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화 〉125. 쇠는 달아 있을 동안 치는 거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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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애초에 종이에다 적으면 그만이지, 그럴싸하게 양피지에다 적은 건 또 뭔가.
보안이니 비밀 엄수를 목적으로?
친히 전달한다는 압박으로라도 쓰고자 함인가?
왕의 직인을 보며 압박받던 시절은 옛적에 지났거늘.
“일은 어찌 진행되고 있니?”
패왕녀가 부관을 향해 묻자.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구체적으로.”
보고를 차분히 전해 들은 패왕녀는.
“…그래, 얼마 남지 않았군.”
양피지 서찰을 구긴 채, 투구째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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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 기간이다 보니, 이 시점에 그는 에드릭이 아닌, 다시금 안태민으로 돌아와 간만에 집으로 복귀해 있었다.
“그러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
지나가듯 결혼해도 딱히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싶지 않다는 내용을 입에 담자, 대뜸 젓가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듯한 어조로 어머니께서 따져 들었다.
“뭐 부끄러운 일이라도 있대? 돈이 문제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애초에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런 거 체면 중요하게 여겼다 치면, 이렇게 지방에 와서 이러고 있을 필요도 없잖습니까?”
“얘가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전 그냥 귀찮은 게 싫어서 그렇죠.”
솔직히 옛날엔 개나 소나 결혼식은 성대하게 예식장 가서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나이 먹고 생각해보니 이거야말로 쓸데없이 예식장을 비롯해 그쪽 배만 불려주는 뻘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축의금 거두고 이걸로 비용 충당하려는 목적이라면야 모르겠지만.
애초에 결혼이 경사라는 건 인정하는데, 결혼식 규모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주변 눈치며 체면치레, 그쪽 사회에 그럭저럭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안이라던가 입장, 위치가 그렇다면 그조차도 이용하는 게 맞긴 하겠지만….
‘요즘 시대에 그게 의미가 있어?’
우리가 서울에서 그럭저럭 주변 시선에 휘둘리며 살아야 했다면야 소소하게라도 하겠지만, 그게 아닌데 왜 굳이?
거기다 아버지는 의외로 수긍한 건지 태민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내비쳤다.
“지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뭘 그거 가지고 성질이야?”
“성질이 아니라 남 부끄러운 일도 없는데 멀쩡한 놈이 뭐가 아쉬워서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거르겠다고 그러는 게 이해가 안 가잖아?”
“다 큰 놈이 생각이 있겠지.”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고?”
“귀찮은 건 또 뭐야. 일하는 것보다야…… 아닌가?”
거기서 왜 고민을 하십니까?
“아니 그러면 농사는 언제 해?”
“…이 사람이 땅만 하루 종일 헤집더니 사람이 아주 이상해졌어!”
그러면서 혀를 쯧쯧 차지만, 금세 다른 주제로 넘어가 다시금 대화에 열중하는 두 분이셨다.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는데, 반가워는 해도 아쉬워하는 기색은 일절 없는 걸 보면, 두 분이서 그럭저럭 잘 살고 계신다 싶어 마음이 조금 놓인 태민이었다.
“그리고 승진하면 이번엔 한동안 출장이 아니라 좀 더 오래 나가 있을 수도 있어요.”
“…지금도 혹하면 한두 달, 못하면 수개월은 기본인데 이젠 아예 년 단위로 출장? 아예 이민을 가지 그러니?”
“…한창 때 꾸준히 모으고 이곳저곳 나가봐야 사람이 눈도 넓어지고 그러는 거지. 인사이트를 넓히기도 좋을 테고 말이야.”
“인사이트를 넓혀? 또 뭔 되먹지 못한 소리를 들어 가지고 영단어 질이래?”
“뉴스나 tv보면 다 나오는 용어잖아?”
“아, 그러고 보니 너 어느 나라 가는데? 그쪽 나라 언어는 할 줄 알고?”
태민은 판타지 세계 용어 몇 가지를 능숙하게, 몇 분간 읊조렸다.
“…얘가 그런 건 또 언제 배웠대?”
“그건 어느 나라 말이냐?”
“불어긴 한데 사투리가 좀 껴서 이해하기 애매할 거예요. 스패니시도 껴있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야?”
“일만 하면 금세 묻혀요. 요즘 자기 개발은 필수잖아요? 혹시 몰라 이직 기회 나면 스펙 꾸준히 업글해야 하는 거니까요. 자격증 따고 이런 건 솔직히 옛말이죠. 시대가 워낙 빠르게 바뀌고 있어서 자격증으로 증명 못 할 기술이며 노하우들이 마구 쏟아지는 추세잖아요.”
“집에 오면 종일 퍼져 있어서 농땡이 피우나 했더니.”
“…여기서마저 공부하면 전 어디서 쉽니까?”
“그렇긴 하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지금도 이미 한참을 지난 뒤에야 왔지만, 이후엔 더 늦게 복귀할 수 있음을 언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가면 참한 여자도 있나 둘러보고.”
“…귀찮아요.”
“거 자기가 좋으면 말 안 해도 알아서 하겠지.”
“아, 요즘 우리나라 출산율이 저기 일본보다도 안 좋다잖아요!”
“그거 원래 세계적 추세야. 개발도상국 지나 선진국 간 나라들에선 다 겪는 일인데 뭐.”
“하이고! 똑똑해서 그런 건 잘 아시면서, 그러면 대책을 내놔야죠 대책을!”
“대책이 뭘 필요해? 지가 좋으면 사귀고 결혼하고 아님 마는 거지. 저러다가 연봉 오르고 직분도 오르면 젊은 애들이 또 안 꼬일까.”
“아니, 그러면 지금 얘한테 띠 동갑하고 사귀라 그런 거예요?”
“능력만 되면 안 될 게 또 뭔데?”
“그럼 뭐, 당신은 능력 안 돼서 띠 동갑하고 못 사귀어서 자식에게라도 그러라 지금 훈수 두는 거?”
“훈수는 무슨.”
“아, 조언?”
“…….”
그나저나 아버지, 생각보다 그런 쪽으로 많이 트이셨군요?
“아무튼 손주나 손녀 빨리 데려와! 가서 속도위반으로 그래도 되니까. 애 돌보기 힘들면 맡겨도 좋으니까.”
“누구들이 참 좋아할 만한 소리네요.”
애 키우는 것도 중노동인데 그걸 굳이 해주시겠다니, 많이 적적하신가 보다.
애완동물도, 가축들도 여럿 있는데 그거 가지곤 부족하신 건가? 흐음….
“생각은 해볼게요.”
정작 생각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었지만, 99%는 100%가 아니니, 확답을 드려 괜한 기대를 불러 오는 건 자제해야겠지.
…세상일이라는 건, 늘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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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략 3주 정도 푹 쉬고 돌아오니, 대륙의 판도도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그쯤 돼서, 에드릭도 바닷속에 자리한 기묘한 도시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지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건 이것대로….”
한적하다.
자그마한 건물도 하나 없기에 말 그대로 자연 경관이 늘어진 공간 그 자체.
다른 의미로 고독과 암담함을 동시에 안겨줄 법한, 일개 인간으로선 도저히 생존을 도모하기 어려운, 그런 해안 환경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속된 말로 인위적 구조물 같은 게 일절 보이지 않았다는 점.
자, 그러면 이제 카일론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누군가가 한다 치면, 에드릭은 단언컨대 고개를 내저을 터였다.
애초에 그쪽을 가고 말고는,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면 문제가 하나 생기는데….
“오, 약속대로 오셨군요!”
“음, 그대는?”
딱히 약조를 정해둔 적이 없음에도, 시기와 위치 문제로 곤란함을 겪지 않게 된 건 불행 중 다행이지만….
큼지막한 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에드릭 앞에 선 사내는 퍽 젊어 보였지만, 턱수염과 콧수염이 과하게 넘치지 않고 특정 부위별로 다듬어져 있는 걸 보면 외모만 그럴싸한 미성년은 아닌 듯 느껴졌다.
“저는 티치엘 남작이라 하옵니다. 본관은 브란들린 왕국의 서북 지역에 자리해 있지요!”
“그렇군요.”
브란들린.
여러모로 초창기서부터 자주 들어온 나라였다.
“하여, 저는 어찌 부르면 좋겠사옵니까, 공작 각하?”
“공작이라. 아직 그럴 위치가 아닌 걸로 압니다만.”
“어찌 그런!”
과장되게 놀란 척 몸을 물린 사내가, 구태여 주변을 둘러보더니.
“옛 제국의 정당한 후계의 혈통 중 한 분이시온데, 어찌 제가….”
“굳이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하는데, 티를 낼 필요는 없지요.”
“아, 그러시다면야….”
귀찮네.
그나마 말투가 고풍스럽지 않은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겠지만.
“그럼 모시겠습니다.”
“목적지는 어딥니까?”
열댓 걸음 떨어진 부근에 내려앉은 새 쪽을 가리킨 사내의 옆을 동행하며 묻자.
“그야 물론….”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친족분들께서 계신 장소가 아니겠는지요?”
친족이라.
…경우에도 없이 형제 자매가 생기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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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겉 외양을 인위적인 게 아니라 자유자재로, 특성에 맞게 꾸밀 수 있다는 건 상당한 메리트로군.”
마법을 비롯해 온갖 탐색, 탐지 기술로도 에드릭의 변화된 외형엔 어떠한 위화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
현재의 에드릭은 금발과 은발이 뒤섞인 단발에 푸른 눈의 백색 피부를 지닌, 미남의 모습을 한 청년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몸도 조각처럼 매끄럽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훈련이 그럭저럭 돼 있다고 느낄 법한, 관리를 꾸준히 해온 듯한 형태이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그를 보는 일면들 하나하나가 다른 의미로 감탄을 내비쳐댔는데….
“…그보다 이거 사기 아닌가요?”
남매끼리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는 의견을 밝힌 터라, 주변에 있던 이들 대부분은 물러간 지 오래.
여기엔 에드릭과 그녀, 단 둘뿐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그녀도 외모가 이색적인 건 마찬가지.
주홍빛 머리카락에 붉은 눈.
몸매도 종합적으로 황금비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절로 감탄사가 나올 법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다.
“사기라니.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을.”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깨와 가슴 윗 부근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 차림이라 절로 그 부근에 시선이 집중된다.
눈 보신이 된달까.
“그래서 제가 해야 할 일이며, 숙지해야 할 것들은 뭔가요?”
“바로 일 이야기인가. 안부도 묻고 반가움도 표시하고, 그래도 늦진 않을 텐데?”
“…귀찮은 건 빠르게 끝내두자는 기질이라.”
“그도 그렇군.”
그녀도 납득한 듯 곧장 본론을 털어놨다.
“우선 어지간하면 정령술은 사용하지 말도록. 그건 티가 확 나니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차피 기본 신체 능력 자체만으로도 충분하잖아?”
“…한계도 있지요.”
무쌍 놀이를 못 한다는 게, 의외로 큰 문제기도 하고.
그렇다고 전쟁이니 전투에 참가해 깽판을 놓겠다는 건 아니지만.
“알겠지만 가급적 끌어들일 이들과 거를 것들을 구분하고, 확실하게 선을 나누어 걸러내는 게 우리들의 현 목적이야. 그걸 위한 시간도 썩 많지 않고.”
“…….”
“한 달, 늦어도 두 달 내외로 연합을 이뤄 카일론과 다종족 연합들과의 대회전을 치르게 될 거야. 거기서 결판이 안 나면… 이곳저곳으로 전화가 확장되고 확대되겠지. 그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저야 평화로운 게 최고다 주의니까요.”
“지려면 확실하게 지던가, 이기려면 확실하게 이기던가. 어중간한 건 없어. 우린 여기서 희망을 보면, 이쪽을 살리고, 아니면 확실하게 무너뜨려 나락으로 떨구는 게 목표야.”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녀야겠네요.”
“땀 날 필요 없이 날아다녀야지. 시간이 꽤나 촉박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에드릭은.
“아, 그런데 여기선 뭐라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듣고 온 거 아냐?”
“따로 안 물어봐서요. 물어보면 모르는 거 티 나지 않습니까.”
“스마트폰 좀 살펴보지 그랬어?”
“막상 지상에 나오고 나서 떠올라서요.”
물속에서 볼 수도 없고, 심해 도시에 있을 당시엔 일단 여길 빠져나가자는 생각에 기본적 메뉴얼과 지침만 살폈던 점도 있고.
…좀 안이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그래도 대륙 정세는 숙지해뒀으니 그 점은 염려 놓으시길.”
“…그마저도 파악 안 했으면 꾸지람이라도 들어야지.”
그러고는 싱겁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은 그녀는.
“유느미라. 일단 그렇게 불러.”
“…그거 이름에서 이쪽 발음으로 흘리듯 대강 지은 건가요?”
“글쎄.”
그녀가 윙크하곤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너야말로 이름이 뭔데?”
“짧게는 릭. 길게는 리스터. 대략 그렇게 부르시면 됩니다.”
“…네 쪽이 더 성의 없는 거 같은데.”
뚱한 그녀의 시선에, 에드릭도 어깨를 들썩여 주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멋만 있으면 되는 거죠.”
어차피 구 제국 황족의 성씨가 워낙 고풍스러우니, 이름이 좀 평범하다 해서 누가 뭐라 하진 못하겠지.
…애초에 그러던 말던 알 바냐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