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제1부 : # 2화. 헬륨가스 같은 그녀들의 우정 (4)
8.
정말 미치겠다.
이것들....
수진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명록을 불러내 벗겨먹는 것까지는 이해해줄 만했다.
어차피 그가 아니라도 주변 테이블에서 힐끔 힐끔 그녀들을 쳐다보는 남자들.
합석만 해줘도 그런 남자들이 술값 정도야 애교삼아 내줄 법했다.
수진이 정말 불편한 건 명록을 옆에 붙여놓고 계속 스킨십을 유도하는 그녀의 친구들이였다.
"4번은 1번의 볼에 뽀뽀해."
"1번은 누굴까? 손들어. 어머~ 명록 오빠네요 . 그럼 4번은 누굴까?"
저 가증스러운 것.
남자 앞이라고 있는 내숭 없는 내숭을 다 떠는 영연의 말에 수진은 손을 들고 눈앞에 있는 술잔을 비워 냈다.
**************
설아를 따라 머쓱한 표정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명록.
영연이 그의 옆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가 팔짱을 척 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거였다.
" 어머 얘~ 불러놓고 인사도 제대로 안하니? 명록 오빠? 저는 최영연이에요. 수진이 얘기 듣고 우리가 보고 싶어서 불렀어요.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
아니 저 기...기집애가!
평소엔 욕쟁이 할머니 저리가라 할 만큼 구수한 욕설을 뱉어 내는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영연이 지금은 완전 남자 상대할 때 나오는....
애교구단의 목소리로 명록의 혼을 쏙 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이 명록의 팔뚝 근처에 찰싹 붙어서 계속 알짱거리는 것이 수진의 눈에 자꾸 거슬렸다.
그렇게 명록까지 참석한 뒤 다시 술판이 진행되었다.
갑자기 게임을 하자는 영연의 말에 게임까지 하면서 마시는데 수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벌써 몇 번째 들이 마시는 술인지.....
으...
몰라....
짙게 풍기는 조작의 향기.
저들이 어떻게 번호를 주고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정하고 속이는 게 아닌 이상 이렇게 명록과 수진만 걸릴 리 없었다.
수진은 갑자기 끌려나와 자신의 친구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명록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 아 아저씨 미안해요. 친구들 장난이... "
" 괜찮아요. 이런 미인들이랑 노는 게 뭐...... "
수진이 술을 택한 덕분에 영락없이 같이 술을 마시게 된 명록에게 조용히 사과했다.
명록이 오기 전부터 들이붓고 있던 수진인지라 벌써 취했는지 혀가 살살 꼬이기 시작했다.
" 어머 수진이 좀 봐. 거리감 느껴지게 아.저.씨.라니! 명.록.오.빠. 라고 해야지. 지 때문에 오빠가 술을 마셨는데 안주도 안 챙겨주고. 아~ 해보세요."
됐다며 거절하는 명록에게 영연이 기어코 명록의 입안에 육회를 넣어줬다.
순간 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헐?
쟤가 미친 거 아냐?
빙글빙글 도는 흐릿한 초점에 포착된 현장.
영연이은 아직도 슬쩍 슬쩍 명록의 팔뚝에 지 가슴을 스치고 있었다.
그런데 거부하지도 않고 뭐가 그리 좋은지 명록의 얼굴이 붉어졌다.
암튼....
남자들이란!
화가 난 수진은 또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새 나희가 옆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 수진아, 너 왕게임 하러 왔지 술 마시러 온 거 아니잖아~? "
설아도 말을 거들었다.
" 그러게, 벌써 너 혼자 한 병 다 마신 거 알아? "
수진은 이것들이 작정하며 먹이면서 이런 소리를 하네 하는 생각에 입술을 삐죽 거렸다.
오기가 치밀어 오르는 중이었다.
" 아직은 먹을 만하거든? 그리고 너네가 먹이는 거지...... 이 나쁜 년들아 "
" 그으래? 그럼 다시~. "
영연이 술잔을 채워서 권한다.
나희는 명록을 보며 생긋 웃으며 말했다.
" 우리 수진이가 좀 이래요. "
명록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도 잔뜩 권한 술에 볼이 붉어져 있었다.
" 이것도 매력이죠. "
나희가 명록과 사이좋게 얘기를 건네고 있는 것을 보니 수진은 또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하....
남자는 다 저런 건가?
딱 잘라서 거부하지 않는 명록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진 수진은 영연이 잽싸게 채워놓은 술잔을 홀짝홀짝 마셨다.
" 기분 나쁘지? "
뜬금없이 설아가 낮게 말을 걸었다.
천하의 배수진이 품격이 있지...
어디 저런 남자 때문에 기분이 나빠?
수진은 체 소리 내며 말했다.
" 응? 아니 내가 왜? "
" 그래? 그럼 내가 저사람 데리고 나가도 돼? "
수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설아를 바라보았다.
" 뭐? 너..... 저런 타입 아니잖아. "
"양복에 넥타이. 꽤 절제된 게 섹시하네."
순간 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자 무표정한 설아의 입술 끝에 웃음이 맺힌다.
" 농담이야 농담. 내 타입 아니잖아? 그보다 너 이마에 주름 잡혔어. "
헉!
정말?
설아의 말이 깜짝 놀라 이마에 손을 가져가자 설아가 능글맞게 히쭉 웃는다.
각자 이야기 하느라 시끄러운 테이블에 영연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명록에게 말을 꺼냈다.
" 명록오빠~ 혹시 키스 잘하세요? 나이도 있으시니까~ 잘하시겠죠? "
윽....!!!
저년이 무슨 말을 하려고.
명록 또한 놀라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영연은 그런 그의 표정을 봤음에도 멈추지 않고 지르고 있었다.
" 수진이가 키스도 제대로 못한 애거든요~ 그러니까 키스 느낌 좀 알려주세요. "
명록의 눈이 완전 동그랗게 커졌다.
다들 기대하는 눈빛으로 명록을 쳐다보고...
주황색 조명을 받은 명록의 얼굴이 술 때문인지 더 붉게 물들었다.
" 키스는... "
설아의 한마디에 명록을 집중하며 바라보던 시선들이 설아의 입술로 옮겨갔다.
그녀는 그런 시선집중을 받는 게 어색하지 않은 듯 육회 한 젓가락을 도톰한 입술사이에 넣었다.
" 육회 먹는 거랑 같아. "
" 응? "
두서없는 그녀의 한마디에 다들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했다.
설아는 눈을 감고 입에 넣은 육회를 음미했다.
" 육회는 혀같아. 부드러워. 달콤해.... "
그녀의 말이 끝나자 수진과 명록이 육회를 한 젓가락 씩 입에 넣었다.
그리고 키스의 감촉을 느끼려는 듯이 설아를 따라 눈을 감고 육회를 음미했다.
그리고 다시 벌어진 설아의 입술.
" 그리고 잘근잘근 씹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혀라고 생각하면서. "
" 우웁 "
그녀의 말을 따라하던 수진이 설아의 마지막 말에 비위가 상했는지 헛구역질을 했다.
명록도 차마 뱉진 못했지만 떨떠름한 얼굴로 애써 씹던 육회를 목으로 넘겼다.
하지만 설아는 남들 시선은 느끼지 않는 듯 마지막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 아~ 맛있다. "
그녀의 한마디에 나희와 영연마저도 설아를 미친년 보는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
얼마나 마셨을까?
수진은 또다시 잔을 비워냈다.
이미 취할 대로 취했는지 기분이 좋아져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 수진 씨가 많이 취한 것 같아요. 이쯤에서... "
명록은 아무래도 취한 수진의 모습이 걱정되는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연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
" 어머, 우리 수진이를 뭘로 보고.... 수진이 말술이에요 말술! 저래 뵈도 혼자 말통에 든 술 다 비워낼걸요? "
명록은 수진이 걱정 되는지 영연이 다시 채워놓은 수진의 잔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영연이 손사래를 치며 수진이 마시던 잔을 명록의 손에서 빼내왔다.
" 오~ 흑기사네! 그럼 소원을 말해야죠. "
명록의 돌발행동에 잠시 조용해졌던 테이블에 나희가 흑기사를 외치며 테이블을 다시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나희가 명록에게 눈짓을 보내며 웃었다.
나희가 눈으로 수진을 가리키는 걸 보았지만 명록은 우물쭈물 말을 못했다.
보다 못한 설아가 나섰다.
" 그냥 소원 같은 거 말할 필요 없이 명록오빠하고 수진이 둘이서 사귀면 되겠네. "
그녀의 말에 영연과 나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 오~ 좋다! 사겨라! 사겨라! "
장단에 맞춰가며 부추기는 영연의 말에
수진은 이미 많이 취했는지 명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남들을 따라서 박수를 치며 사귀라고 말하고 있었다.
" 러브샷~! 러브샷~! "
영연이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의 잔을 채우자 나희와 설아까지 두 사람을 부추겼다.
술에 취한 수진은 헤헤 웃으며 명록을 바라봤다.
반쯤 감긴 눈을 한 수진은 이미잔뜩 취한 듯 보였다.
명록도 이미 세 명의 미인에게 집중 관리를 당해 술독에 퐁당 담겨 있었다.
어느새 명록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진한 남자 스킨 향이 수진의 머릿속을 물들이듯 들어 왔다.
**************
명록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전철역에서 만난 여자가 살갑게 자신을 향해 하트 뽕뽕 미소를 보낼 때부터 지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이 안 되는 참이었다.
그리고 끌려간 주점.
28년....
평생 이렇게 여자들 사이에 끼어서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이 다들 한미모를 하는 여대생이라는 것 또한 미스테리한 시간이었다.
수진이를 보면서 처음 느꼈던 것이 아~ 예쁘다 이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세 명의 또 다른 여자들은 각각 자신 만의 미모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
고전적 미인.
보이쉬한 미인.
귀여우면서도 섹시함을 폴폴 풍기는 미인까지......
무슨 천국에 갑자기 떨어진 기분이었다.
거기에다가 지지배배 그녀들의 수다에 가끔 자신의 몸에 스치는 스킨십까지!!!
무슨 꽃뱀의 소굴에 떨어진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에 주점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살갑게 몸을 밀착해오며 척 자신의 팔짱을 끼고 오빠~ 라고 하는 통에 이미 조금 넋이 나가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영연이라는 여자......
아....
보이 쉬하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애교가 철철 넘칠 수 있는지.......
남자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것이 지금 명록의 정신 줄을 잡아당겼다 풀었다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부추김 속에 한 러브샷~
수진의 붉어진 얼굴이 눈앞에 있으면서 술이 찰랑거렸다.
쭉 들이켜고 보니 수진도 술잔을 비운 뒤 어느새 그의 어깨에 기대서 눈을 감고 있었다.
어깨에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
그리고 머리칼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꽃내음.
명록의 가슴은 두근두근 거리고 있었다.
아.....
술을 너무 마셨나......
심장박동이 오늘따라 힘차게 빨리도 뛰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세 명의 여자들이 깔깔깔 웃고 있었다.
술기운이 확 올라오는지 그녀들의 얼굴이 조금 흐릿해지며 멀어진 기분이었다.
순간 옆에 앉아있던 영연의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나희라고 소개했던 여자도 휴대폰을 급하게 받으며 살짝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아... 아니야~~ 응응..... 그냥 동네 근처에서 애들하고 간단히 마시고 있어. 응...... 에? 지금? 아... 아니~~ 헤헤 나야 좋지..... 응. 응, 자기야..... 응. 나두.... 헤헤.... 어여와~ "
딸깍 휴대폰 폴더를 닫자마자 영연의 얼굴이 확 돌변했다.
" 아이, 이놈의 기집애 어디 갔어! 얘~ 설아야. 나 급하게 가야될 거 같아. 남친이 지금 집으로 온데. 그러니까 수진이하고 여기 뒷수습 부탁한다. 명록 오빠 나중에 봬요~ 그럼 난 이만! "
순식간에 말을 쏟아내고는 그녀는 부리나케 옷가지와 가방을 들고서 가게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설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영연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나희라는 여자가 웬 남자와 자리로 오고 있었다.
한 삼십대로 보이는 그런 남자.
약간 뒤에서 떨어져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희는 설아에게 와서 뭐라고 쏙닥거리곤 다시 몸을 일으켜 명록에게 와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 명록 오빠, 죄송해요. 갑자기 가야 될 거 같아서요.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봬요? "
명록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네..... 나희씨 저도 재미있었어요. 담에 또 봬요."
나희는 우아한 미소를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후후. 그럼 가볼게요. 수진이는 설아한테 말해뒀으니까 같이 좀 부탁드릴게요. 그럼. "
그리고 뒤돌아서 또각또각 힐소리를 내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나희 뒤를 아까부터 멀리 서서 지켜보던 남자가 빠르게 뒤쫓고 있었다.
설아는 손톱을 입술 사이에 넣고 쫍쫍 빨며 고민하는 눈치였다.
갑자기 두 명이 휙 빠져나가니까 혼자 남은 그녀의 마음이 왠지 싱숭생숭한 것처럼 보였다.
" 치..... 지네들만 재미 본다 이거지? "
그러더니 설아 또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 응. 나야. 설아. 지금 여기 건대역인데 올 수 있어? 머? 근처야? 그럼 나 전철역 앞에 있을 테니까 10분 안에 와. 응. 안 오면 나 가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오케이. "
전화를 끊더니 설아가 명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 오빠~~~ 저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볼게요. 수진이 잘 부탁해용~ 호호호~~~ "
명록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설아도 가게를 빠져나갔다.
시간은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북적거리던 술자리가 썰렁해졌다.
어깨에 기대서 자는 듯 눈감고 있는 수진과 술기운으로 머리가 핑 돌고 있는 명록 만을 남긴 채.....
끝 => 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