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제1부. # 5화. 그녀를 적시는 방법 (1)
15.
-쾅!
수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아니 쟤가...? 너.... "
엄마가 문 밖에서 수진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수진은 그대로 가방을 의자에 던지고 침대시트에 머리를 묻었다.
수진은 할 수만 있다면 그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환상적인 첫 경험을 꿈꾸던 그때로......
어쩌다가 이렇기 돼버린 걸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답게 보내고 싶었는데....
명록이 미워 죽을 것 같았다.
" 흑....으으, 흑. "
자신의 몸만 원했던 명록의 얼굴이 떠오르자
다시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할리퀸 소설에서 보았던....
수많은 여주인공 중 자신처럼 나쁜 남자에게 걸려서
순결을 잃고 각종 괴롭힘 속에서 인생이 망가지는 그런 인물이 마구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소설에서는 나중에 좋은 남자를 만나서 해피엔딩이라도 있었다.
현실 속에서 수진에게도 그런 미래가 있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끝없는 절망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에게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마음껏 울을 만도 한데
끅끅 소리를 내며 수진은 울음을 속으로 삼켰다.
아니 이불 속에 머리를 깊게 파묻었다.
울다가 지쳐 잠이 든 수진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울리는 휴대폰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부재중 전화 3통]
부재중 전화.
모두 간밤에 명록에게 온 전화였다.
수진은 애써 무시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움직였다.
아악!
이게 뭐야.
씻기 위해 화장실 거울을 본 순간 수진은 경악했다.
퉁퉁 부어버린 눈.
그리고 화장을 지우지 않아서 팬더처럼 번져버린 다크서클.
자신이 보기에도 엉망진창인 얼굴에 수진은 서둘러 찬물로 얼굴을 닦아냈지만 이미 부어버린 눈은 전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샤워기를 통해 퍼지는 거센 물줄기가 따갑게 수진의 마음을 찔렀다.
첫경험....
그게 뭐라고 나를 이렇기 까지 힘들게 할까?
또그가 뭐라고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고....
나는 또 뭐라고 이렇게 쳐져 있는 걸까......
수진은 물에 닿은 발이 따끔따끔했다.
발을 내려다보니 어제 빠르게 걷는 명록을 따라 걸었을때 새로 산 구두를 신었던 탓에 수진의 뒤꿈치를 비롯해서 잔뜩 상처가 나있었다.
수진은 등을 웅크리고 잔뜩 상처 난 발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첫 데이트를 기다하며 골라 신었던 구두.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그 데이트에서 발마저도 상처가 나버린 것이 또다시 가슴을 욱씬거리게 만들었다.
주저앉아있는 사이.....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수진의 뺨을 따라서 흐르고
그녀는 등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가만히 물줄기를 받아냈다.
평소보다 긴 시간....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진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위이잉 하는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 속에 디리링 하며 휴대폰이 울렸다.
수진은 빠르게 휴대폰을 찾았다.
휴대폰의 액정에 불이 들어온 순간 수진은 실망했다.
여전히 부재중 전화 세 통뿐.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에 전화가 온 줄 착각을 했다.
왜 더 연락하지 않는 걸까.......?
수진은 죄 없는 휴대폰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처음 지갑을 찾으러 왔을 때......
극장에서의 영화관람......
매운 떡볶이 집에서의 그의 모습.......
자신이 취했다고 하니 한달음에 달려온 그.
그리고 그 다음날 한 침대에서 둘이 전라로 엉켜 있던 모습.
흐흐흑....
키스 후 허벅지를 더듬던 그의 거친 손의 느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다시 주르륵 눈물이 흘러 내렸다.
대체 왜 난 그한테 매달렸을까?
술에 취해서???
나를 위해주고 .....
좋은 인상을 주었던 그는 어디에 간 것일까.
**************
분명 화를 냈어.......
화가 났어......
어찌지?
어떻게 하지....?
명록은 차문을 닫고 그녀가 가버린 뒤 어찌해야 할 바를 알 수 없어 근처에 차를 세운 채 고민했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아니......
이젠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화를 내버리고 간 수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화를 낸다.......
사실 데이트도 처음인 그에게 모든 것이 신세계이었다.
로맨스 영화도 많이 봤고 소설도 많이 읽었다지만....
실제 여자사람과 단 둘이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은 체험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화를 내버리고 가버리는 상황이라니.......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준 강의도,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일단 드는 생각은....
우선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과의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인간으....
인간의 도리기도 하니까.
배수진.
그녀의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음악소리.
밝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전자음의 안내멘트.
생각은 했지만 역시 수진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혹시 전화기를 옆에 두지 않아서 안 받은 건지도 몰라......
다시 4분 정도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새 달라진 멜로디.
그리고 계속 되는 음악.
아까 그 여자의 음성.
"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띠 소리이후 ......"
뚝.
흐음........
명록은 난감했다.
아무래도 전화를 일부러 안 받는 모양인 듯 한데 정말 그런지 확신도 할 수 없었다.
모텔에서 홀로 나온 뒤 겪었던 시간이 다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데자뷰(deja vu).
또다시 그녀와의 인연이 끝날 거 같은 이 느낌.
어떻게 해서라도 잡아야 할듯 한데.......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머.....
대화라도 해야 어떤 방법을 찾을 거 아냐......
다시 연락하자.......
다시 통화시도.
또 달라진 멜로디.
헐......
원래 이렇게 통화연결시 음악이 바뀌었나?
별게 다 신경 쓰이는 명록이었다.
이젠 음악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초조하게 연결을 기다렸다.
스티어링휠에 얹고 있는 손가락이 톡톡거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나.......
"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띠 소......"
툭.
하아.......
이 이상 전화하는 건 오히려 수진을 자극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그 순간 드는 얼굴.
그래......
차라리 그에게 묻고서 도움을 받자.
이러다간 더 상황만 나빠질 거 같아.......
명록은 시동을 걸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잠들긴 틀려먹은 기분이 들었다.
**************
" 하하...... 여자가 왜 화냈는지 모르겠다? "
명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필 선배는 그런 그를 보며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 전 동영상 강의대로 했거든요. 키스도 나름 잘 진행된 거 같고요. 흐음.... 머랄까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수진도 잘 받아주는 느낌? 그래서 다음으로 진행했는데....... "
" 다음? "
순간 승필 선배의 눈썹이 꿈틀했다.
" 네.... 가슴을 애무해야 된다고 해서요. "
" 가슴??? 그리고 뭘 했는데? "
명록은 잠시 망설였다.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는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알기에 결국 순순히 털어놓았다.
" 그리고 치마 속으로 손을....... "
그순간 승필 선배는 한심한 눈초리로 그를 보며 말했다.
" 야..... 이 한심한 모쏠아. 너..... 여자애가 그만 하라고 했는데 맘대로 진행한 거냐? 분위기 타서 하라고 분명 가르쳐줬는데. 그리고 내가 준 동영상 말고 멀 본거냐? 분명 키스 이상은 알려준 적 없는데 가슴은 뭐고 치마는 뭐냐!? "
아~!!!
그런 의미가....!!!!!
명록은 학원에 몰라가서 미리 나갈 진도를 예습한 것이 들통 난 학생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그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승필 선배 탓이었다.
만나자마자 확실히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등 모텔에서 빨래만 하고 왔다고 잔뜩 타박해서는 괜히 자신의 마음 싱숭생숭하게 해놓고이제 진도를 나가다 이런 대형 사고가 났는데 예습했다고 이러심 곤란한 것 아니삼!!!
어찌됐든 지금은 그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명록이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배. 수진이 많이 화가 난거 같은데...... 전화도 안 받아요. 하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하....... "
그런 그의 머리에 꿀밤을 딱 때리는 승필.
아.....
진짜 아팠다.
명록은 머리에 금이 가지 않았나.....
혹이 생기기 않았나 생각했다.
이 사람은 가끔 손버릇이 너무 안 좋단 말이야......
" 뭘 어떡해!? 이런 한심한...... 당연히 여자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서 풀어줘야지. 어설픈 사과 따위 하지 말고 확실하게 마음 풀어줄 수 있게 해야지. 안 그럼 넌 이걸로 그 여자한테 아웃이다. 내 장담코! "
아웃!?
명록은 승필 선배를 놀라 바라보았다.
으.....
안 돼......
고작 세 번 만나고 아웃이라니.........
그는 승필 선배를 향해 매달리듯 말했다.
" 윽...... 어떡해야 되요? 선배. 어떻게 하면 촉촉이 적실 수 있을까요? "
헐.....
자신이 말하면서도 먼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시다니......
무슨......
이.......
야동틱한 발언은 무엇인가!
승필 선배는 씨익 입 끝이 길어지더니만 명록의 손길을 툭 밀치며 말했다.
" 나도 이젠 모르겠다. 이 구제불능 모쏠~ 이젠 너의 발로 직접 운명을 개척해봐라. 흐흐흐....... "
그리고는 휙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창가에 그가 마신 커피의 흔적이 남은 종이컵만이 남아 있었다.
이.....이런 황당한!!!
그가 사라진 계단을 내려다보며 명록은 가슴이 뻥 뚫린 듯 한 마음으로 서있었다.
겨울바람이 휭휭 몸을 관통하는 기분?
젠장......
지금까지 신나게 알려주더니 정작 곤란할 때 쏙 도망가 버려?
이제 잔업 따위 내가 대신 맡아주나 봐라......
제길슨........
명록은 그가 남긴 종이컵을 와락 잡아 우그러뜨렸다.
결론은 어찌됐든 수진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으라는 얘기로 추스를 수 있었다.
사죄.....사죄......
어떻게 해야 용서를 빌 수 있을까나......
순간 예전 대학시절 상규가 미주한테 용서를 빌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무지......
쪽팔린 장면이었지만......
어찌됐든 녀석은 미주에게 용서를 받았고 그 뒤 같이 교정을 내려갔다.
그래.....
그걸 써먹어 보자.......
명록은 손 안에 구겨진 종이컵을 좀 더 힘껏 움켜쥐며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다.
물론 마음 속으로 말이다.
<<그녀를 적시는 방법(1)>> 끝 => <<그녀를 적시는 방법(2)>> 으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