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제1부. # 6화. 남산 투 파 (Namsan too far) (2)
20.
으으......
속이 뒤집어진다.......
머리도 띵~ 하게 울리는 가운데 토요일 오전 전철에 탄 명록은 이리저리 밀리는 인파 속에서 곤죽이 되어있었다.
숙취에 뱃속도......
머리도 지끈거리는 상황에서 만원 전철에서까지 시달리며 흔들리고 있자니 완전 죽을 맛이었다.
간신히 전철에서 빠져나와 역에 내렸다.
생각 보다 더 시간이 걸려서 초초해진 그였다.
잘못하면 약속시간에 늦겠어......
내리자마자 우선 명록은 씹고 있던 껌을 뱉었다.
그리고 은단을 꺼내서 입 안에 쏟아 부었다.
은단의 싸한 알갱이들이 느껴지며 짙은 향기가 입 안에 흩어졌다.
오른손 아래 주머니에 작은 가그린 병이 만져 졌다.
혹시나 모를 술 냄새가 날까 봐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가그린으로 헹구고 껌도 씹고 은단도 먹고 있는 명록이었다.
약간 지저분한 계단을 올라서자 남대문 시장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수진이과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우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그린을 했다.
워워워어~~~
올로로로로~~~
캬악 퉷~!
파란색 액체가 하얀 거품과 함께 배수구 위에 쏟아졌다.
개운한 느낌.
명록은 쓱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숨이 찼다.
아.......
회식만 아니었어도.......
순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물이 떠올랐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음 북어해장국이라도 먹고 나오는 건데......
시간에 쫓겨서 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바로 여기로 달려오는 명록은
쓰린 배를 부여잡고 뜨끈하고 시원한 해장국의 국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꼭 북어 해장국이 아니더라도 뜨듯하고 속을 팍 풀어줄 만한 국물이 간절했다.
어느덧 약속 장소에 서있는 수진이 보였다.
약속시간에 허덕여서 걸음을 빨리 하는 중이었다.
긴 생머리의 그녀가 이마에 손을 얹고 자신이 있는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이지색 원피스가 부는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호리호리한 그녀의 몸매에 너무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순간.....
숙취로 시달리던 몸의 상태는 잠시 저편으로 사라졌다.
와아.......
내가 진짜......
저런 여자와 사귀고 있다는 거구나.....?
명록은 숙취를 잠시 잊은 채 헤~ 입을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수진도 그런 자신을 보았는지 그가 오는 쪽으로 걸어오며 미소지었다.
아~~~
눈부시다~~!!!!
명록은 수진의 미소가 너무 환하게 느껴졌다.
그는 손을 흔들며 걸음을 빨리했다.
" 수진아~ 먼저 왔네? "
금세 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명록은 너무 가까이 가면 지난밤 회식의 자취가 그녀에게 풍길까 조심하며 말했다.
" 아~~ 미안...... 빨리 온다고 했는데 내가 늦었나보네. 미안....... "
수진은 앵두빛 입술을 길게 그리며 웃었다.
" 헤헤~~ 무슨 소리에요. 우리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어요. 저도 막 온걸요? "
" 아니야..... . 정말 미안해. 내가 일찍 왔어야 되는데..... 정말 미안해 "
명록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미안했다.
미리 삼십분 전부터 수진을 기다렸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회식 때문에 늦었다고 설명할까...
-하다가 괜히 더 변명하며 자기를 합리화 시키는 거 같아서
그냥 솔직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수진은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말했다.
" 후후..... 그냥 약속시간 생각하며 나왔는데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어요. 훗. "
그녀의 홍조 띈 볼이 너무도 예쁘게 보였다.
명록은 순간 그녀를 끌어안고 앵두빛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싶었다.
자동차 극장에서 맛보았던 그녀의 입술.
통통 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맛보았던 촉촉함.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뒤 이어졌던 터치로 인해 수진이 불과 같이 화를 냈고 그것을 용서받은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한번의 실수만으로 충분했다.
다시는 그런 엄청난 사태를 만들 용기도 없었다.
명록은 애써 자신의 마음을 눌렀다.
아......
그래도.....
역시....
쪼금은....
하지만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수진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휙 돌아서며 말했다.
" 그럼 오빠~! 우리 남산에 올라가요. "
그러며 천천히 도로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명록은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향이 이상했다.
자신의 흐릿한 기억으로 이쪽으로 가면 케이블카 타는 곳이 안 나왔다.
명록은 가뜩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로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터라 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고 싶었다.
약간 앞에 있는 수진을 향해 힘주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 수진아~ 저기...... 우리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는 거 아니야? "
순간 앞에 걷던 수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싹 가벼운 몸짓으로 뒤돌아선 그녀가 약간 뽀로통한 표정으로 명록에게 말했다.
" 오빠! 이건.... 아주 아주 중요한 거니까 우리 꼭 걸.어.서 남산 정상에 올라가야 되요. 알았죠? 우린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
아니.....
뭐가 중요한 일이라는 거지?
우리의 데이트니까.....
소중하다는 건가?
근데 왜......
남산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거지?
길고 긴 도로를 따라 고개를 쳐드니 순간 현기증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다시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명록은 숨을 깊게 몰아쉬며 간신히 요동치려는 뱃속을 진정시켰다.
헐.......
으으......
한줄기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명록은 왠지 오늘 하루가 무지 길고 긴 시간이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하아."
수진은 점점 힘이 부쳐 걷기 힘들어 지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걸어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영연의 말을 곱씹으며 있는 힘을 내서 삼순이 계단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점점 명록이 뒤쳐지기 시작했다.
수진은 뒤로 처진 명록을 기다리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땀을 식혔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명록이 영 힘이 없는 듯 비틀 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고 다리야......
이제 조금 쉬어야 하지 않을까?
근데 명록 오빠는 왜 저렇게 안색이 안 좋지?
혹시......
수진은 만났을 때 서두른 듯 머리카락 흩어져 있던 명록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하!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아침을 못 먹고 나왔구나!
어쩐지.....
후후.....
마침 쉬기도 해야 하니 도시락을 꺼낼 순간이야!
" 오빠, 우리 저기 가서 좀 쉬어요."
" 휴~ 그래..."
수진이 있는 곳으로 올라온 명록의 팔을 붙잡고 끌어 당겼다.
명록이 영 힘이 없는지 그대로 딸려오자 올라오며
배고팠을 그를 상상하며 준비해온 도시락에 대한 생각이 더 강해졌다.
아마 어떻게 이런 걸 준비할 생각을 했냐며....
깜짝 놀라겠지?
애써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맛있다며 감동할 명록의 모습을 상상한 수진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수진은 도서관 앞 광장에 자리를 잡아 엉덩이를 붙이자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많이 걷는 중이었다.
명록도 어느덧 그녀 옆에 와서 주저앉았다.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명록의 앞에 수진이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도시락을 뒤로 했다.
" 오빠, 제가~ "
수진의 말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명록이 수진을 쳐다봤다.
정말 배고팠나봐~
진작에 쉴 걸......
수진은 도시락을 앞으로 내 놓았다.
그리고 수진은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뿌듯한 얼굴로 명록의 앞에 도시락을 펼쳤다.
참치 마요네즈 샌드위치.
계란 마요네즈 샌드위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센스 있게 보온병에 담아온 크림스프까지!
수진이 다 자신있어하는 것이었다.
학교에 종종 도시락을 만들어 가면 칭찬에 인색한 설아마저 호평했던 그것들!
명록이 수진이 이렇게 준비했을 줄 몰랐던 듯 멍한 표정을 짓다가 한 단 한 단 도시락이 모두 바닥에 펼쳐지자 금새 밝게 변하며 감탄했다.
" 와~~ 고마워. "
명록이 덥석 샌드위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수진은 급하게 샌드위치를 입에 넣어 볼이 뽈록해진 명록이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 맛있죠? 다들 괜찮다고 칭찬했던 샌드위치에요. 헤헤~ "
수진은 눈을 반짝거리며 평을 기다리듯 명록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재촉에 명록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입안에 넣은 샌드위치 때문에 말도 못하고 우걱우걱 씹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심지어 눈가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는 게 수진의 도시락이 제대로 감동한 듯 했다.
아......
눈물......
여자 친구가 해준 샌드위치를 처음 먹어서 감동한 걸까.
아니면 샌드위치가 그렇게 맛있었나봐.
하긴....
다들 맛있다고 하던 거잖아.
오빠.....
이렇게 보니 정말 귀엽다~
후후후......
수진은 자신이 싸온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 명록을 보며, 보람을 느꼈는지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이야 어차피 새벽에 만들며 맛을 본다고 잔뜩 먹은 대다가 명록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으로도 배가 불러왔다.
누군가 자신이 음식을 먹으며 저렇게 좋아한다는 게......
아니 이제 남자친구가 될 그가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며 먹다니......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은 순간이었다.
끝 => 으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