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화 〉126. 바람이 분다.
신대륙이란 말이 무색하게, 파라메라 대륙의 실상이 서서히 알그리타 대륙에 널리 퍼져가고 있을 때쯤, 그곳의 개발 및 적응 또한 놀라운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겸사겸사 전해 들은 에드릭은.
“종합 선물 세트가 따로 없군.”
자기 적성에 맞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의 최대 장점이라 함은 선을 넘지 않는 것.
이는 과대한 성과며 업적을 이루기엔 부적절하나, 그만큼 패착을 두고 실책을 범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는 의미로도 직행한다.
애초에 몸 사리고 보신을 위한답시고 눈치 살살 살핀다 해서 안전이며 안위가 보장되는 게 아닌데, 대부분은 나대지 않기만 하면 그럭저럭 무난하게 현상 유지가 될 거란, 대단한 착각들을 하곤 한다.
애초에 현상 유지며, 평범하고 준수하게 사태가 흘러가는 건, 주변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인지, 나 자신이 무리수를 던지거나, 엄한 짓을 안 해서 안정적인 게 아닌 거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릭은, 몸을 사리는 거 이상으로 대비에 대해서도 철저한 편.
애초에 신대륙에서 활동할 때조차 주변에서 너무 급진적인 거 아니냐, 라는 소리를 들은 것조차, 그로서는 평범한 대응이란 입장만큼은 여전했다.
“나서야 할 때 안 나서면 되려 일이 커지는 법이지.”
애써 세워진 댐에 금이 쩍쩍 가고 있는데, 그걸 나 몰라라 방치하다 무너지면, 그때 가서 뭘 어떻게 수습하려고?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는 건, 과욕이니 과신, 만용을 부리지 말라는 의미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방치하고 외면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에드릭, 아니 릭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들은, 어느 의미로 알그리타 대륙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상인이자 패셔니스트로서의 행동이 아닌, 파라메라 대륙에서 활동하던 마냥 개척과 수습, 정치질 쪽이 차라리 알맞다고 볼 수 있었다.
와중에 피가 흐르는 것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고.
“이거 참.”
도태되고 퇴락하고 부패하면 무너지고 썩어 무색해지는 거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그 허물들을 이쪽이 허물고, 치워야 하는 입장이라는 건 영… 유쾌해질 수 없는 부분이다.
혁명의 분노로 가슴을 불사르며 투쟁을 외치며 죽창을 찔러대는 걸 즐기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쪽으론 흥이 안 번진단 말이지.
“따지고 보면….”
이것도 결국 수소에 의한 행패가 아니겠나.
그러나 주도권을 가진 이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건 역사가 누누이 증명해온 바.
개돼지였던 게 잘못인가, 가축화된 개돼지의 본분 그 자체가 잘못인가.
애초에 각성하라, 자각하라, 하며 강요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은 아니지.
자칭 깨어있는 자들이 목소리를 드높이며 계몽주의를 피력해댔던 게, 어떤 식으로 엿을 거하게 먹으며 내리막을 걸었는지 역사적으로 되짚어 보면 뻔한 이야기고.
물론 그러한 시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노파심만 깊어지네.”
필시 젊은 층에 속하는데, 왜 생각하는 건 이리도 보수적인 건지.
“아닌가?”
말은 그렇다지만 실상은 아니지 않나.
“하이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옳지 않은 일, 선하지 않은 일에 대해선 거부감을 보이곤 한다.
악한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예처럼.
이 경우, 이 간극에 놀아나느냐, 제어하고 조절할 수 있느냐에 따라 신분의 고하가 나뉘게 될 테지만….
양심과 선을 유지하려는 그러한 심성을 일부에선 약점이니 가진 자들이 형성해둔 굴레랍시고 증오의 가시를 세우는 이들이 있는데, 이게 또 아예 틀린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지.
“그나저나 신분 하나 건드려도 파탄 날 판에 종교한테도 시비를 거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행동은 하고 있지만 속내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어련히 알아서들 생각하겠냐만.”
단순히 패왕녀 혼자만의 계획이었다면, 시대적 배경과 다양한 역사적 관점, 결과에 대한 식견과 통찰 부족으로 오류가 생겨날 수도 있을 테지만, 여기에 개입돼 이번 작전을 구상해 실행시키는 이가 패왕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상, 그걸 함부로 맞고 틀리고를 판단하기가….
“변수는 종족인데.”
우리 세계는 인간만 있기에 결국 그 속에서도 민족, 인종이니 신분 등으로 차별을 확고하게 다졌지만, 여긴 아예 종족 그 자체가 차별적 요소인지라, 훨씬 더 복잡한 구성이었다.
뭐 인종 차별이나 종족 차별이나 뭔 차이가 있냐 하겠지만, 애초에 살아가는 방식이 인간 대 인간이면 엇비슷하게 흘러갈 수라도 있는데, 종족의 차이는 삶의 극단적 차이로까지 이어진다.
애초에 인간을 먹이로 인식하는 종족의 경우, 인간과 타협하라는 거 자체가 어이가 없을 수도 있는 거고.
자연을 허무는 종족들에게 결사 항전을 보이려는 종족이 있는가 하면, 자기들 신을 안 믿는다고 특정 종족에게 이빨을 들이민다던가, 특정 영역에 집착하며 그 영역 일대에선 특이성을 발휘하는 종족들이라던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말이 안 통하는 정도는 여기선 예삿일이란 거다.
민족이 나누어지고, 인종이며 신분이 나누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말이 안 통하는 걸 들 수 있다.
같은 언어를 써도, 삶의 영역과 생활 방식 및 생활권이 달라 말귀가 안 통하는 판에, 아예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면, 결국 힘 있는 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관계를 정립하려 하는 건, 어느 의미로 당연한 거고.
“어, 그러고 보니….”
번역기가 있다지만 여러 언어를 현지인 이상으로 구사하는 에드릭이었다.
이거 하나만 봐도, 이곳 세계에선 꽤 유능한 축에 속하지 않으려나?
“…….”
뭘 그리 당연한 소리를.
어쨌든 에드릭은 여러 귀족들과 몇몇 나라의 중심에 자리한 대신, 핵심 인사 등을 만나며 연합 구축에 한몫 거드는데 열중했다.
그러면서 에드릭도 서서히, 일이 어찌 흘러갈지에 대한 윤곽을, 차츰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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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에 케사린 령에서도 여러모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몰려드는데.”
인간뿐 아니라 온갖 종족들이 몰려들고 있다.
덕분에 임시 거주 구역을 할당하고, 일부 지역을 확장함과 동시에 경작지를 새로이 마련하는 등의 문제가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행정 문제만으로 하루를 지새우는 건 일도 아니게 돼버렸다.
“에드 말대로 미리 사람들을 구해놔서 다행이야.”
알리샤는 케사린 성 내에 마련된 자신의 연구실 겸 제조실로 쓰는 방에서 차분히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사람이 늘고, 은퇴한다, 새로운 기회를 물색한다 어쩐다 해서 몰려든 인원들과, 심지어 신대륙에서 온 이들까지 합세하니 일할 인원들은 차고 넘쳐나기에 이르렀다.
“…….”
그리고 놀러 온 건지 농땡이를 피우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우리에 또한 넋 놓고 다과를 천천히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전쟁이다 뭐다 해서 주변이 어수선하기도 하고.”
“중립 지대에 여긴 에드릭의 사유지다. 여길 건드린다는 건 사실상 카일론의 부군을 적대한다는 거고, 이는 실질적으로 카일론과 대적하겠다는 걸 의미해.”
“그러면 애초에 대적하고 있는 이들이 위협이 되려나.”
“그걸 역이용해서 들쑤실 수도 있지.”
“…결국 안전하지 않다는 거잖아.”
에우리에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말했다.
“괜찮아. 에드릭 말대로, 인프라가 형성되고, 돈이 모여 있으면 알아서 자체적인 질서와 이를 보호하는 집단이 형성된다고 했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일부러 용병들을 포함해 길드가 활성화되도록 방치한 게 아니다.
보다 체계적으로, 그들이 이곳에 와서 아예 은퇴까지 해도 무방할 만한 일감을 형성해버리면 알아서들 몰려들기 마련.
용병이며 길드 차원에서 모험가, 탐험가들에게 있어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 될 거다.
한동안 머물러도, 들러붙어도, 잠시 거쳐 가는 경유 지역 차원에서라도.
그걸 위해 케사린에서만 판매하는 몇몇 고유 특산품들을 여럿 확보해 두기도 했었고.
애초에 올 만한 메리트를 만들어줘야 오는 거지.
무엇보다 여긴 나름 상업 특구 도시로서의 입지를 다질 생각도 있었던 지라, 아르세이유를 본받아 이것저것 설계 시점서부터 손을 써둔 에드릭이었다.
한자 동맹은 타 도시에 입성하더라도 자체적 규율과 법으로 도시 및 영지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알그리타 대륙 내에서도 그런 취급을 받는 상인 연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특정 지역에 한정됐을 뿐, 대륙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이 바로 그러한 시발점이자 시작점, 본거지가 된다면, 이를 바탕으로 그러한 동맹 및 연합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선 중개를 비롯해 대규모 물류 시설과 운송로, 운용 시설 등이 배치돼 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준비도 차곡차곡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그 정도 물류량을 지상으로 운용하기란 영 까다로운 바.
거기서 에드릭이 승부수까진 아니더라도 일부 과감한 투자를 감행해 형성하려 하는 게 있었으니….
“공중에 물류 시설을 짓겠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
부유 창고라는 개념.
거기다 이건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꾸준히 이동한다.
아니 뭐 이런 어이없는 아이디어를 내놓는가 싶었는데, 이를 위해 열기구를 보급한다는, 또 다른 괴상한 아이디어를 내놓기에 이른다.
흔히 공중을 나는 짐승, 마물 등을 길러 이들을 탑승해 상공을 누비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나를 수 있는 짐은 한정적이며, 이조차도 평범한 이들을 누릴 수 없는 특권에 해당하는 바.
전서구를 비롯해 새에게 편지를 전하는 건 크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거기다 어느 정도 마법을 통한 장거리 통신이 대중화되는 추세기도 해서, 간단한 연락을 취하는 거 정도는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열기구를 바탕으로 지형이니 장애물에 방해 없이 상품을 전달한다는 아이디어는….
“이 경우 품목이 큰 것들에 해당한다고 들었거든?”
“작은 물품은 마법을 통해 전이시키면 돼. 사람도 이미 그러고 있어. 어려운 건 하나도 없어.”
열기구와 텔레포트 마법을 통한 특정 지역 핀포인트 전이, 이동 서비스는 슬슬 입소문을 타다 못해 돈만 있으면 누구나 이용하는, 아주 적절한 서비스로 슬슬 인식되기 시작하게 된 터였다.
에드릭의 말처럼, 이쪽에 투자하며 한발 걸치길 잘했다고 볼 수밖에.
“대비는 해둬야 할 거야.”
“그건 우리가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이미 훌륭하게 영주 대행 느낌으로, 시장 대리 느낌으로 잘 처리하는 분이 계시니깐.
“경력도 있다 했잖아.”
“…….”
알리샤의 말에 에우리에는 느릿느릿 고개를 흔들었다.
위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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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은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어차피 그걸 다 예상하고서 케사린 령에 빚까지 지고, 투자까지 왕창 받은 거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은퇴지는 케사린 령이 되려나.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쪽 진형도 슬슬 윤곽이 갖춰지기도 했고….”
나머진 서로의 눈치 싸움과, 유리한 전장을 배정해, 얼마나 충실히 준비한 상태로, 맞부딪히느냐, 하는 거겠지.
“하아.”
아무리 봐도 수지타산에 안 맞는데.
대륙 기준에선 다시 없을 호황이라며 인구수가 늘어나는 거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을 한다지만, 그래 봤자 우리 세계에 비하면 여전히 귀여운 수준에 불과하다.
“…시대의 흐름은 어쩔 도리가 없는 건가.”
생각해보니 이 시대엔 아직 올림픽조차도 없네.
뭐, 올림픽이 있다 해서 1, 2차 세계 대전이 안 난 것도 아니고.
어쨌든 에드릭은 하나의 부품으로서, 팀장이 형성해둔 계획에 일환으로서, 차근차근 목표를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평화며 일상을 구가한다는 건, 참으로 어렵군.”
결과적으로 인간 우선주의였다면 전쟁 필요없이 약소 종족, 국가만 핍박하고 학살, 몰살 시켜버리면 된다.
그러면, 되려 전쟁 규모로까지 번지지 않을지도 모를 일.
그런데, 그게 되려 더 끔찍하고 잔혹한 경우가 아닐까.
적어도 이번 전쟁은 저들에게 나름 대의가 있다.
뭐 적폐 측이며 기득권도 나름의 명분과 의지가 있다지만…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에드릭 기준에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로 밖에 안 보이는 게 문제라면 문제.
그조차도 유능하면, 안정을 이루는데 필요는 하지.
통치라는 건 민중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해본 놈이 기본은 하니까.
…해본 놈이 못 해 먹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지만, 그조차도 그놈을 허수아비로라도 앉혀두는 게 낫다고 하는 이유는, 높은 자리를 아무나 다 할 수 있게 되면, 개나 소나 그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는 거고, 이로 인한 혼란은… 상당히 큰 사회적 파장과 혼란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었다.
…일일이 고려하는 것도 골치 아프지만.
그러니 최소 투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개념과 기본 상식, 시민 의식 정도를 형성해야 하는 게 마땅하지만… 이게 영 쉬운 일이 아니지.
애초에 투표가 만능은 또 아니고.
투표로 당선된 누가 나라를 말아먹는 경우가 오죽 많을까.
그조차도 조작의 예도 그렇고.
나폴레옹은 투표 때마다 99% 지지율로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다.
종신 통령 때도, 황제 등극 국민 투표 때도.
근데… 인간적으로 99%는 좀 아니지 않나.
당장 저기 위에 있는 러시아만 봐도 뭐… 대놓고 저지르는 판에.
“…….”
플라톤이 말한 대로 아주 잘나고 현명한, 이를테면 세종대왕님 같은 왕이 계속 통치를 한다면, 왕이 통치해주는 게 땡큐긴 하지.
그리고 왕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맹자 말대로 갈아 치워 버리는 것도 대안이자 답이 될 순 있지만….
그런 식으로 갈아치운다 해서, 갈아치우는 놈들이 과연 정치며 통치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왕을 등극 시킬 테며, 그런 왕이 왕권을 휘두르게 과연 내버려둘지는….
조선으로 치면 철종의 예만 봐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