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직하니 떡을 침. 이세계에서 (405)화 (405/454)



〈 405화 〉122. 나는 로미오도, 줄리엣도 싫다.

잠이 많아졌다.
애송이 녀석이 그걸 눈치챌 때쯤엔, 만성 피로가 무르익어가던 차였다.

사실 뭐 하나 제대로 된  거리 없이, 시계조차 없는 곳에서 목가적 삶을 영유하다 보면 시간 보내는 게 영 애매해지기 마련.

결과적으로 그러다 보면 일찍 잠들고, 깨어나는 것도 이르게 깨어나고, 그렇게 생활패턴이 맞춰지면 본의 아니게, 뭐랄까. 해가 떨어질 때쯤 되면 이미 졸음이 스멀스멀 온단 말이지.

아니, 그보다 대낮에도 뭔가 낮잠이 온달까.
식곤증이라고 해서 점심을 먹고 소화 시킬 때쯤, 느긋하게 있다 보면 잠이 솔솔 온다.

대한민국이라는 치열한 환경과, 이곳 세계에 막 발 딛은 이후로도 애송이는 꽤나 정신머리 없이 시간을 보내왔다.


이곳에 온 초기엔 아직 그 습성이 남아 있어 그러려니 싶지만, 익숙해지니 뭔가 열심히 빨빨빨 거리며 움직이는 게, 어리석다는 느낌이 들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앉아서 책을 끼고 각종 이론 등을 파헤치며 공부하는 시간과 가사 전반을 비롯한 노동에 충실할 때 빼곤, 대부분 시간이 남아도는 추세였다.
그래서 더 많이 졸린 걸지도.

라고 대강 납득은 했지만, 갈수록 잠드는 주기가 늘어만 갔다.


이건 좀 이상하다.
컨디션이 안 좋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 외에 특이한 점은.

번역 기능이 달린 장신구를 거처에 머물 땐 그러려니 하지만, 정작 생필품 포함해 물건이며 식재료를 구하러 마을로 향할 땐, 이쪽 언어를 배워보자는 명목으로 번역 장신구를 떼게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이게 좀 이상했다.
이론은 그럴싸했지만.
내려가서 현지 언어를 제대로 들어보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정작 그럴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러면 평소에도 그러면 되지 않느냐 싶지만, 아예 알아듣기 어려울 테니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건 싫단다.


뭐 충분히 그럴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좀….


거기다 아르스피엘은 밤마다 자리를 비운다.
일이 바쁜 건 이해한다.

아르스피엘은 깨어난 직후부터 연구를 포함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뭘 그리 심각하게 준비하냐고 묻는 애송이를 향해 그녀는 걱정 말라며 애써 밝은 척 미소를 보이지만, 피부가 창백하다거나 눈에 다크 서클이 끼는 등, 피로가 계속 누적되는 모습에 눈에 선했기에, 결국 애송이 녀석이 작정하고 그녀를 쉬게끔 어떻게 하려 했으나.




“괜찮다니까!”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보답이 돌아왔다.

물론, 직후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미안하다며 매달려 왔는데, 애송이 녀석도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피로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은 턱에 그녀가 무리하고 있구나 하는 쪽으로 해석한 정도에 그쳤다.


사실 이때 캐묻거나 추궁했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건 지켜보는 이의 아쉬움뿐이겠지.


마치 흔한 클리셰로 굴러가는 영화를 보는 듯한, 불길함이 매우 진하게 느껴지는 전개였다.

숨기는 게 있다.


사정이 있다는  그렇다 쳐도, 사실 이쯤 되면  사이는 깨가 쏟아져야 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의미로 에피소드가, 이야기가 진도를 나가야 했을 테고.


로맨스 식이었다면 한 지붕에서 산다는 건, 사실상 육체 관계로까지 이어짐을 의미하는 바.

그런데 아르스피엘이 매번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쯤 되면 자리를 떴기에, 아직도 그쪽 전개로 이어지진 않았다.


…정상적인 19금 로맨스물이었다면 펜 꺾으라며 오만가지 욕설이 튀어나왔으리라.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건 뭐 공포 스릴러로 가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특히 까마귀가 좀… 뭐랄까.


아르스피엘이 까마귀를 사역하는 건 그렇다 쳐도, 그 수가 유독 많다.
거기다 이상한 점은.

…단 한 번도 그녀가, 까마귀에게 먹이를 비롯한 무언가를 챙겨준 모습을, 애송이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는 거다.

이 부분이 이상해 애송이가 지나가듯 묻기도 했었다.
여기서 그녀가 뭐라 했는가.

“알아서 배들 채우고 오니까.”


자체 식량 수급이라.
이건 과연 애완조류가 맞긴 한 걸까?


애완으로 거듭나는 이유  하나는, 먹이 보충 및 식량 수급을 주인에게 내맡기기에 가능한 구조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걸 배제하고 자신이 알아서 먹이를 챙겨가면서까지 사역을 당하길 자처한다? 이건 좀 구조가 이상하지 않나?


그러나 애송이 녀석은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는  보였다.
어쨌든 이세계니까, 라는 식으로.

내 쪽도 판타지 세계랍시고 처음 발 디뎠을 땐 대충 그런 식으로 떠넘기곤 했었기에, 딱히 애송이 녀석의 안이함을 손가락질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누워서 가래침 뱉는 거밖에 더 되겠나.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자, 사실상 하루에 반나절 정도 깨있는  고작이었다.
자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오전에 깨고 오후엔 눈 감고 잠드는  고작이란 건데.




“일어나게.”


잠이 덜 깨는 이유  하나는, 자체적으로 깨지 않는 한 일어날 방도가 딱히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자, 묘하리만치 퍼뜩 반응하고야 말았다.

“……?”

희미하게 뜬 눈으로 잠시 사태 파악이 덜된  인상을 굳히던 녀석은.

“어… 그러니까….”
“한동안 못 봤다고 얼굴마저 잊은 건가?”
“오르누스 씨?”
“사고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나 보군.”


누굴 기계로 아나.


애송이 녀석은 목이 타는지 뾰족하게  쇠 주전자를 기울여 벌컥벌컥 물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상태는 어떤가?”
“…잠이  많아졌죠.”
“그런가.”



이곳 세계에 온 이래 애송이를 담당하기로 했던 그다.
중도에 그가 사라졌기에 여러모로 문제가 됐을지도.



“죄송해요. 저 때문에 폐가 되지 않으셨나요?”
“붙들려 가도록 방심한 내 쪽에도 문제가 있지.”

그는 애송이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  문제로 취급했다.
나이를 공짜로 먹은 건 아닌지, 그는 좀처럼 동요하거나 흥분하는  없이 차분히 문제를 짚고 넘어갔다.

“그보다 여긴 어쩐 일로…?”
“…….”


결국 이 문제로 돌아왔다.




“강제로 붙들려 온 거치고는 침착하군.”
“강제?”



아,  부분에 오해가, 어폐가 있었던 건가?

“아닌가?”




애송이의 태도에 중년 사내, 오르누스의 표정도 기이한 방향으로 일변한다.



“이런저런 설득이 있기야 했겠지만, 지금 와서는 그 실체를 슬슬 알았을 테니, 속았다는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속았다?”




 속았다는 거지?


“생각보다 같이 온 상대에 대해 무관심했나 보군. 아니면 그렇게… 유도된 것인가, 흠….”
“무슨 사정이 있는 겁니까?”
“사정이라면 많지. 우선…  말을 해주어야겠군.”



사내는 잠시간 침묵한 다음.


“미안하게 됐네. 더 이상 자네를 구할 수 없게 됐네.”



그는, 마치 선고하듯 그 말을 시작으로, 애송이가 모르던 바를 하나하나 일러주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간단.

첫째.
사라진 직후 곧장 애송이와 아르스피엘을 찾으려 했으나  찾음.
이에 대한 이유는, 이곳이 평범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
사실상 다른 차원에 일부라는데, 그 속에서도 격리된, 대단히 기이한 공간이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일반적인 인간들은 이곳 세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

변수가 하나 더.


본래  세계 생명체는 이세계, 다른 차원에 진입 시 이것저것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기에 애송이는 소환 직후 철저히, 마치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듯 그런 차원간 보호, 적응 및 수용 기능이 자체적으로 갖춰진, 기관 내에서 생활하게끔 한 것.

다시 말해 그곳을 벗어난  자체로 이미 애송이의 신체는, 마치 백혈구가 침입한 이물질이며 세균을 처리하듯 그곳 세계의 자체적 영향, 기운 등에 의해 신체가 갈수록 무너지게 된다는 점.

본래라면 여태껏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라는데, 이조차도 연유가 있었다.

“아마 이곳 주변에 깔린 결계 탓이겠지.”
“결계요?”
“자네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여길 들어오기 위해 겪은 고난은 이루 말할  없을 정도였네. 사실 여기에서 지금 자네를 만나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지.”
“…….”

이쯤 되니 애송이도 감을 잡았는지 얼굴색이 흐려진다.
아르스피엘, 그녀가 무언가에 필사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유가 몇 가지 추려진다.

그보다….


“지금은 생각보다 의식이 뚜렷한데… 이유가 있는 건가요?”
“약을 썼네. 본래라면 임시 처방  곧장 기관으로 복귀해서, 다시 관련 치료 및 처방을 행한 뒤, 이곳에서 묻은 각 영향 등을 털어낸 직후 되돌려보냈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러기에 너무 늦은 것 같군.”
“흐음….”
“아직 와닿지 않나 보군.”
“뭐, 젊으니까요. 죽는다 어쩐다 하는 게 확 와닿진 않죠.”
실제로도 애송이는 실감을 제대로 못 하는지, 충격을 먹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보다 제가 이곳 세계, 그러니까 아르스피엘이 형성한 이 공간에 눌러앉아 있어서, 그쪽 기운에 노출돼 어쨌든 몸 상태가 이상해졌다, 그런 의미시죠?”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 점차 변형돼서, 나중엔 인간이 아니게 될 수도 있을 테니.”


알, 넌 대체 뭘 하고 있던 것이더냐?


애송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다분 작위적인 반응이었지만, 사내는 이를 지적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아무튼 내 착각 중 하나는, 자네가 억지로 납치된 게 아니라, 자진해서 왔다, 그건가?”
“설득당한 것도 맞긴 하지만,  자의인 것도 사실이니 이 부분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실제로 조사 과정에서도 저항이 없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지. 최면이나 어떤 방식으로 꾀어냈을 것까지 예측을 했지만….”
“젊은 애들은 불안불안하잖습니까. 사춘기라 비이성적 결단을 내릴 수도 있는 거고요.”
“그리고 보통 평생의 후회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 그게 없는 이들은, 후회할 짓을 안 했거나, 죽은 이들뿐.”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 젊은 시절에 훅 간 거 아니겠나.
뭐 단순 픽션이지만.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본래라면 자네를 구출하는  최우선이 됐겠지만, 그게 의미를 잃었으니 차선을 행해야지.”
“…….”
“어찌 됐든 그녀는 한때 기관에 속해 있었네. 그런 이가 이러한 결말을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까지 규율을 어기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했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지. 그게 아니라 한들,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이런 의도를 지닌 채 자네를 구속해 죽도록 이끌었다는 점은 바뀌지 않는 현실이니….”
“음, 그 부분은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무얼 말인가?”
“우선, 그녀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거 같습니다.”
“무의미하군. 지금의 그녀는 ‘그것’에게 먹혀 있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야.”
“그것?”
“본 적 없는가?”



뭘 말인가?


애송이는 고민한다.
답은 사실 진작 나와 있었지만….

“까마귀 말인가요?”
“그렇게 소개했는가? 이거야 원….”



이 또한 예상 밖이었는지, 오르누스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든다.


“상황이 어찌 굴러가는지 다시 헷갈려지는군.”


그는 자신이 뭔가를 놓친 건지, 다시금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본의는 아니지만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그러기에 애송이도,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머리를 굴리려는 듯, 심호흡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애송이 녀석이 어떤 생각인지, 솔직히 전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만약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가정이며 IF는 다양하다지만, 정말로 저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면, 뭘 어떻게 하게 될지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지금의 나라면 뭐, 알아서  대응하겠지만….


저때는 아직, 뭐가 어찌됐든 ‘애송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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