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제1부 : 2화. 헬륨가스 같은 그녀들의 우정 (1) (5/195)



〈 5화 〉제1부 : # 2화. 헬륨가스 같은 그녀들의 우정 (1)

5.


승필 선배 말대로 수진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

아흐동동다리......
지갑까지 줍고 돌려주면서 사례비를 못 받을망정
가서 밥한 끼로 십여 만원을 팍팍 쏘고 와서 결국 연락 한번  받다니.......




명록은 승필 선배 말대로 자신은 평생 쏠로로 살다가 죽어야 된다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며칠 외부업체 협의가 끝나서 새로운 광고건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점이었다.
거의 12시 넘어서 퇴근하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가운데 C
M광고 섭외랑 방송사 협의 광고주와 미팅 등 회사는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벼락같이 한편의 계약이 끝나고 스케줄 상 텀(term)이 발생하면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어느새 사무실엔 명록 혼자 남아있었다.


이건 모두 승필 선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강호로 돌아와 무림 초식을 하나 전수했는데
자신이 제대로 펼치지 못해 호랑이 꼬리를 그려야 할 초식이 쥐꼬리를 변하는 바람에 완전 삐져있었다.



아.....
승필 선배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쪼잔한 전설의 남자......
승필 선배......

결국 그는 잔업을 명록에게 밀어버리고 퇴근해버렸다.
지은 죄가 있는 명록은 뭐라고 말도 못해보고 낼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별로 많은 양은 아니었다.
다만 금요일 밤 늦게까지도 끝내지 못해서
결국 토요일 아침까지 출근해서 그 나머지를 정리하고 있자니
기분은 완전 꿀꿀한 상태였다.


어찌됐든 꾸역꾸역 진도를 나가서 지금은 거의 일이 끝나가는 참이었다.



순간 책상에 놓여진 명록의 전화기가 미친 듯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살펴보니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직장인이 되서 안 좋은 점은 모르는 번호가 온다고 해서 전화를 안 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스팸이든 낚시든 걸려오면 일단은 무조건 받아야 했다.

특히 명록처럼 영업도 겸직하고 있는 직업에선 더더욱 그랬다.



그는 전화기를 들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네. 제일기획 방~명록입니다. "



그만의 버릇이었다.
처음 방명록이라고 이름을 말했는데 통화하는 사람들이 풋~ 소리를 내며 웃는 것이었다.

아....
그놈의 방명록.....
싸이는 왜 만들어져 가지고......
방명록은 결혼식장에나 가야 만났는데......
온천지 사람들이 듣기만 하면 빵빵 터지네.......
아~~ 씁.......



그래서 고친 것이  크고 길게 한번 끌고 그담에  빠르게 끊어 붙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효과가 아주 좋은  아니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받자마자 웃음이 터지는 일은 조금 덜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버릇이었다.



저기....... "

엥?
여자목소리?
근데....
목소리가 앳된 느낌이네.......?




명록은 순간 거래처 여직원들의 몽타주를 잽싸게 돌려보았다.
아무리 검색 해봐도 이렇게 목소리가 앳된 직원은 짚이는 사람이 없었다.


저기..... 저 기억하세요? 저.... 수진이라고....... "



오~~~~~~잉!!!!!
기억 못할 리가 있나!
 일생일대의 대 실수.......
배.수.진.양 아니신가!



" 아~~ 당연 기억하지요. 미모가 출중하신 수진 씨잖아요? 하하~~ 연락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연락 주시는군요? "



" 아....네......."

" 근데...... 무슨 일로..... 혹시 밥 한 끼 사게요? 하하....... "


순간 명록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아~~~
빚쟁이처럼 내가 뭐하는 거지~~~
아~~ 이 빌어먹을 모태쏠로~~!!!!
죽어~! 죽어!


" 하하..... 그렇져..... 그럼... 저기 오늘 혹시 시간 되세요? "

그는 그녀의 말에 살짝 당황하고 있었다.
전화 걸자마자 바로 만나자고 하려는 그런 기색이었다!




" 네.... 됩니다. 내일까지 완전 프리하게 비어있어요. "




" 풋...... 저기..... 그럼 오늘 혹시 영화 같이 보실래요? 같이 갈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꼭 봐야 되는 영화인데....... '



명록은 바로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 넵! 같이 보죠.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수진은 잠시 망설이는  하더니 말을 이었다.



" @@역의 *** 극장으로 오시면 되요. 시간은 4시 정각이고요. 괜찮으시겠어요? "

" 네. 충분하네요. 그럼 거기로 갈게요. 어디서 볼까요? "


" 3번 출구 나오시면 1층에 카페가 있어요. 3시 40분까지는 오셔야 되요. "

" 알~겠습니다. 그럼 거기서 뵙죠. "



네..... 그럼 이따 봬요. "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앗싸~~~
하하하하~~~


다행히도 그의 명함은 휴지통으로 버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충 회사 일을 마무리하고 나가도 시간은 넉넉했다.

명록은 휘파람을 부르며 열심히 이르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 정리를 끝내고 마지막 확인만 하면 되었다.







**************





나희야 너 토요일 날 시간 있어? "

" 응? 이번 주? 왜? "


나희가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수진을 쳐다봤다.



" 보고 싶은 영화 시사회 초대장이 생겨서. "



" 욜? 무슨 영화야? 피 튀기고 그런 영화? "



수진의 옆에 앉은 영연이 눈을 빛내며 수진을 쳐다봤다.

" 아니 로맨틱 코메디야 우리나라 꺼. "



" 아 뭐야... 로코? 그런  재밌어? "



" 그래서 너한텐 묻지도 않았다! "




" 아! 그날 나 약속 있어. "

휴대폰을 쳐다보던 나희가 스케줄을 확인했는지 수진에게 대답했다.


윽......
나희마저 안 된다면...


" 수진아, 불타는 토요일, 나희가 남자를 안 만날 리 없잖냐. "



설아가 우물우물 샐러드를 먹으며 말했다.
수진은 냉큼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설아야 너는? "



수진은 어깨를 두드리는 영연을 무시하곤 설아에게 물어보았다.
맞은편에서 조용히 두부를 입에 넣던 설아가 수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 나 그날 템플스테이 가기로 했어."




" 씨발...... 템플스테이? 야,  불교 아니잖아. 언제부터 부처 믿었냐? 전엔 신부가 멋있다면서 성당 쳐나갈땐 언제고. 아오! 네년 존나 무섭다. "


영연이 닭가슴살이 꼽힌 날카로운 포크 끝으로 설아를 가리키며 오한이 든 듯 떨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 그 신부 결국 얘 때문에 옷 벗었다고 하지 않았나? 너 설마 그래놓고 절에 가는거야? "




" 신부랑 하면 다를  알았는데 옷 벗으면 똑같은 남자더라고. "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 던지는 설아의 말에 수진은 머리가 멍해졌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항상 시끌벅적하던 영연마저 입을 다물었다.

으......
무서운 년......
순진한 하나님의 종을 실직 시킨 거야.........?
하아......
그럼 결국 영연과 봐야 하나?


어쩔 수 없이 수진은 영연을 바라보았다.




영연아... "


" 싫어. 아니 안 돼.  남친 만나기로 했어. "

수진은 애타게 영연을 쳐다봤지만 영연마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쁜 년들......
남친이 있다고 유세니?



순간 수진은 빡도는 느낌을 받았다.

" 야! 친구가 영화 좀 보겠다는데... 다들 그렇게 바빠? 친구보단 남자라 그거지? "




나희가 말했다.




" 억울하면 너도 남자 만나면 되지. 그렇게 백마  왕자님만 기다리다간 늙어 죽어. "




" 너네들이 이상한거야! 난 첫눈에 반하는 사람 나타날 때까진 남자  만날 거라고! "



" 할리킹인지 뭔지가 애 하나는 확실히 버렸다니깐? "



나희의 말에 영연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수진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백마 탄 왕자라니.
이상한 로맨스 소설에 빠져 현실의 남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수진이 오히려 이들 눈에는 퍽 이상하게 보였다.


"나도 필요 없어! 너네 말곤 볼 사람 없는 줄 아니?"


수진은 씩씩거리며 샐러드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전개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
다른 이들은 그런 수진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찌푸린 얼굴로 떠먹던 수진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오랜만에 기특한 생각을 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헤헤.......
엄마에게 영화도 보여주고 착한 효녀라니깐?

" 엄마 오늘 영화 안 볼래? "

엄마 아파트 반상회에서 제부도 놀러가기로 했는데? "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먹는 중이던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수진을 절망에 빠트렸다.
그녀는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정말 아줌마들이 그렇게 놀러다녀도 돼? "




" 넌  아침부터 승질이야 승질은.."

엄마가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희망이자 보루였던 엄마마저 약속이 있다며 거절하자
수진은 기분이 상해서 밥도  먹지 않고 식탁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 아씨, 진짜 풀리는 일이 없네. "


수진은 침대에 드러누워 휴대폰을 켰다.

그래, 아무나 불러서 같이 보지 뭐.



수진은 빠르게 휴대폰 연락처를 훑어 내렸다.


강원제, 강한규 ..., 한필상.

ㄱ부터 ㅎ까지 훑었지만 모두 영화를 보자고 말하기엔 불편한 사이였다.

자신에게 고백해서 이미 거절당했거나, 자신을 좋아하는 게 훤히 보이는 남자들.......
괜히 영화를 보자고 불러내면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단단히 착각할 터였다.


아...
어쩌지, 그냥 소개팅 한다고 할 걸.



수진은 후회했다.




정작 필요할 땐 없다니.......
필요할 때......
필요할 때?!!!!!!!

순간 수진은 급하게 지갑을 찾았다.




' 필요할 땐 언제나 '

지갑에 넣어둔 명함이 생각났다.



그래, 그 사람을 불러내면 되겠다.
지금 절실히 '필요' 하잖아!



수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고 구겨진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울렸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짜증이 다시 도지려는듯 꿈틀댔다.


아, 필요할 땐 언제나 라더니.....
사기꾼이잖아!
이사람 마저 안 받으면 정말 혼자 가야 하나?


수진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홀로 다시 생각에 빠졌다.
순간 들리는 목소리.

" 네. 제일기획 방~명록입니다. "



" 저기....... "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 목소리에 수진은 화들짝 놀랬다.

아, 뭐라고 말해야 하지?

저기..... 저 기억하세요? 저.... 수진이라고....... "



설마....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말을 하자마자 엄습해오는 불안감.
하지만.

아~~ 당연 기억하지요. 미모가 출중하신 수진 씨잖아요? 하하~~ 연락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연락 주시는군요? "



하.....
다행이었다.
미모출중이라.....
하긴 내가 한미모 하긴 하지.
후훗....


수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얌전히 말을 이었다.

아....네......."




" 근데...... 무슨 일로..... 혹시 밥  끼 사게요? 하하....... "



바보스런 웃음이 들려왔다.
수진은 썩은 미소가 번지려는 입꼬리를 애써 잡고는 맞장구치며 말했다.


" 하하..... 그러죠.....머. 그럼... 저기 오늘 혹시 시간 되세요? "

밥  끼 사기로 한 약속이 수진을 수렁에서 건져냈다.
사실 영화를 같이 보자고, 자존심 상하게 먼저 말할 자신은 없던 수진이었다.
수진은 능청스럽게 약속 이야기를 꺼내는 명록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니 뭐.



" 네.... 됩니다. 내일까지 완전 프리하게 비어있어요. "

주말에 프리한 것은 그리 자랑스러운 일도 아닌데 유쾌하게 말하는 명록의 말에 수진도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동병상련의 심정이랄까?



" 풋...... 저기..... 그럼 오늘 혹시 영화 같이 보실래요? 같이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봐야 되는 영화인데....... "

" 넵! 같이 보죠.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시원스런 대답.
고민도 없이 한 번에 나오는 대답.

순순히 나온다 하는 명록 덕분에
한시름을 놓은 수진은 다시 편하게 침대에 누워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만나야 하지?
집으로 데리러 오라고 할까?
하지만 고작 두 번째 보는 사람인데, 집까지 알려주는   별론가?
그럼...




수진은 극장 주변 건물을 떠올렸다.


" @@역의 *** 극장으로 오시면 되요. 시간은 4시 정각이고요. 괜찮으시겠어요? "

" 네. 충분하네요. 그럼 거기로 갈게요. 어디서 볼까요? "




" 3번 출구 나오시면 1층에 카페가 있어요. 3시 40분까지는 오셔야 되요. "

" 알~겠습니다. 그럼 거기서 뵙죠. "

" 네..... 그럼 이따 봬요. "

하아......


전화를 끊고 나니 손에 땀이 나있었다.
모르는 남자와 이렇게 길게 통화는 처음 해봤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참.




수진은 빠르게 전화를 끊고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각은 10시.
여유롭게 3시에 집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5시간이나 남았지만 수진은 뭐가 그리 바쁜지 서둘러 움직였다.
























<<헬륨가스 같은 그녀들의 우정(1)>> 끝 => <<제2화. 헬륨가스 같은 그녀들의 우정(2)>> 로 고고씽!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