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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제1부. 5화. 그녀를 적시는 방법 (3) (17/195)



〈 17화 〉제1부. # 5화. 그녀를 적시는 방법 (3)

17.



터벅터벅.


하필 퇴근시간과 맞물리는 귀가시간 덕분에 수진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치이며 힘들게 집에 도착했다.


끼이이익-

열쇠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현관으로 들어간 수진을 자동 센서 등이 켜지며 유일하게 반겨주었다.


해가 저물고 있는 조용한 집......
집안은 온통 컴컴했다.




엄마는....
어디 나갔나?

외로운,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쓸쓸한 집.
수진은 열쇠를 현관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고는
어두운 거실을 지나 자신의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수진은 침대에 가방을 던져 넣고 입고 있던 티셔츠와 청바지를 벗었다.
편한 옷을 찾던 수진의 눈에 의자에 걸려 있는 살굿빛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한 것이라며 이야기 하던 나희의 말.
그녀 셋중 단 한명도....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생각에
수진은 한숨을 쉬며 티셔츠에 팔을 끼워 넣었다.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수진은 옷을 다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해가 다 져버렸는지 어두워진 방안에서 수진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만 깜박거렸다.



손에 쥔 휴대폰이 찌르르 울리며 액정의 불이 들어온다.



명록일까....?




수진은 떨리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 이야기는 해봤어? -나희 ]

나희에게서  메시지에 수진은 실망했다.
명록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바라는 걸까?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며 수진은 나희에게 성의 없이 두 글자를  보낸다.



[...아직.]

수진은 아까 대강의장에 들어와서는 민망하고 당황해하는 명록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해결했겠지만 걱정이 되는  어쩔 수가 없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을 겪게 된 것 같아 수진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게 사라졌는데 지금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먼저 연락해야 할까?

망설이던 수진은 휴대폰의 새 메시지 작성을 눌렀다.
아무것도 없는  빈 액정.



[ ... ]



휴대폰 액정 속 커서가 깜박깜박 거렸지만
막상 수진은 명록에게 전할 어떤 말도 적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 수진은 다시 휴대폰을 껐다.



내가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그녀는 침대에 머리를 박고 눈을 감았다.









**************






어제 대판 깨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잠잠했다.
아마도 승필 선배가 손을 미리 써놓은 모양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자신이왜 외근을 핑계로 나가는지 알고 있는 승필 선배뿐이 없었다.
 과장의 마수로부터 날 구해줄 사람 역시 그 밖에 없었다.


체.....
솔직하면 좋잖아.
이럴 때 보면 전혀 남자답지 않아......
히히....



명록은 피식 속으로 웃었다.
남몰래 도와주는 승필의 모습이 왠지 수줍은 여자애 같은 느낌을 줬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를 믿고 박 과장에 외근을 나가자마자 바로 사무실을 나오는 명록이었다.
업체에 들려서 어제 부랴부랴 주문했던 것을 차에 실고 수진이 다니는 학교로 향했다.



주차권을 받고 그녀가 다니는 강의동 쪽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은 기필코......!




우선 주 강의는 이쪽에서 받는 듯 했다.
불행히도 그녀의 수업시간표를 구할  없으니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교훈으로 약간 캐주얼한 정장차림으로 복장을 선택했다.
하지만 강의실 입구에 있는 경비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하루 만에 나를 기억할 리가 없겠지......?


경비들의 시선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뭐......
나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건물에 들어가지도 않을테니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일찍부터 나와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1교시부터 수업이 있었다면 이미 강의동으로 들어갔을 것 같았다.



윽........
그러고 보니
만약 그렇다면 아래만 보고 있어선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입구에서  있다 보면 한번은 지나갈 것이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조금만 기다리면
바로 여자 주인공이 지나가 주던데 이거 뭐......




역시 영화와 드라마.....
이딴 것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냉엄하기 짝이 없는 현실.
한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도 기다리는 수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슬슬 좀도 쑤시고 외근 후 처리해야 할 업무도 압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종종걸음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설마.......
수진이......가 오늘 수업 없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은 불길한 상상을 부른다.
불길한 상상은 용기를 사그라지게 하고 기운을 점점 사라지게 만든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명록은 마음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처음 이벤트를 생각하며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피시식 세찬 소리를 내며 바람 빠지는 듯한 느낌 속에서 맥이 풀려갔다.


아.....
직딩의 슬픔이여......
회사 일을 때려치우고
여자에만 매달릴  없는 직딩의 애달픔이여......


몸이 매이니 마음도 점점 노예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직장인들이 연애하면서 애인들과 트러블이 생기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고작 세번 밖에 안 만났는데 이정도면
정말 여대생을 상대로 사귄다고 해도 과연 잘 연애를 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혼자 시작한 망상은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일단 문제는 그는 수진의 용서가 없으면 그런 망상의 전개를 절대  수 없는 길이었다는 것이었다.
한숨을 쉬며 다시 강의동 쪽 입구를 보고 아래 학생회관 쪽 올라오는 길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갑자기 낯에 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 앞서 걷고 있는 한명.
그리고 살짝 뒤에서 그녀를 쫓아오고 있는 삼인방 그녀들.



조잘조잘 거리는 뒤에  명에 비해
약간 굳은 표정의 한명은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쓰고 걷고 있었다.
약간 시선을 아래로 깔고 걷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멈칫하는 표정.
그녀 또한 명록을 본 모양이었다.


수진아.......



명록은 침을 꼴깍 삼키며 바라보았다.



자.....잘하자......
이게 마지막 기회다 생각하고!


수진은 더욱 굳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의  명은 그때 주점에서 보았던 얼굴들이었다.



애교 많았던 영언.......
조용히 술을 마시던 아...잘 모르겠다......
그리고 육회의 설아.
그들도 자신을 보았는지 서로 수군거리고 수진의 뒤를 따라 다가왔다.


어차피 강의동 건물 입구 길목에 있기 때문에 수진이 돌아갈 길은 없었다.




30미터.....
20미터.....
10미터.....
5미터....




수진의 긴장된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지금이다!!!!!!!!!!!!!!!




순간 명록은 준비했던 이벤트를 시작했다.
리모컨을 눌러 열어두었던 트렁크를 잡아주고 있던 걸쇠가 풀리도록 실행했다.



짠!



순간 헬륨가스가 들어있는 풍선이 화르르 하늘로 올라갔다.
강의동으로 올라가던 수진을 비롯한 모든 학생의 시선이 그 풍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준비한 비장의 카드!



[ 수진아 정말 미안해. 날 용서해줘. (_ _) ]

-라고 쓰인 플래카드 (placard)가풍선 사이로 올라가며 쫙 펼쳐질 것이다.



그런데....
엥?!

수진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명록이 되돌아보니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플래카드가 바람에 휙 말리며 딱 반으로 접혀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악!!!!
뭐야.... 저게!!!


아무런 글자도 안보인 채 뭉쳐진 플래카드가 점점 높이 올라가버리고 있었다.
당황한 명록이 고개를 돌려 수진을 보니 그녀의 표정은 약간 어이없다는 기색과 함께 기가 막히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니?
이 어설픈 개그는.......?
뭐...
딱 이런 느낌의 표정?



수진은 어버버 말도 못하고 바라보는 명록의 옆을 휙 지나치며 빠른 걸음으로 강의동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수군거리며 삼총사의 그녀들도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들의 눈이 가늘게 초승달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명록을보며 웃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강의동에서 나오는 학생들......
들어가는 학생들 모두가 명록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쿡쿡쿡 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명록은 얼굴이 완전 빨개져서 잽싸게 트렁크를 닫고 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시동 걸고 바로 학교 정문을 향해 내려갔다.


으......
차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흑!
쪽팔려.......
젠장할.....
바람......



분명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제갈량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을 했던 모양이다......

모사재인성사재천 (謀事在人成事在天)


아흑.......!!!!!!





지금 이순간은 실패보단 쪽팔림이 먼저였다.
운전만 안하면 핸들에 머리를 쳐박고 박치기를 계속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부우우웅 엔진소리 마저도 서글픈 명록이었다.








**************









나희와 영연 설아가 재잘거리며 수진과 함께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젊고 꽤 잘생긴 교수님 덕분에 수업은 여학생들이 만원이었고, 섹스의 철학이라는 강의 내용에 흥미를 느낀 남학생들도 잔뜩 이었다.

덕분에  수업이 끝나고 나면 나희와 영연과 설아는 교수와 남학생들에 대해, 혹은 섹스의 철학에 관해 토론하며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들의 입이멈췄다.

조용해진 그녀들에 땅을 보며 걷던 수진도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앞을 쳐다봤더니, 명록이 저멀리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언제 옆으로 왔는지 알 수 없는 나희가 옆에서 수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웃는다.




 용서해줘라, 불쌍하잖아. "


" 누구는 허벅지 한번 만졌다고  번을 빌러오네? 한번만 더 오면 삼고초려다 야."


" 이번엔  뭘 준비한  같아? "






" 글쎄? 자동차를 끌고  걸 봐선... "




" 납치? 꺄아~ 로맨틱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런 용기도 있다니. 쓰레기 치곤 크크크.... "


갑자기 나희가 방금 선을 넘고 있는 영연의 재빨리 입을 막았다.
하지만....
수진은 이미 명록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서 그녀들을 말을 못들은 것 같았다.

그제야 나희가 영연의 입에서 손을 떼어 냈다.





" 아니, 풍선이벤트 아닐까? "

" 풍선이벤트? 요즘 누가 그런 고리타분한 걸 해? 그냥 여자  잡고 끌고 가면서 ‘수진, 우리 저 세상 끝까지 도망가자!’라고 하는 짐승남이 대세야. "

" 만원 내기 할래? 누가 맞는지?"

갑자기 끼어든 설아까지, 옆에서 수진의 친구들이 명록의 행동에 내기를 하며 시끄럽게 굴었지만 수진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진은 지금 당장이라도 걸음을 돌려서
보이는 아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도와줄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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