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화 〉100. 땅 샀는데 집들이 하실…?
에드릭은 개인적으로 차를 즐기는 취향은 취향 나름이다는 입장이다.
마음에 들면 즐기고 아님 말고.
그러기에 그는 판이 깔리면 차를 음미하되 굳이 의도하거나 추구하는 형편은 아니었다.
거기에 딸려 나오는 간식들이 흥미를 끄는 거지.
단 음식은 뻣뻣하거나 싱겁게 느껴지는 찻물과 맞물며 꽤 오묘하면서도 그럴싸한 풍미를 자아내곤 하는데, 이러한 조합과 조화의 묘미는 먹어본 이만 알 수 있는 흥밋거리니라.
비슷한 측면으론 쌈에 삼겹살, 생마늘과 쌈장 등을 첨가해 같이 먹는 느낌과 유사하다 보면 될 거다.
“왕 하라 할 땐 안 하더니 정작 여기선 뭘 하고 있는 거냐?”
파라메라 대륙에서도 제법 큼지막한 체구였는데 알그리타에 오니 그보다 더한 박력이 느껴졌다.
그녀야 성장기라던가 딱히 정해진 게 없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키며 체구를 조절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녀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헬루스는 어땠고요?”
“별거 있냐.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 거지.”
신수 알헤디나에게 덤벼대며 대륙의 패권을 겨룬다고 착각하던 시기에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무기력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녀, 신수 바헬루스는 어쨌든 살아감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는 듯한 형편이었다.
처음 만날 당시, 에드릭과 동행했던 흡혈룡 키헨젤바라투스 아토게르나엔자에게 제대로 참교육을 당한 이래, 세상은 보다 넓음을 깨달은 탓인지 그녀는 별로 초조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에드릭이 있던 당시에도 그녀는 세상의 변화에 무척 관심을 가져온 터라 지금쯤이면 태도는 불성실해도 아마 어지간한 학자들은 엄두도 못 낼 분량의 지식 정보를 습득해 그걸 정리하고, 되새기고 있을 터였다.
“이쪽 오고서 살펴본 소감은요?”
“우리 쪽 애들이 발바닥 터지도록 안 쫓으면 격차가 나겠더라.”
“신체 능력 자체는 아직 파라메라 쪽이 우세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세하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고 변화하여 더욱 발전하고자 하는 개선 의식, 개혁 의지가 부족하단 점이죠.”
에드릭이 구태여 완전 평화를 주장하며 유화, 친화 정책에 올인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명백한 위협, 위험이 느껴져야 변화도 와닿는 거지, 지금 자체가 최선인데 바뀌어야 한다고 나불대면 귀에 들어나 오겠나.
그러기에 에드릭 본인은 친화적 행보를 이어갔어도, 정작 깽판을 치는 일부 이들에게 못마땅한 눈치를 보냈다지만, 그걸 구태여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건, 정치적 처세의 일환만은 아니었다.
에드릭은 여전히 적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부류에 속했다.
그게 없으면 사람을 풀어지고, 그러다 보면 부패하고, 썩어갈 터.
행복이란 것도 쉽사리 주어지면 뭔가 아쉽고, 떨떠름하며, 쉽게 질리기 마련.
…어이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적어도 유희로서 누릴 법한 콘텐츠들이 현저히 적은 이곳 세계관에선 그런 문제가 훨씬 크게 작용하리라 봤다.
“그래서 넌 이제부터 계속 여기서 죽 치고 있을 거고?”
“그거야 모르죠. 사정에 따라… 어찌 될지는.”
듣는 이가 많고 적고는 알 바가 아니다.
여기 내부에 자리잡은 시녀들 수만 해도 수명. 그 가운데 끄나풀이 없진 않겠지만… 에드릭은 발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헛소리를 나불댔을 때 그게 누출되면 그만큼 발언 수위를 조절할 여지로 삼으면 그만이니.
동시에 그러한 문제는 에드릭의 전속 시녀장, 시종들에게도 경종으로 작용해 그들의 책임과 의무에 더욱 지대하게 무게를 늘려가리라.
…다들 한통속이라면 싹 다 갈아버리면 그만이고.
애초에 에드릭은 여타 왕실에 시집온 뭐시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뒷배경이 아예 없느냐 하면 그건 또 미묘.
본인의 능력, 여력은 왕실 내부의 깊디깊은 어둠, 음습함, 추잡함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어쩐다 하겠지만, 그거야말로 알 바 아니었다.
‘뭣 하면 미친 척하면 되지.’
정치라는 건 의외로 심플하다.
명분 싸움이라는 것도 생각 이상으로 심플하고.
애초에 정정당당에 대해 에드릭은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그러기에 혹여 투표를 행하면 부정 투표를 행한다.
정확하게는 상대가 하게 만들고 장려하게 해 증거를 쥐고 나중에 숨통을 조일 거다.
셀프로 독을 복용해 독살범에 대한 증거와 인과를 형성해 대비 안 하면 멋모르고 당하게 만든다던가.
원래 전쟁이라는 건 모름지기 선빵 필승이다.
그리고 선빵이 가장 큰 효력을 보이는 건, 안면이 아니라 뒤통수를 연장으로 후려 갈겼을 때고.
에드릭이 대체로 유화적으로, 유순한 태도를 대외적으로 고수하는 것도 그런 맥락.
방심해줘서 먼저 명분을 허투루 건네주면? 그건 그것대로 감사한 노릇.
싸움이 싫다 해서 정면 싸움을 회피할 생각도 없다.
“큰 그림 그린답시고 몸 사리고 그럴 재주가 네겐 없으니까.”
“그런가요?”
바헬루스는 그런 의미에서 에드릭의 해결법을 몸소 겪은 존재였다.
애초에 신수를 신수보다 더한 존재를 불러와 굴복시켜 굴종하게 만든다는 발상을 누가 하겠는가.
그럴 수단이 있었으니 그런 발상이 가능한 거 아니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럴 수단이 없었다면…….
“방법은 항상 널려있지. 하고 못 하고를 너무 재니까 다들 몸이 굼떠지는 거고.”
“다들 손해를 짊어지고 싶진 않으니까요. 괜한 손해는 더더욱.”
리스크에 너무 목줄이 잡혀 있으면 사람은 투쟁보단 교섭으로 뭔가를 해결하려는 습성을 지니게 되는데, 그래서 2차 대전이 일어난 거다.
히틀러한테 이것만, 저것만, 마지막 한 번.
이런 식으로 양보해서 결국 프랑스까지 점령당한 게 아닌가.
“그래서 뭐냐? 내가 여기 대륙에서 깽판 쳐주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그런 민폐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신수는 조커 카드가 아니다.
상호 확증 파괴를 위한 핵무기로 전락해야지, 핵무기가 본격적으로 쓰이면 그건 다 같이 죽자는 거밖에 안 된다.
“굴러가는 흐름 보니 네가 당한 그걸 계기로 명분이 돼서 지금 전쟁이 나고 말고 어쩌고 하는 모양이던데.”
“저하고는 관계없는, 그러나 저 때문에 사단 난 거니, 이보다 공교로운 일이 있을까 싶더군요.”
“교훈을 위한 피해는 그렇다 쳐도, 넌 그러한 게 확대돼서 다 같이 파탄 나는 걸 피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었지. 그래서 여기서도 그럴 셈이냐? 여기선 네가 뭘 양보하고 자시고가 없을 텐데?”
본사에서 동인도 회사를 모티브 삼아 만든 서국 회사에서의 에드릭은 나름 막바지엔 다섯 손가락 내에 드는 최고 권력자였다.
그런 그가 그걸 내려놓고 상대에게조차 양보를 강요했다.
애초에 그 정도 위치에 놓인 이가 손수 대의명분을 등에 업고 자기 희생을 자처하는 구도를 그려나가는데, 이렇게 온 시점 자체가 적으로 정의된 이들 기준에선 명분적으로 망했다 해도 무방.
거절하면 에드릭도 손해볼 게 없는 게, 자기 자리를 유지하면서도 역으로 후려 팰 대의명분을 얻게 되는 거니, 누가 보면 목숨과 지위를 걸고 자살 테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전혀 반대였다.
이것도 에드릭이 자긴 가진 게 없다는 발상으로 꽁꽁 무장해 대놓고 질러대서 그런 거지, 가진 게 많은 부류들은 도통 이런 식의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다.
최고 권력자가 대의명분과 모두의 긍정적 영향을 위해 자기 권세를 내려놓고 상대, 적으로부터 양보를 외치며 다 같이 더 나은 길로 나아가자고 한다.
백성들, 시민들 기준에선 이보다 더한 선인이 또 있을까.
이것도 일부 민주주의적 사고, 관념 등을 일부 퍼트려야 그나마 더욱 시너지를 이어가는 거지, 왕정, 신정에 익숙한 이들 기준에선, 왜 주인이 주인이 아니길 자처하는가는, 사뭇 의구심을 가져다줄지도 모를 문제였다.
그러나 파라메라는 어쨌건 아직은 부족 단위의 지도계층이 득세하고 자리매김하던 시대이기에, 에드릭은 그것까지 겸해서, 또 여러 차별점이 있는 종족 단위까지 고려해 온갖 걸 계산한 다음 그런 걸 밀어붙인 셈이었다.
또 이전에 무수한 부족들과의 친분 및 교류는 덤.
그들의 의견, 이익, 권리를 대변해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있나.
이건 자칫 잘못하면 이용당하기 딱 좋지만, 이용 안 당할 수 있는 힘과 권리가 에드릭에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배은망덕하다면? 에드릭은 거기에 단죄를, 철퇴를 때려 박을 충분한 영향력과 그럴 의욕 또한 가지고 있었다.
에드릭은 성과를 바탕으로 자기 성향을 꽤 오랫동안 보여줘 왔다.
적에게 무자비한 면도 일부 보여줬으며, 아군을 비호하고, 확실하게 그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며, 우군으로 하여금 배려와 양보 또한.
만약 서국 회사 내에서 누군가에게 지배당한다 치면, 대다수는 에드릭을 택했으리라.
일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에드릭은 바로 그 일부를 공적으로 삼아 싹 지워버리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인물이었다.
세상은 좁되 이권을 추구하는 이들은 많다.
그러니 수는 줄일 수 있을 때 줄여둔다.
수를 늘리는 건, 언제든 가능한 거니.
로마가 전성기 때 얼마나 넓었는가. 또 정복을 바탕으로 노예를 얼마나 공수해왔고.
그러나 시대가 흘러 정복 활동이 미묘해지고, 노예의 수가 줄자 결국 토호며 지주들은 민간 층을 고용해 그들을 자신의 땅에서 영구하게 일하게끔 만들고자 온갖 수작질을 부렸다.
예컨대 적은 싹 갈아버리던가, 노예화 시킨다.
그럴 때 그들이 악행을 일삼는 버러지들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거고.
보통 이권을 탐하고 장악해 독점하는 것들 대부분은 선을 여럿 차례 넘는다.
그리고 에드릭은 대체로 그런 이들과는 화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성향도 그렇지만 추구하는 방향성으로도.
그러기에 초장기에 에드릭이 서국 회사 내에서, 알헤디나의 비호를 받기 전까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거다.
“그거야 네가 알아서 잘 할 테니 내가 훈수 둘 필요는 없겠지. 네 쪽이 그런 음습한 쪽은 잘하잖냐?”
“음습하다니요. 이 또한 지혜와 지성이 맞물려 이루어지는 방식인데요.”
“헛소리는 됐고, 뭘 했으면 싶은데?”
“흐음….”
에드릭은 잠시 침음하다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는 분들하고 땅 하나 샀거든요. 할 일 없으시면 거기 좀 가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