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제1부. # 5화. 그녀를 적시는 방법 (2)
16.
한 갈래로 성의 없이 질끈 묶은 머리.
얼굴을 반쯤 가린 두꺼운 검은색 뿔테 안경.
그리고 유난히 짙은 피부 메이크업을 한 수진이 어두운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영연과 나희는 평소와 전혀 다른 수진의 모습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혹시 쟤 데이트에서 무슨 일 있던 거 아니야? '
나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연의 귀에 속삭였다.
영연도 나희의 귀에 쏙닥거렸다.
' 글쎄? 전에 내가 똥꼬 빠지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코디 해줬는데....... 꽤 예뻤다고. 설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개새끼가 혹시.... '
데이트가 성공했다면 환한 얼굴로 왔어야 했는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듯 이상한 수진의 모습에 영연 역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철저히 꾸며놓은 수진이 불만족스러웠던 걸까?
나희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이건 자신이 쌓아올린 데이트 경력에 대한 분명한 도전이었다.
아니 그렇게 예쁜 아이를 저따구로 만들었다니......
그 새끼......
눈깔이 동태눈깔 아냐?
첫데이트에서 뽕뽕 천국으로 보내줬어야지...
애를 저 몰골로 돌려보내?
으으으으......
' 잘됐는데 쟤가 왜 저러겠어. 한번 물어나 봐. '
나희의 말에 영연이 볼펜 끝으로 수진의 등을 찔렀다.
수진이 고개를 돌리자 영연이 목소리를 낮춰 수진에게 말을 걸었다.
" 야- 너 어제 데이트에서 뭔 일 있었냐? "
" 아니. 그냥 그랬어. "
수진은 다시 작게 대답하곤 칠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연이 계속 그녀의 등을 쿡쿡 찔러댔지만 수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교수가 강의를 하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때마침 옆문으로 한 젊은 남자가 꽃을 들고 강의실로 들어왔다.
대학교에서 말끔한 정장을 입고 꽃을 든 남자의 갑작스런 등장에 강의실이 술렁였다.
하지만 남자는 갑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백이십명의 학생들의 모습에 더욱 당황했는지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한 채 강의실 문 사이에 멍하니 멈춰 섰다.
" 누구를 찾아왔어요? "
짧은 컷트머리의 젊은 여교수가 반무테 안경을 들어 올리며 날카롭게 남자에게 물었다.
교수는 남자의 손에 든 꽃다발을 보고는 기분이 나빠졌는지 한쪽 입술을 씰룩 하고 들어올렸다.
얼어버린 듯 남자의 대답이 없자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우리 수업 받는 사람 중 이분한테 고백 받아야 할 학생? 손들어 봐요. "
교수의 말에 강의실이 더욱 술렁였다.
다들 하나같이 수군대며 저 남자가 고백할 대상을 맞춰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박수 받을 만큼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분명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의 예상대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뒤쪽에 앉아 있던 세 명의 여학생은 고개를 숙이고 숙덕였다.
당연히 나희, 영연, 설아였다.
자연스레 그녀들의 시선은 앞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수진의 뒷모습을 향했다.
" 저거 명록오빠 아니야? "
설아의 말에 굳어 있던 수진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굳어 버린 명록이 자신을 발견하고 불러낼까 봐 부끄러운 수진은 결국 숨듯이 책상에 머리를 숙이고 차마 고개를 못 들었다.
" 아저씨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 "
어떻게 알았는지 파란남방을 입은 수위 아저씨가 와서 얼어버린 명록의 팔을 질질 끌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어어어~~ 소리를 내며 끌려간 명록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사라진 뒤 강의실 문이 휭 하니 열려있었다.
그러자 교수는 열려 있는 강의실 문 앞으로 절도 있게 또각또각 걸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탕
대 강의실에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벽에 반사되며 크게 울렸다.
" 자~ 청춘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고백은 분위기 좋은 곳에서 받도록 하세요. "
비아냥거리듯이 교수가 말을 꺼내자 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이 모두 키득 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뒤에 앉아 있던 네 명의 여자들은 굳어버린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 자, 출석 부르겠습니다. "
여교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단상 위로 올라가 출석부를 들어올렸다.
**************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연영을 필두로 세여자가 수진을 끌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잔뜩 인상을 쓴 수진의 얼굴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영연이 화장실 문을 걸어잠궜다.
문을 잠근 뒤 돌아선 그녀의 표정은 자못 살벌했다.
" 야, 이년아 너 먼일 있지? "
영연이 입을 열었다.
수진은 나희와 설아의 얼굴을 보며 구조를 요청했지만 이미 이들 셋 모두 한통속이었다.
수진은 물에서 잡혀 올라온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영연이 어르고 달랬지만 상처 입은 수진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때 화장실 문고리가 덜컥덜컥 하며 돌아가다가 잠귄 탓에 걸려 멈췄다.
탁탁 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야, 화장실 누가 잠갔어."
" 이층에는 화장실은 이것 밖에 없는데 잠그면 어떻게 해요! 열어요! "
문을 쿵쾅 거리며 사납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영연이 입을 열었다.
" 미친년들아~! 아래층 가면 되잖아! 이렇게 두들기다가 바닥에 싸느니 아래층을 가겠다! 대가리에 똥만 찼냐! 지금 바쁘니깐 아래 층 가서 똥 싸! 더런 년들. 칵! "
구성진 어조로 나오는 영연의 욕설에 문을 두들기며 난리 피우던 여자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어느새 사라졌는지 밖이 조용해졌다.
" 봤지? 너 말 안하면 여기서 어떤 년도 떵 못 싼다? 자~ 말해, 어여~! "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협박.
수진은 영연의 무식한 협박에 머리가 어찔했다.
수진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라지에이터 위에 걸터앉아 있던 설아까지 박수를 쳐댔다.
아무래도 말하지 않음 화장실에서의 시간은 끝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자 결국 수진은 어제 일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명록과의 시간을 설명하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자 주변인들의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수진을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 보는 눈빛.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그녀들의 시선에 수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 그게 끝이여? "
" 응......"
영연은 얼굴에 썩은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나희는 눈앞이 캄캄해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동안 사라졌었던 편두통이 수진 때문에 되살아 난 것 같았다.
" 그래서 그 남자가 널 강제로 했어? "
설아마저 답답했는지 라지에이터에 앉아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흔들거리며 수진을 쳐다봤다.
수진은 얼굴이 붉어져서 항변하듯 작게 소리쳤다.
" 아니, 그...그런 건 아니지만...... 하지만! 막...... 가슴을 만지고 거...거기다가 여자 치마 속으로 손을 넣다니 저질이잖아!!! 아...안 그래? "
동의를 구하는 듯 소리치는 수진의 말에 돌아온 건 그러나 냉랭한 설아의 한마디.
"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쳇..... "
설아가 낮은 소리로 작게 말했지만
좁은 화장실 특성상 라지에이터와 세면대 앞의 좁은 거리는
그 정도의 목소리가 수진의 귀에 전달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애초 안 들릴 수가 없었다.
" 무....... 뭐? "
설아의 매정한 말이 끝나자 멍해진 수진이 놀라 우물거리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놀란 건 그녀뿐인지 다른 친구들은 오히려 설아의 말에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 그건 생리적인 반응이나 마찬가지야. 우리가 맛있게 생긴 디저트를 보면 입맛이 도는 것처럼, 키스를 하면 저절로 흥분하는 거지. 그리고 우리가 스푼을 들고 디저트를 탐내는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는 거지 턱. 이렇게. 척하면 턱. "
나희가 영연의 가슴위로 손을 올린다.
영연의 얼굴이 점점 썩어들어 가자 나희가 웃으며 영연의 가슴에서 손을 치웠다.
" 그 남자 앞길이 캄캄 하구먼, 네가 읽는 할리퀸도 그렇지 않아? 전에 너 보고 있는 거 슬쩍 슬쩍 보고 있으니 유두가 어떻고 저쩌고 하면서 키스만 하면 남자가 옷 안으로 손을 넣고 가슴을 애무하던데? 네가 꿈꾸는 게 그런 거 아니었어? 차라리 네가 환장하고 보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발정난 개새끼들에 비하면 명록 오빠의 행동은 애교나 마찬가지 아니야? 에그. "
수진도 나희와 영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가 했던 행동들이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느꼈던 불쾌감......
그러나 자신보다는 남자에 관한 것이라면 분명 저 세 명이 훨씬 더 많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순순히 인정하기엔 역시나.
정말 그런 걸까?
수진의 이마가 찌푸려진다.
그녀들의 말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 수진의 모습에 설아가 싱글싱글 웃으며 라지에이터에 탕탕탕 발뒤꿈치를 부딪쳤다.
**************
" 점잖은 사람이 뭐 하는 짓입니까? 에이...... "
푸른 제복의 나이든 경비가 명록을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서있는 다른 경비의 표정도 그리 곱지 않다.
하긴......
이런 돌발사태가 벌어지면 그들에게도 분명 나중에 말이 될 게 뻔 하니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명록은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고는 잽싸게 강의동을 빠져나왔다.
손아래를 바라보니 끌려나오며 흔들린 꽃다발은 어느새 흩어져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하.....
거기가 대강의실일 줄이야~~~!!!
그리고 수업하고 있는 교수가 여...여교수라니.....
백여명이 넘는 남녀학생들의 집중되는 시선에 꼼작도 못하고 있는 사이 어어어~ 만을 남기고 끌려나온 자신이 한심하고 쪽팔렸다.
어느새 강의동 앞 널따란 공간에 서있는데 그를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계속 집중되고 있음을 알았다.
정장 차림에 꽃잎이 반 이상 흩어진 꽃다발을 들고 멍하니 서있는 명록의 모습이 시선을 받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우선 가까이 보이는 휴지통에 꽃다발을 쑤셔놓고는 멀찌감치 강의동에서 반대방행으로 뛰어갔다.
헐.......
개망신.....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있나....!
아흑 쪽...
팔려....
상규의 방법을 쓰기도 전에 얼굴만 팔리고 망한 분위기 이었다.
그래도 포기는 할 수 없었다.
나이도 21살.......
꽃띠 중 꽃띠에.......
수진이의 용모가 이미 절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게 만드는 그런 이쁜이 아닌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쏠로로 살아왔는데....
사귀겠다고 말하라고 눈물까지 글썽이던 그런 여자를
이 세상 어디서 다시 만나겠는가.
처음 과사무실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쿵하고 멈추는 듯한 충격.
이미 그순간 자신이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했던 것 같다.
카페에서 아마 그애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 봐선......
제정신이 아닌 듯 하니 정신 차리기 전에 재빨리 그녀의 옆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이런 하늘이 주신 기회를 걷어찬다면 병신일 뿐더러....
그리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살아 생전 그렇게 예쁜 여자와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절절히 들었다.
그래.......
어차피 박 과장한테 개박살 날 것까지 각오하고 나온 길이잖아.
회사에서 깨질 만큼 뭐라도 건져야지.......
절대......
수진이의 용서를 받자.......
받아내자!
아흐.......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이런 여자는 다신 없을 거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달리는 중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이벤트 장면.
그래!
그걸 해보자.
그리고 절절히 사과하면서 용서를 빌면....
수진이도 받아줄거야.
명록은 표정이 밝아지면 학교 정문을 향해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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