 엄마하고 거실에서 얘기하느라 전화 온 거 몰랐어. 지금 끝난 거야? 많이 바빴구나...... 힘들지? 밥은 먹었어? "
이런.....
순간 명록은 와락 무언가 가슴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시간.....
그녀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거나
아니면 품에 안고 같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었다.
시험기간 동안 기다기고 기다렸던 수진과의 재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작 이렇게 통화만 할 수밖에 없다니 기분이 팍 다운되어 버렸다.
거기에다가 수진의 목소리에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더욱 우울함과 속상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더 실망했을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 조금..... 그래도 네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많이 보고 싶었는데..... 내가 출장을 가게되서 미안하다. "
잠시 침묵.
" 그런 말 하지 마. 미안하기는 무슨...... 만나지 못해서 나도 좀.... 마음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오빠 탓도 아니잖아. 빨리 일 끝내고 올라와. 나.... 오빠 기다릴 테니까........ "
천사....
나의 천사.....
명록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힘든 하루.....
아까 박 과장의 갈굼도 스르륵 녹아버리는 것을 느꼈다.
" 그래.... 그럴게. 크리스마스 이브 때는 우리 꼭 같이 있자. 그땐..... 지금..... 지금 수진이 너한테 못 해준 거 다 해줄게...... "
" 피..... 그냥 오빠가 옆에 있기만 해도 충분해...... 어서 일이나 끝내고 올라와. "
수진의 목소리에 조금 웃음기가 보였다.
명록도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밝아진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 그래. 네 생각해서라도 팍팍 해치우고 올라갈께. "
" 응. 믿어, 오빠. 아~ 엄마가 부른다. 나 끊어야 돼. 오빠 이따 전화할 거지? 나 기다릴께. "
" 그래. 이따 전화할께. 사랑해, 수진아. "
" 후후... .나도 사랑해 오빠.... 많이 보고 싶어. "
" 나도. "
" 쪽~! 나 가야 해. 이따 꼭 전화해? 끊을께. 엄마~~ 나 여깄어~"
통화종료.
아쉬움이 심장을 웅 하고 울리는 시간.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유난히 << 쪽 >> 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젠장......
반드시 빨리해치우고 크리스마스 이브 전까지는 서울로 귀환하고 말 테다.
명록은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다짐했다.
박 과장의 갈굼이 문제가 아니라......
수진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이런 귀여운 천사를 하루라도 못 본다는 건 고통이요, 죄악이었다.
수진아....
기다려라, 이 오빠가 간다~~~~
명록은 심호흡을 하며 어깨를 한번 들었다 놓고는 몸을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
시험이 끝나고 다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웠다.
설아야 계절학기 수업을 듣느라 바빴고, 영연과 나희는 데이트하느라 바쁜 듯했다.
명록과 데이트할 생각에 딱히 방학 계획도 세워놓은 것이 없었던 수진만 닭 쫓던 강아지처럼 집 안에서 한가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
혁신적인 발명품.
장거리 연인들을 위한 휴대폰이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그들을 이어주고 목소리도 들려주는 세기의 신문물.
하지만 그 혁신적인 발명품마저도 제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했다.
지방 출장이 많이 바쁜지 명록과의 통화가 이어지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가끔 그에게 전화하면 받을 때마다 숨죽여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괜히 명록한테 회사 사람들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 같아서 부담 백배에 미안함까지 덧붙여 지면서 전화도 맘대로 걸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숙소도 직장 동료와 같이 쓰고 있는지 일이 끝난 밤마저 길게 통화하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전화 대신 문자를 주고받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통화만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브엔 오빠....
꼭 온다고 했으니까.....
수진은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딱히 아르바이트나 하거나 학원에 다닐 생각은 안 하고,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딩굴 거리는 수진의 모습이 답답해 보였는지 엄마가 매번 잔소리하고 있었다.
하루 다르게 강도가 심해지는 엄마의 잔소리에 그녀도 무슨 일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때마침 쇼핑을 가자는 영연의 연락을 받고 추위에 대한 망설임도 없이 바로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약간의 충동적이긴 했지만 뭐 안 그래도 오빠에게 줄 선물도 사려고 했으니 잘된 일인 것도 같았다.
**************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모두 해버릴 듯한 기세로 그녀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시켰던 커피는 이미 뜨거움을 잃고 다 식어버렸다.
그녀들의 수다는 시험이야기, 성적 이야기부터 시작해선 어느새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한 계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수진도 오늘만큼은 꿀꿀한 기분을 잊고 기대에 찬 이브 계획을 말하며 들떠 있었다.
옛날에는 세 명의 그녀들만 남자들과의 데이트 약속을 떠들며 자랑하고 있는데
오늘은 그녀도 당당히 명록과의 얘기를 조잘거리며 그들의 수다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어느새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야기는 넘어가고 그제야 그녀들이 만난 이유를 떠올렸는지 쇼핑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선물을 고르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영연이 귀걸이에 끌렸는지 액세서리 점에 들어갔다.
" 어서 오세요. NERIZEL입니다."
그녀를 따라 액세서리 점으로 들어가자 예쁘게 생긴 언니가 상냥하게 인사했다.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가게에 들어서자 강한 조명을 받은 쥬얼리들이 반짝이며 어서 사달라고 자신들을 뽐내고 있었다.
" 하! 이거 예쁘다! 이걸 선물로 달라고 해야지. 어때?"
영연이 귀걸이를 들더니 자신의 귀에 가져갔다.
선물을 고른다는 게 남자친구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선물이었는지 만족스러워하며 거울에 비춰봤다.
수진은 어깨 너머로 흘깃 보곤 "괜찮네." 하며 성의 없는 대답을 하곤 반지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여러 반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반지의 길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커플링들이 보였다.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디자인도 있었고, 약혼반지처럼 화려해 보이는 반지도 있었다.
수진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커플링을 보았다.
반쪽의 하트가 그녀의 손가락 위에 얹어져 있었다.
수진이 생각하기에 여기에 전시된 그 어떤 커플링도 자신이 낀 반지보다 예뻐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 어떻게 입고 오빠와 만날까?
크리스마스이브,
연인들의 명절이 되어버린 그날을 생각하니 우울했던 기분이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영연은 정말로 선물로 받을 생각인지 사진으로 찍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나갈 생각이 없는 듯 가게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어지르고 있는 영연 때문에 예쁜 점원 언니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올 거 같은 환상이 보였다.
수진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는지 결국엔 나희가 영연을 가게 밖으로 끌어냈다.
설아도 나가고, 만신창이가 된 가게를 보며 수진이 민망한 마음에 점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차마 점원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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