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제1부. # 6화. 남산 투 파 (Namsan too far) (1)
20.
" 후후."
수진은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 쟤가 미쳤나....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뜰라나 봐요. 토요일인데 애가 새벽같이 일어나네? 아니 오늘 토요일이 아닌가? "
수진의 엄마가 부스스한 잠옷 바람으로 거실로 나오다가, 평소 수진이 하지 않는, 부지런한 기상에 깜짝 놀라 남편을 깨웠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수진의 친구들은 모두 애인이 있었다.
주말이면 애인을 만나는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수진은
늘 점심시간이 되서야 엄마의 시끄러운 잔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났었다.
그런 수진이 이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수진의 엄마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진은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돌아보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있었다.
옅은 핑크빛 립글로즈로 마무리한...
한듯 안한 듯 청순해 보이는 화장.
Ok!
탱글탱글한,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긴 머리.
Ok!
신경 안 쓴 듯 편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공을 들여 고른 하얀 반팔 티셔츠에
숙녀 같은 느낌을 주는 베이지색 하늘하늘한 쉬폰 롱스커트.
Ok!
그리고.......
수진이 준비한 마지막 비장의 무기.....
도시락!
아마...
이걸 보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겠지?
수진은 눈을 감고 명록이 자신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한 도시락에 감동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절로 웃음이 나는 광경이었다.
수진은 마지막으로 오늘의 아이템, 자물쇠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이왕이면 나의 첫연애잖아.....
잘되고 싶어.
아니잘 될 거야!
천하의 배수진......
연애 시작이야!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며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해보는 그녀였다.
**************
으......
죽겠다.......
새벽 늦게까지 회식에 잡혀 있다가 이제서야 간신히 풀려난 명록이었다.
애매한 직장 내 위치가 더욱 그의 활약(?)을 요구하는 통에 도망도 가지 못하고 지금까지 잡혀있었던 것이었다.
박 과장님이 손가락으로 딱 명록을 지정하며 약간 혀가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 분위기를 잡는데 명록이의 메들리지.명록아~~ 한번 니가 분위기 좀 살려봐라~ "
그의 지목에 명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마에 손가락을 붙여 날을세워서 이마에 경례했다.
" 옛써~ "
사프한 선을 그리며 손을 내리곤 노래방 모니터 앞 공간으로 나가는 명록.
마이크를 잡고 번호를 꾹꾹 눌렀다.
노래방 기계마다 이미 번호를 외워둔 그의 애창곡.
명록이 분위기를 살릴 때마다 부르는 트로트.
나이를 넘나드는 트로트 노랫가락 속에서 이어지는 메들리가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반주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
간드러진 음색으로 여자처럼 허리를 비비꼬며 명록은 열창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소리.....
그리고 따라 부르는 합창소리와 함께 널따란 노래방 방 안이 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어푸~ 어푸~~
얼굴에 찬물을 쏟아 부으며 거센 세수를 하고 있었다.
물이 턱선을 따라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명록은 세면대 위 거울을 바라보았다.
좀비.......
그의 안색이 회색빛으로 보이고 있었다.
기나긴 시간.....
밤새 이어졌던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귀환한 명록이었다.
아.....
이대로 뻗어버리고 싶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오늘은 수진이 그에게 말했던 남산으로 오라는 날이었다.
간신히 우여곡절을 겪으며 용서를 받고 대신 함께 남산에 올라가야 된다는 특명을 받은 그가 출동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런 날......
안가겠다고?!
미친....
어떻게 얻은 용서였는가......
그전 실패했던 이벤트......
눈물의 원숭이 인형옷 이벤트를 통해 간신히 부여받은 남친 승차권 아닌가.......
기어서래도 가야하는 법이었다.
간신히 다시 이어붙인 연애의 실을 끊어먹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도 수진 그녀 앞에서 죽어야 했다.
그 옛날 아프다고 학교 가기 싫다고 하면
차라리 학교 등교하고 죽어라 하는 어마마마의 말씀처럼
죽어도 수진 앞에서 장렬히 전사해야 했다.
다시 찬물로 샤워를 했다.
벌써 세 번째 샤워기로 전신을 적시고 있었다.
정신만 추스를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몸을 씻을 작정이었다.
그런 정성 속에서 조금 정신이 맑아진 듯
몸을 건사 할 수 있게 되자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다.
방 안 서랍에서 깔끔한 붉은 빛 줄무늬 셔츠와 흰 티, 그리고 약간 밝은 청색의 청바지를 꺼내 침대에 펼쳤다.
휴우.....
심호흡을 하고 짧은 머리를 말린 뒤 옷을 입었다.
빨래한 옷을 입는 기분.
쫙~ 청바지 기장을 펴서 입고는 허리를 좌우로 돌려 맵시를 잡아보았다.
타이트하게 쪼여오는 청바지의 느낌이 매일 출근하며 입는 양복정장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겠지.....
오늘 데이트 장소는 남산이구나......
남산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그리 자주 방문하는 곳은 아니었다.
최근에 간 기억은 전혀 없는.......
차라리 청계천 쪽은 갔어도 남산에 올라간 기억은 정말 옛날에 올라간 기억뿐이었다.
가물가물한 남산의 정경.
흐음.......
근데......
왜 하필....
남산일까......?
명록은 새삼 꼭 남산에 같이 가자고 하는 수진의 마음 속이 궁금했다.
**************
수진은 남산 맨 아래 남대문 시장 쪽 도로가에서 서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명록이 언제쯤 오려나 찾고 있었다.
수진이 도착한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명록이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자 수진은 조금 기분이 상했다.
수진이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약속시간 15분 전.
꽤 넉넉히 남아 있었지만 수진은 조금씩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 남자 뭐 이래?
최소 한 시간 전 부터 나와서 날 기다려야 하는 거 아냐?
근데 15분 전에도 코빼기도 안보이네?
으.....
확실히 교육시켜야 겠어~!
왠지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집에서 서둘러 나온 자신이 억울해졌다.
주말이라 그런지 이 시간에도 도로에는 나들이를 가는 차량들이 수없이 지나갔다.
멍하니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던 수진은 점점 지겨워 지기 시작했다.
다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지만...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사실 아직 3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은 초가을이라 그런지 햇볕이 따가운 감이 있어서
점점 해가 머리 위로 오르기 시작하자 뒤통수가 따끔따끔 익어가는 것 같았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도시락을 들고 있던 팔까지 점점 무겁게 느끼기 시작했다.
괜히 도시락을 싸왔나?
수진은 무거운 도시락을 힐끔 내려다보며
한쪽 팔로 도시락으로 무거워진 어깨를 두들겼다.
어깨를 두드리던 수진은 고개를 돌려 남산 위로 올라가는 도로를 보았다.
경사진 도로를 보자 등산이라면 질색하는 자신이 괜히 남산을 가자고 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남산에 자물쇠를 다는 건 몇 년 전 티비에서 모 가상 결혼 프로그램에서 연예인 커플이 그곳에 자물쇠를 걸기 시작하면서 시작됐다.
많은 연인들이 그 후로 자신들의 사랑을 굳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자물쇠를 걸기 시작했고
수진도 그 프로를 보며 그 행동이 로맨틱하게 보여서 연애하면 해보고 싶은 몇 가지 일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 헐? 그래서? 결국 네가 얻은 건 자물쇠 하나 걸러 가는 남산 데이트야? 거기 올라가는 게 전부? 거긴 힘들게 왜 올라가? "
" 안 힘들어.....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면 되지, 그게 뭐가 어렵다고."
친구들을 버리고 명록을 쫓아간 덕분에 그 다음날.
수진은 어쩔 수 없이 친구들에게 사건의 경과보고를 할 수 밖에없었다.
하지만...
수진이 명록을 용서하며 받아온 것이 겨우 남산 데이트라는 말에 영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수진에게 되물었다.
수진은 남산에 오르는 게 뭐가 힘드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영연은 답답해졌다.
아니 기껏 주도권을 잡았다면 이럴 때 명품빽 하나쯤은 얻어내야 하는 거 아닌가?
겨우 남산이라니.......
영연은 순진한 화상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자신이 하려는 말도 못 알아듣다니, 고작 케이블카 타령이나 하는 이 화상의 앞날이 캄캄했다.
그때 영연의 머릿속에 악마가 웃기 시작했다.
영연도 악마를 따라 웃으며 수진을 쳐다봤다.
" 얘가, 뭘 모르네? 자물쇠만 걸면 모든 커플이 다 안 헤어지게? "
" 그런가..?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
" 그게 아니라. 그 말은 진짠데, 네가 하나를 빼먹었다는 거지! "
" 뭐가 더 필요한데? 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단 말이야."
" 으이구 그러니깐 네가 모태 쏠로라고 하는 거다. 넌 연애를 글로 배우냐? 인터넷에 쓰여 있는 건 진실반 거짓 반이야. 잘 들어, 이 언니가 진실을 말해 줄게. "
" 으...그래? 그럼 뭔데?"
넘어온 듯한 수진의 멍한 표정에 영연의 입술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둘 사이를 지켜보던 나희와 설아도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과자를 입에 넣고 있었지만, 수진은 이미 영연의 말에 집중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 No pain, no gain. "
영연이 눈을 감고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수진은 그녀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아 다시 또 고개를 갸웃 거렸다.
" 응? 그거랑 이 이야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
" 아~ 모쏠이 뭐 알겠니? 그 이야기의 주의 점은 케이블카 타고 휙 하고 가면 안 돼! 요는 정성!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맨 밑에서 걸어서 올라갈 것 오케이? "
영연이 수진을 타박하며 눈을 치켜세웠다.
수진이 생각하기에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으니, 영연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림에 점점 지친 수진은 답답한 컨버스 운동화 안에서 갇힌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아이참, 언제 오는 거야?
수진은 또 기계적으로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1분전.
약속시간이 다 되도록나타나지 않는 명록에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수진은 명록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저 멀리 명록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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