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제1부. # 9화. 여대생 그를 유혹하다. (4)
48.
정말....
내가 무서워해서 아팠던 걸까?
영연의 말대로 이곳에 넣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하나?
마지막으로 그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보라던
나희의 말을 떠올렸지만 거부감에 수진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역시 아프고 또 해서는 안될 일 같았다.
순간 영연이 사줬던 그것이 생각났다.
영연이 수진도 이제 어른이 되었다며
기념이라고 딜도를 사준다고 했을 때
그것의 용도를 알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한사코 거부 했다.
하지만 이것도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며......
꼭 사야한다며 영연이 바득바득 우겨댔다.
둘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가게 주인언니가 웃으며
작은 장난감 같은 걸 추천해 주자 그제야 영연도 조금 만족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수진도 그녀가 선택한 징그러운 그것보다는 차라리 앙증스럽고 작은 물건이었다.
바이브레이터라는데, 주인 언니의 설명으로는 몸에 대고 켜보면 알거라고 했다.
멀 알 수 있다는 걸까......?
이 장난감 같이 조악한 게 어떻게 멀 할 수 있다는 거야......
아무리 둘러봐도 그저 장난감인지라 수진은 의심하는 마음으로 전원을 켰다.
우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난감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거실에 부모님이 계시는데 문 밖으로 소리가 빠져나갈까봐 허둥지둥 전원을 껐다.
헉!
이걸 어떻게 쓰란 말이야....!
수진은 침대 구석으로 바이브레이터를 던져 버리고 다시 거울에 집중했다.
" 나와서 과일 먹어~! 아빠가 너 좋아하는 거 사왔다~! "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다가 쿵 하는 느낌에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야.....
아....아파!
수진은 고통을 참으며 헐레벌떡 거울을 숨기고 팬티를 입었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팬티 밴드소리가 강하게 느껴졌다.
미쳤어!
대체 내가 멀 한 거야.....
엄마의 목소리에 마법에서 깬 사람처럼 제정신을 찾은 수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나 어떻게 해...
이제 명록을 어떻게 봐야할지,
괜히 그녀들의 장난에 넘어간 것 같아서,
방안에 혼자 있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은 도저히 명록에게 전화를 걸지 못할 거 같았다.
**************
9시.......
고개를 들어 사무실 정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이 밤 9시를 얼마 안남기고 있었다.
승필 선배마저도 기지개 펴고 가버린 사무실은 조용함을 떠나 적막함에 잠겨있었다.
오늘도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버렸구나.....
하암.......
어젯밤에도 여기서 수진의 전화를 받았다.
아직 사무실이라는 말에 그녀의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도 실망으로 금세 변해버리는 것을 느꼈지만 대신 통화가 짧아졌다.
그리고 집에 가서 하는 잠들기 전 하는 통화마저도 아주 짧게 끝났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수진의 전화가 없었다.
점점 늦어지던 퇴근 시간이 어느새 이제 이 시간까지 오고 있었다.
명록은 없는 일마저도 찾아서 만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괜스레 집에 가봐야 가족들 목소리에 티비 소리까지 겹쳐져서 마음만 더 오랜 시간 붕 떠있었다.
자신 만의 굴.
남자들은 고민이 생기면
자신 만의 굴속으로 들어가서 곰이 된다고 한다더니
지금 명록이 딱 그 짝이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서 혼자만의 굴을 파고 그 안에 숨어버린 곰탱이.
모니터를 멍하니바라보던 명록은 슬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드드드드~~
순간 책상 위에 아무렇게 던져놓은 휴대폰이 경기 걸린 아이처럼 마구 몸을 흔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명록은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짚어들고 액정을 바라보았다.
수진이로부터 걸려온 전화.
하아......
왠지 계속 요새 이렇게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올 때면 한숨이 나오고 있었다.
애타게 자신을 찾는 그녀가 안타깝기도 하고 때론 부담스럽기도 했다.
어찌됐든.......
명록은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오빠~! 왜 목소리에 힘이 없어요.......? 설마 아직 회사.......에요? "
수진의 목소리가 말꼬리를 끌며 작아지고 있었다.
명록은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왠지 더 마음이 무거워지며 미안했다.
사실.....
그녀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이런 나에게 신경쓰고 마음 쓰느라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에휴......
못난 놈....
" 으응....... 아직 회사. 좀 일이 남아서....... "
그딴 일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그냥 집에 가기 싫은 아이가 되서 사무실에 남아있을 뿐.
" 아이..... 그 회사 너무 심하다...... 벌써 며칠 째에요......? 오빠..... 몸 상하겠어요......."
수진의 탄식 섞인 목소리.
하긴 제주도 여행 전에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는데
여행 뒤로는 회사핑계 대면서 계속 이러고 있으니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그렇지 머..... 나는 괜찮아. 요새 좀 일이 많아서 그렇지, 뭐. "
" 그래도 난...... "
수진이 말을 끊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명록은 잠시 전화가 끊겼나 해서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을 바라보았다.
통화시간 2분 5초 6초 7초......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거 보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귀에 대는데 수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난 오빠 너무 보고 싶은데....... "
다시 침묵.
아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뭐라고 말을 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제주도에서 자신의 품에 안겨서
아기가 된 것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었던 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나 귀여웠던가......
얼마나 탐스러웠던가......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하고 있는 건 무슨 짓일까.......?
수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서 들렸다.
" 오빤...... 내가 보고 싶지 않은가봐...... "
쿵.
왠지 상처 입은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명록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낮고 크게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번에 만나서 술잔을 기울일 때도 간간히 쓸쓸해보이던 수진의 표정에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그녀를 데려다주던 그 길......
아파트 어두운 곳에서 이어지던 뜨거운 키스.
뜨거워지는 그녀의 호흡과 계속 안타깝게 빨아대던 그녀의 입술.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수진을 보면서 모텔로 가야할 것 같은 느낌에 지레 겁먹고
그녀의 몸을 떼어냈을 때 의아한 표정으로 보는 수진의 얼굴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뜨끔했던가......
모텔로 데리고 가도 순순히 따라올 것만 같은 그녀의 태도에
혹시 이어질 자신의 부실(?)이 들통날까봐 순전히 혼자 겁을 먹고 벌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수진이 입을지도 모르는 상처 따윈 전혀 생각도 못하고 우선 숨기겠다고 벌이는, 이기적인 자신의 행동에 오히려 더 놀랐다.
마침 누군가 자신과 수진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수진을 거부하는 듯한 자신의 태도에 그녀는 분명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미안......
수진아, 미안해.
" 그럼...... 수진아. 지금이라도 만나러 갈까? "
명록은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 악셀을 밟아 달리기 시작하는 자동차처럼 바로 말을 이었다.
" 시간이 늦어서 조금밖에 못 볼지도 모르는데...... 우리 만날래? "
이내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저...정말? 오빠 올 수 있어요? "
방금 전까지 마치 심연의 바다 속에서 들리는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금세 환해져서 들려왔다.
약간의 떨림까지 느껴지는 듯한 목소리에 명록은 다시 한 번 그녀가 느낄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좋아할 것을 왜 난 혼자서 바보짓을 하는 건가.
그는 바로 말을 이었다.
" 응. 갈께. 너희 집 근처로 갈까? "
" 네...... 기다릴게요. 얼마정도 걸릴 거 같아요? "
명록은 대충 그녀의 집까지 시간을 셈하였다.
" 40분정도....... 걸릴 거 같아. 전철 타고 가는 거라....... "
가면 거의 10시 정도.......
늦은 밤이라는 게 다시 명록의 마음을 짓눌렀다.
아니야.
그냥 얼굴만 보고 헤어지겠지.
애써 자신을 달래며 수진의 말을 기다렸다.
혹시.....
안와도 된다고 말할 지도 몰라.
" 알았어요. 나 시간 맞춰서 전철역으로 나갈게요~ 어서 와요, 오빠. "
" 응. 지금 간다. "
그녀는 바라던 말은 말해주지 않고 너무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록은 전화를 끊고 잠시 일어나 자신의 책상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겉옷을 챙겼다.
컴퓨터는 종료를 클릭하자마자 열려있던 창들을 휙휙 닫으며 절로 시커먼 화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명록은 완전 종료까지 확인하지 않고 모니터를 꺼버린 채로 사무실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에휴.....
이것도 못할 짓이다......
정말 병원이라도 가야겠다.......
자신의 문제 때문에 밝고 예쁜 수진이한테까지 괜한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있는 힘껏 발을 재촉해 나서는 사무실.
곧이어 등 뒤로 삑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닫혔다.
**************
결국 꺼내고 말았다.
투정처럼 들릴까봐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보고 싶다는 그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워했는지...
그리고 명록이 보자는 말을 해줬을 때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진작 말했으면 이렇게 애가 타지도 않았을 텐데,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거울을 바라보자 명록을 만나기엔 자신의 차림이 너무 초라했다.
바로 후줄근한 추리닝을 몸에서 벗어냈다.
속옷도 어쩐지 초라해 보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로 산 보랏빛의 화려한 속옷으로 갈아입고
그래도 너무 신경 쓴 티가 나지 않게, 막 집에서 나온 것처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서 새로 묶고는 입술엔 가볍게 립글로즈을 발랐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이 이제야 조금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여자처럼 보였다.
시계를 보자 명록과 통화한지 벌써 20분이 지났다.
지하철역까지 빠르게 걸으면 15분정도 걸리니 조금 서둘러야 했다.
수진은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안방에 들어간 부모님 몰래 살금살금 현관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초겨울의 칼날 같이 서늘한 공기가 그녀의 두 뺨을 스쳐갔다.
역까지 걷는 20분이 등교할 때와 같은 길인데도 지금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 멀리 역사의 플랫폼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그녀의 작은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명록도 어느새 도착을 했는지 전화를 걸었다.
수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 네~ 오빠 어디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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