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제1부. # 7화. 간호사가 그리 좋아? (3)
26.
명록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 수진아...... 미안해. 연락 못해서. "
" 왜 연락 못했는데요? 그리고 병원에 왜 갔어요? 누가 아파요? "
여전히 딱딱한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서운하긴 했지만
지금 사정으로 모르니 저럴 수밖에 없겠다 생각이 들어서 명록이 천천히 답했다.
" 저기..... 사실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거든. 그...... "
" 에!? 오빠가 왜...... 왜 입원했는데요? 언제요? 설마 나랑 헤어지고 나서 교통사고라도 난 거에요? 괜찮아요?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말 좀 해봐요? "
갑자기 180도 바뀐 수진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올라가더니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
수진씨...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말할 새가 없는데......?
순식간에 돌변해서 쏟아지는 수진의 질문에 명록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일단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우선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 어. 그게..... 나 지금은 괜찮아. 갑자기 열이 나고 좀 그래서....... "
" 어디에요? 입원한 병원. 지금 바로 갈게요. 어디에요? "
윽......
원래 수진이 이렇게 성격이 급했나......?
명록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 그러니까...... 아... 아니 우선 수업 있잖아........ 저기. "
" 괜찮아요. 지금 갈게요. 어디에요? 지금 바로 갈게요. 오빠 어디 병원이에요? "
명록은 이젠 지금이라도 달려올 수진을 달래며 괜찮다고 서둘러 말하고
택시라도 잡아타고 올 것 같은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발 수업이라도 다 듣고 오라고 달래며 진정시키느라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간신히 수진을 달래고 전화를 끊고 보니 얼마나 통화를 했는지
링겔 주사가 꼽혀진 호스에서 피가 역류해서는 뻘건 핏줄이 빙빙 돌며 다시 링겔로 향하고 있었다.
" 에휴......... "
길게 한숨을 쉬며 링겔을 하늘로 치켜들며 병실로 향했다.
어찌 됐든 그녀의 오해는 풀린 듯싶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는 생각.
설마......
이러고 있는 새 바로 달려오는 건 아니겠지?
**************
" 어디 가?"
강의가 끝나자마자 수진이 서둘러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 현장을 발견한 설아가 수진을 불러 세웠다.
수진이 친구들을 바라보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 아 미안, 나 명록 오빠 만나러 가야 돼."
" 카페는? 같이 안 가려고? 여태 이야기 했잖아. 하.... 이제 남친 생기더니 너도 별수 없구나? 후후.... 우정보단 사랑이라 그거지?"
나희의 웃음 섞인 타박에도 수진은 웃지 않았다.
커플이 돼버린 과거의 모태 쏠로를 골리려고 열심히 머리를 돌리던 영연이 심각한 수진의 표정에 무언가를 눈치채고 잽싸게 입을 닫았다.
" 긴급이야. 병원 가야된단 말이야. 하여튼 미안해. 나 먼저 간다?"
수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로 돌아 서두르며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달려가는 그녀를 보며 삼총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아니 대체 왜.... 쟤, 왜 저러니??? "
하지만 그 답을 아는 당사자는 이미 멀리 사라진 뒤였다.
**************
611...
612....
여긴 가봐?!
명록이 알려준 호실을 찾아낸 수진이 방문 밖에 써져있는 환자 이름에서 <<방명록>> 석자를 발견하곤 서둘러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다를까.
창가 쪽 침대에 명록이 홀쭉한 얼굴로 팔뚝에 링겔을 꼽고 눈을 감고 있었다.
까맣고 푸석푸석한 얼굴에 헐렁한 환자복까지 더해지며 수진의 눈에는 잠든 명록이 마치 말기 암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위중하게 보였다.
명록이 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당장에라도 그를 만나면 화를 내며 자신을 무시했던 이유를 따지며
그에게 마구 화를 내고싶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막상 명록의 모습을 보게 되니, 수진의 마음에 돌이 얹힌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런 줄도 모르고, 괜한 자존심만 세우며 아픈 그를 마음 속으로 원망했다니.......
" 어? 수진아... 왔어?"
" 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명록이 고개를 돌리며 수진을 쳐다봤다.
힘없이 잠긴 그의 목소리에 수진이 우울해졌다.
수진은 명록의 침대 옆으로 가까이 갔다.
명록의 입술도 퍼석퍼석 말라 있었다.
그날 남산에서 조금 힘겨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모습이 환자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갑자기 무슨 큰 병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할리퀸 소설에도 나오지 않던가.
사랑의 맹세를 하고 영원한 행복을 기원하자마자.......
바로 불치의 병으로 쓰러지는 연인.
수진은 그간 화를 냈던 자신의 모습에 미안함과 그가 많이 아픈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스러움에 어느덧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녀는 명록이 볼까 바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쳐냈다.
상을 치룬 것도 아닌데 병원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명록에게 물었다.
" 그런데... 입원했다는 말에 놀랐어요. 갑작스럽게 입원이라니.... 오빠, 혹시 어디 많이 아픈 건 아니죠?"
" 아.... 많이 아픈 건 아니고. 며칠만 입원해 있으면 된다네? "
" 별로 안 아픈데, 입원 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 하하, 그런 게 있어... 과일 사왔네? 무겁게 뭘 이런걸 사와? 그냥 와도 되는데....... "
" 그냥 맛있어 보여서 사왔어요. 흠...... 여기 칼 없겠지?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과도야 병실 안에서 얼마든지 빌릴 수 있는데, 수진은 굳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레 말을 돌리는 명록의 모습에 수진은 그가 말을 피한다는 걸 알아챘다.
수진의 머릿 속에 수천 가지의 안 좋은 경우들이 떠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봤던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과도를 빌리기 위해서가 아닌 명록의 입원 이유를 알기 위해서 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위염과 식중독이란 그녀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큰 병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고작 위염과 식중독이라니 놀랬잖아!
수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 저기... 혹시 과도 좀 빌릴 수 있어요? "
" 과도요? 왜 필요하신데요?"
수진의 말에 간호사가 눈을 치켜세우고 날카롭게 이유를 물어봤다.
그녀의 고압적인 태도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아쉬운 건 수진이라 수진은 화나는 속을 누르며 말했다.
"사과 좀 먹이려고요..."
" 방명록 환자요? 그분이 먹고 싶다고 해요? 그분 유동식일 텐데...... 될 수 있음 지금은 사과 안 드시는 게 좋아요. "
"아... 그...그래요. 네. 그럼 과도는 됐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간호사가 한숨을 쉬며 수진을 타일렀다.
왠지 의료진의 말을 안 듣고 환자의 말대로 하는 철없는 보호자 취급을 받게 되어
기분이 나빠질 법도 한데, 수진은 우선 이상한 느낌에 간호사 스테이션을 떠나 순순히 병실로 돌아갔다.
간호사 말을 봐선 이미 명록도 알고 있을 거 같은데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걸까?
왜 그가 자신이 어디 아픈지를 말해주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설마...
나 때문일까?
수진은 병실로 돌아가다 걸음을 멈췄다.
짚이는 것은 하나.
도시락???
하지만 곧바로 머리를 저었다.
같이 먹었는데 자신은 멀쩡한 것이 그게 원인은 아닌 것도 같았다.
그러나......
곰곰이 그날을 돌이켜보니, 자신이 도시락에 한입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궁금함이 풀려 버리면서 미안함이 마음 속에 가득 찼다.
그제야 자신이 입원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려던 명록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이 뜨겁게 타는 것 같았다.
" 어디 갔다 왔어? 갑자기 나가서 걱정했잖아. 과도는 여기서도 구할 수 있는데. "
웃으며 말하는 명록의 얼굴에 수진은 죽도록 미안해졌다.
" 생각해보니깐, 제가 사과를 깎을 줄 모르더라고요... 제가 나중에 연습해서 깎아드릴게요... 근데 오빠 혼자 있는 거예요? 간병하는 가족은 없어요? "
" 아...동생 녀석이 와서 있었는데 병원은 지겹다며 피씨방 갔어. 밤 되면 알아서 이리로 오겠지..."
명록의 말에 수진은 간이침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그래요? 그럼 오빠 심심할 테니 여기 좀 있다가 갈게요."
그녀의 말에 명록도 병원에 혼자 있어서 심심했는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입원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그 모습에 수진의 속은 미안함이 더욱 짙어졌다.
밤 9시가 되자 병실은 다들 자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 이상 명록 옆에 머무는 것도 폐가 되는지라 수진은 아쉬운 인사를 건네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슬슬 진짜 가을이 되는 듯 병원을 나와 정류장으로 걷는 수진의 다리에 쌀쌀한 찬바람이 스쳤다.
유동식이라는 것은 죽을 얘기하잖아......
뭘 해주는 게 좋을까....
고민하며 수진은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주머니 끝에 온기가 없이 차가워진 금속이 닿았다.
그제야 휴대폰 생각이 난 수진은 액정을 확인했다.
[ 긴급 상황은 해결 됐냐?]
영연의 문자.
그러고 보니 친구들과의 약속도 깨버리고 설명도 안했다는 생각에 답장을 보냈다.
[ 미안, 병원에 있느라 문자 확인을 못했어. 명록 오빠 입원했거든, 지금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중]
**************
수진의 얼굴을 보니 화난 기색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연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곁에서 있으면서 도란도란 얘기하는 그녀를 보니
갑자기 입원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성위염이나 식중독이 아니었음 더 좋았을 텐데.......
흐......
그녀의 손길로 식사 시중도 들고 부축도 받고 그랬음 하하하~~~
행복한 입원생활이 되었을 거 아냐~~~
명록은 절로 입이찢어졌다.
비록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싱글벙글 웃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거기에다가 아까 순간적인 생각에 했었던....
약간 힘없는 환자의 연기도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아~~
순간 팍팍 돌았던 나의 머리!
아직 녹슬지 않았으~~~
명록은 혼자 씩 웃고 있었다.
수진을 보내고 병실로 올라오자마자
입원해 있던 남자환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 어이~~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예쁜 처자를 애인으로 두었데? "
" 와~~ 형! 존경해요. 전생에 지구를 구하셨어요??? 그렇게 예쁜 누나는 첨 봐요. "
언제나 옆자리에서 오은혜 간호사를 칭찬하던 오씨 아저씨.
그리고 급성충수염으로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던 고삐리 창수가
완전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고삐리 창수의 눈동자에는 존경과 감동의 빛깔이 듬뿍 담겨 있었다.
<<간호사가 그리 좋아?(3)>> 끝 => <<간호사가 그리 좋아?(4)>> 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