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화 〉97. 할 수 있는 게 돈 지X 뿐이라면….(4)
“흐음….”
술잔을 기울이며 안주로 온 요리를 씹으면서도, 모두는 네모난 마작판에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 이쯤이면 오래 하셨는데 슬슬….”
“이기고 그만둘 생각이라니, 못돼먹었구나.”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언제든지 가능하니 오늘은 이만….”
“뭐냐? 고작 이틀 밤밖에 새지 않았지 않더냐?”
“국왕 폐하께서 이 일로 뭐라 하실지….”
“너하고 애 만드는데 힘 썼다고 하면 대강 무마될 테니 걱정은 덜도록 하여라.”
“…….”
그걸 변명이랍시고 쓰신다고요? 이 시국에?
놀랄 노 자다. 진짜로.
“저 데리러 오신 거 아니셨나요?”
“상태 보고 선택하려던 차였다. 이전처럼 우리 행보에 뭔가 불만 사항이 있다거나, 불만족스러운 태도를 내비치려 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
모르긴 개뿔. 이미 답은 정해졌으면서.
“혹여 제 자금줄이 필요해서 어쩌고저쩌고하시려는 건 아니실 테고요.”
“…흐음.”
“전쟁 벌이고 말고야 개인적 그거라 쳐도, 제가 거기에 협조하고 자시고는 없을 겁니다.”
너무 대놓고 말한 탓일까.
패왕녀도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왜 그러느냐? 사내라면 그 이름을 대륙 각지에 드높임은 물론 역사에도 그 이름을 새겨 불멸의 상징으로서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자 하여야 마땅하거늘….”
“그 망할 명예니 이름이니 역사니 해서, 현재 살아가는 이들에게 지옥을 선사할 정도로 제가 욕심쟁이가 아니라서 말이지요.”
다 부질없는 짓인다.
적어도 에드릭 개인적으론.
“개척 군주치고는 몹시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이로구나.”
“앞서 야만적인, 전사니 뭐니 하면서 치고박다 뒤지는 꼴을 셀 수 없이 많이 봐온 덕분이라 쳐두죠. 문명 발전이니 문화적 교류니 어쩌고 해서, 또 욕심 더럽게 많은 것들이 영토 욕심이다, 무역로 개척 목적으로 개방을 요구한다 어쩐다 해서, 일손이 많이 필요해 노예 확보 차원에서 어쩐다 뭐다… 다 이해는 갑니다만, 저는 돈이 있으니 그걸로 대강 충당은 가능하거든요. 평화적 흐름에서라면 저도 물론 협조할 여지는 충분합니다만….”
“경제적 개념을 숙지하고 있으니 잘 알겠구나. 어디에 돈을 쓰면, 그게 군사적 기여로 이어질지도.”
“괜히 제가 목욕탕 건설하겠다 어쨌다 한 게 아니죠.”
청결은 중대 사항이다.
전염병 막는데도 좋고, 생활 환경 개선, 심지어 시민 의식에 문화까지 덩달아 개선된다.
애초에 전쟁 뒤 역병이 창궐하는 게 꽤 일반적 사항이기도 한데, 왕도에서 목욕을 대중 유행 및 문화 등으로 굳히면, 이러한 요소가 자동적으로 퍼져갈 거다.
나머진 간단하게 지원을 비롯해 등만 떠밀어주면 족하고.
그리고 이런 유행을 선도하게 하는데 귀족들의 영향력은 꽤 클 테고, 이런 걸 자기들이 솔선수범해서 퍼트리게 하면, 그 자체로 다른 나라며 주변이 역병으로 초토화될 때 카일론은 그 자체로 안정을 이룰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이런 행적 및 영향 등은 자연스레 역사에도 족적이 남을 테니, 원하든 원치 않든 문화 및 올바른 국정을 선도한 위인으로까지 이어질 터.
그래, 이 정도 선에서 이름 남기는 거라면, 에드릭도 썩 나쁘지 않다고 봤다.
…이런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설명할 단계는 아니기에 아직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예측에서 벗어나 사태가 어찌 변화를 맞이할지도 모를 일인데 급하게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 자제해야지. 괜히 흑역사 한 페이지 분량을 추가로 생성하지 않으려면, 입은 무겁게 하는 편이 타당했다.
“초원 엘프들하고 협조해 그곳 시장을 형성해 그곳 주위 전쟁은 막더라도, 정작 말을 제공하는 거니 다른 지역에 일어나는 전쟁은 방조하고, 방치하는 격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거기까지는 제 영역이 아니죠. 제 눈 안에 들고, 제가 살피는 영역 외부의 일까지 개입해 두루두루 살펴 어쩔 정도로 제가 인물됨이 썩 대단하진 못합니다. 그 점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인간의 욕심이란 건, 제가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그럼에도 정작 자기 수비 범위 내에선 그런 경우를 원치 아니한다? 심하게 편향된 신념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느냐?”
이에 대해 에드릭은 슬쩍 고민하다 핀트를 살짝 틀었다.
이건 논하기 시작하면 결국 서로 간의 입장 차이 문제로 돌아가는데, 결국 납득을 시켜도 싸우자는 거고, 납득이 안 되면 따라야 하니, 수지타산에 안 맞을 수밖에.
그러면 뭐다? 적당적당 흘려내야지 어쩌겠나.
순순히 따를 게 아니라면, 명분을 굳이 만들어줘서 나 잡아드세요, 하고 범의 아가리에 대가리를 밀어 넣어서야 쓰겠나.
“음, 예를 들어보죠. 전하께서는 카일론 내에서 배를 굶는 백성과, 전혀 딴 나라의 배를 굶는 백성, 둘 중 누구에게 빵이며 스프를 건네야 한다 보십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대답이 필요한가?”
“저도 비슷합니다. 이걸로 대답이 되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역으로 너는 우릴 도와야 하는 게 맞을 터인데.”
“그렇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요. 전쟁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을 장악해 이익을 꾀하고…. 한데 장기적으로 이게 썩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말이지요.”
애초에 분열된 민족이 통합된다는 개념이라면, 그럴 수 있다 치자.
원래부터 이 정도 영토를 지녔는데 그걸 수복한다는 개념? 이것도 좀 애매하지만 그러려니 해두자.
그러나 남에 집에 쳐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면, 이건 뭐가 됐든 폭력 행사며, 이는 결국 원한 관계를 조성하게 되는 거며, 이 경우 상대의 씨를 말려야지, 상대를 복종하고 충의를 다지게 만들려 하면, 결국 세기에 걸친 원한 관계가 형성되고야 만다.
만약 주변이 폭군, 압제자들 투성이라면 그 악마로부터 무고한 백성들을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치르고, 이걸 백성이 호응한다면… 그거야말로 베스트.
의외로 맹자가 주장한 덕을 앞세워 기반을 다져 주변으로부터 부러움과 본이 되고 모두가 입을 모아 찬양하는 흐름을 조성하면, 절로 이롭게 된다는 내용도 이쪽이 베이스라 봐야 할 거다.
사실 대놓고 전쟁하라 할 순 없겠지만, 주변이 속된 말로 좆 같은데 유토피아가 저기에 있다 치자. 그러면 백성들이며 시민들이 목숨 걸고 이주할 테고, 이 자체로 위협을 느낀 적국이 괜스레 우릴 찔러댈 텐데, 이러면 전쟁 명분으로서도 아주 딱 알맞다 볼 수 있다.
자기가 백성 관리 못해 런하는 걸 대체 누굴 탓하랴. 하면? 조져야지. 그렇다고 국력이 약하다면 모르겠지만 약하지도 않으면? 끽 소리 못하고 백성들 다 뜯겨야지.
그리고 그렇게 뜯기다 보면, 영토 병합, 합병, 점령 등의 명분은 아주 쉽사리 넘어오기 마련.
…거기서 한술 더 뜨자면 섭정이든 내정 간섭을 바탕으로 위성국으로 격하 시키는 방식을 추구하면 그만.
“라는 거죠.”
에드릭의 이러한 예시는, 패왕녀에게도 제법 신선했나 보다.
“이거 이제 보니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계략을 품고 있는 녀석이로구나. 심히 감탄했노라. 그러한 정치적 방식으로 적을 내부로부터 분열시키는 방식이라… 이상적이긴 하나 매력적인 점에선 부인할 여지가 없구나.”
“창칼만 없다 뿐, 이런 것도 전쟁 방식이라면 방식이죠.”
현대 사회에서 나라가 파탄 나는 원흉은 경제가 박살 나는 것.
독일에서 히틀러가 급부상한 것도, 또 나치가 독일 경제를 살렸다 어쨌다 해도 그건 얄마르 샤흐트의 기지를 비롯해 당장 여러모로 시기며 흐름이 잘 맞아떨어진 구석이 있어서 그랬지, 결국 파산을 면하기 힘든 나치 독일이 할 일이 없이, 단지 패권주의에 미쳐 날뛰어서 선빵으로 프랑스를 조져 2차 대전을 발발시킨 게 아니란 거다.
경제적 이유만 들 순 없겠지만, 파탄이 예고된 흐름을 해결하고자, 그리고 무조건적인 성공과 기적적 성공을 마구 이뤄온 히틀러 입장에선, 결국 망조에 직면하게 된 상황에서 궁지여책 겸 기사회생을 위해서라도, 결국 프랑스를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조차, 당시엔 그렇다 쳐도 다 지나고서 이를 분석한 이들 기준에선, 기정사실, 예정조화에 불과했다며 유감을 표한 것도 괜한 이야기는 아닐 거다.
…작정하고 설명하고자 하면 훨씬 복잡해질 테지만.
그리고 이런 점을 대놓고 이야기할 순 없었지만, 가정이며 가설을 빙자해 설명한 덕에 패왕녀 쪽도 그럭저럭 에드릭이 하고자 한 요지를 파악한 모양.
“그러나 장기적인 경우며, 좀처럼 예상하기 어려운 흐름이로구나. 그 외에도… 당장 카일론에선 알맞지 않은 방향성이고.”
“그 점은 동감합니다. 그래서, 굳이 말씀 안 드린 거고요. 알면서도 어차피 못 하는 거라면, 어차피 할 거 미련 없으시게 하시는 일에만 집중하시는 게 좋을 테니, 여기선 침묵이 미덕일 테지요.”
“그런 점은 마음에 드는군. 보통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것들은 자기의 사고며 사상, 신념 등이 최우선이기 마련인데, 잘도 참아냈군?”
“제가 지닌 건 한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거지, 그게 법이고 진리며 해답일 순 없는 거니까요. 답이 하나일 정도로 세상이 간단하진 않잖습니까? 물고기한테 하늘을 날라 명하거나, 새한테 바다에 잠겨 살라 하는 것만큼 부조리한 경우가 있답니까? 저는 그런 순리에 어긋나는 짓을 강요할 정도로, 제 주관이며 사고를 맹신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요.”
“흐음…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그대는 군주며 왕으로서의 역할엔 적합하지 않는다는 걸 재차 확신하게 되는구나.”
“……그러겠죠.”
어긋나더라도, 망가지더라도, 그릇됐어도 결국 자신이 가는 길에 한 치의 의혹도, 불신조차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바로 리더이자 왕이며 군주인 셈.
그 정도 급이 되어야 대가리가 돌아가든, 자기 주관이 강하든, 심보가 고약하고 까다롭든 어쨌든, 따르게 할 수 있는 거다.
그 정도조차 안 되면, 누굴 감히 뒤따르게 하겠나.
따르고픈 등을 보여줘야 따르는 법인 거다.
따를 만한 급이어야 그걸 보고 선망하든, 경외하든 어쨌든 따르는 거고.
두려움은 곧 공경이자 경배의 대상이 된다.
신화며 역사에서 두려움은 언제나 숭배의 대상으로 변질돼왔다.
자연 현상, 짐승, 인간.
…그리고 그건 과학 문명이 우주의 진실, 그 편린마저 엿보는 에드릭이 살아가던 당대에조차 예외가 없었다.
“그러니 저는 수비, 수호 차원에서는 참전하더라도 침략 쪽엔 일절 손을 보태지 않을 겁니다. 대신… 내정을 비롯해 문화 사업, 기타 전반에 걸쳐선 도움을 드릴 거란 점을 앞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정도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겨주시기를.”
“그렇군.”
약간의 아쉬움.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번에 터놓는 이건, 에드릭이 꽁꽁 감춰놓은 그 속내를 확실하게 드러내 성향을 확정 지음으로써, 그녀가 차후 행할 방편, 방침 등을 결정 짓는 계기가 될 터였다.
어쩌면 그녀 내부에선 에드릭을 부관 혹은 장군으로 참전 시켜 이리저리 부려 먹을 속셈이었을지도.
그러나 에드릭은, 전쟁에 대해선 어쨌든 초보다.
개척 군주랍시고 떠받들어준다지만, 애초에 파라메라 대륙에서 에드릭이 한 건 무수한 부족, 종족들을 통합해 중심을 유지하며 균형을 잡아내는 게 고작이었지, 정작 주도적으로 전쟁을 치른 건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조차도 결국 모두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규합한 정도에 그쳤다.
…그러면서 배운 것도 꽤 많았지만.
“그래도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다곤 하나, 이걸 수용하고 묵살하고 말고는, 전하와 폐하께 달린 일일 거라 생각되옵니다만.”
“이 몸은 최대한 존중해주고자 한다. 쓰임이라는 게 항상 일정할 필요는 없는 셈이니. 그러한 개성조차 무시하고 억지를 부릴 정도로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대를 그런 식으로 부린다는 건, 본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를 자리에서 내쫓거나 퇴출시키거나 본의 아니게 강등시킨다는 의미인데, 그건 그것대로 분란 및 불만의 소지로 작용할 테지. 봉신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이 시대에 이는 알맞지 못한 방식이다. 그 점도 물론 고려는 해뒀겠지?”
“예, 그러니 이 경우엔 역시 그거죠.”
“그대는 참여에 회의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이 몸은 참여를 배제하는 태도를 적극 내비친다. 간단한 문제로군.”
“그러면서 화합과 대립 구도를 적당히 꾸려서, 귀족들의 이목을 혼란 시키면 좋겠지요. 백성들께는 언제나 화합하고 정겨운 모습을 내비치고요.”
“…그래, 역시 모략을 비롯해 내정 개통이 그대에겐 더없이 알맞겠군. 그러면서 겸사겸사… 재무 관리도 이어가면서….”
“은근슬쩍 일감을 늘리려 하지 말아주시죠. 제가 재무 쪽에 관여하다간 다른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엔 고문 정도의 역할이 족하겠죠. 조언이라거나, 높으신 분 겸 경력자로서의 고마운 말씀 정도?”
“…잔꾀를 부리는구나.”
“전부 타당한 말씀만을 드린 것으로 아옵니다만?”
…그리고 그런 둘의 대화를, 마작판 앞에 두고 듣던 루넨브리스와 흑성 기사단원은….
“둘 다 뭔 소리하는지 모르겠다….”
“크흠!”
안주를 씹으며 빨리 게임이나 속행했으면 좋겠다는 태도를 아주 팍팍 내비치고 있었다.
‘게임 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뭉멍!’
하고 에드릭을 지긋이 보며 꾸짖는 듯한 루넨브리스를 보며 에드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리 산으로 흘러간 거지.
말하는 쪽은 덜 피곤하다.
그러나 관심 없는 분야를 이리저리 듣는 둘은 어땠을까 모르겠다.
“하던 걸 마저 하지. 이것만 끝내고….”
이때 에드릭은 생각했다.
…패가 꽤 잘 들어왔나 보네.
망한 패라면 여기서 이야기를 종식 시킬 겸 자리를 떠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물러져 있던 루넨브리스의 눈이 다시금 늑대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진다.
“쩝.”
난 자리를 뜨고 싶은데.
…생각해보니 에드릭 스스로 이야기가 산으로 흘러가도록 반쯤 유도했단 점을 그 스스로 깨닫게 된 것도 이쯤.
그리고 자신이 유리한 시점인 걸 아는 왕녀 전하께옵서, 그 이점을 버려가면서까지 여기서 자리를 뜰 리가 없지 않나.
…이 또한 실책인가.
에드릭은 자조했다.
“자, 그대 차례다.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빨리하는 것이다, 뭉… 끙끙!”
“예예, 알아모십지요.”
애써 뭉멍 소리를 얼버무리려는 루넨브리스를 보며, 에드릭은 별수 없이 다음 행동에 돌입했다.
그게 비록, 최선인 듯 보여도 결과적으로 망조에 이르는 길임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