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92. 누가 이랬더라.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유감이지만 왕녀 전하를 찾으러 떠난 여정은 결국 죄다 수포로 돌아갔다.
가는 곳마다 없는데 어쩌겠나.
일이 꼬이기로 작정하면 원래 이런 법이지.
그래서 간만에 또, 흑성 기사단원들이 모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루넨브리스 녀석 보러 가는 명목도 있고… 허기진 걸 참다 참다 보니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대.
…그나마 다행인 건 카일론은 ‘아점저’, 이렇게 삼시를 꼬박 챙기는 나라였기에 시간대도 딱 알맞았다.
아침저녁만 챙기는 문화권의 나라에선 보통 간식이나 입가심을 하는 시간대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도 귀족이냐 평민을 비롯한 노동자냐에 따라 방식이 천차만별.
…전쟁이 뜸해져 무도회라는 사치성 행사가 또 다른 권력, 기득권층의 영향력 과시를 위한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은 예를 생각해보면, 어느 세계든 귀족을 비롯해 스스로가 대단하며 고귀하다 착각하는 부류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무엇 하나 잘난 티를 내고자 안간힘을 쓰는 구석들이 있었다.
거기서 의식주는 사실상 가장 기본이자 근간에 해당.
잘 사는 놈들과 못 사는 놈들을 추릴 때 빠지지 않고 시대를 막론하며 논의되는 게 바로 의식주다.
어느 지역, 어느 구역에 어느 집, 뭔 옷을 입고 치장은 뭘로 했고, 핸드백이며 가방은? 신발 및 구두는? 먹는 건 또 어떻고?
…그리고 이러한 것이 실용성을 벗어나 사치로 전락하고, 그 사치가 과다하게 부풀면, 다른 의미로 나라 말아 먹는 것에 일조한다 봐도 무방할 거다.
적게 활성화되면 또 다른 산업을 비롯해 문화로도 연결될 수 있겠지만… 뭐 그조차도 시기며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져야 할 테지.
“분주해서 식사 챙기는 걸 잊어 먹으셨는지요?”
흑성 기사단원 중 한 사람이 의외라는 듯 말했지만, 에드릭은 들은 채도 안 했다.
본래라면 정령체가 된 이래 먹는 거에 크게 집착 안 해도 사는데 어마어마한 지장이 생기고 그런 건 아니라지만….
‘이건 그거지.’
스트레스 풀려는 목적으로 먹거리를 찾는, 뭐 그런 거?
담배를 피웠거나 술에 절어 살았다면 습관적인 걸 떠나 즉각 술 담배를 물고 빨았겠지만… 에드릭은 그것들 모두를 즐기지 않는 입장 아니던가.
…그래서 에우리에 누님께 달려가 재롱 좀 피우면서 겸사겸사 굿도 보고 떡이나 치려 했는데, 그 놈의 망할 조심성이 또 발동해서, 그냥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명목으로 떡이나 치며 스트레스나 풀면 되는데, 괜한 시비거리며 덜미가 붙잡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소심쟁이의 비애.’
가끔은 안면몰수하고 하고 싶은 거 막 질러보고도 싶었지만, 개인적으로 비싼 렌트 카를 모는 듯한 기분을 늘 짊어지고 있기에, 더욱 조심성이 과한 건지도.
…아니, 그 덕분에 큰 사건 사고에 휘말리지 않는 걸 보면, 이것도 썩 나쁘다 볼 순 없겠지만….
기사단원들에게 주어지는 식사는 몸을 굴리는 이들답게 기름진 것들 투성.
빵은 그렇다 쳐도 고기는 많은데 야채는 적고… 이래서야 영양소 배분이 썩 건전치 못할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 역할이 있듯 시간대에 따라 주어지는 식단에도 큰 차이를 보이곤 했다.
거기다 이들은 어쨌든 몸을 굴리는 이들이니, 그런 점이 더욱 배려됐는지도.
배식을 담당하는 인력들은 무려 왕성 내에 자리한 궁정 요리사, 조리사들이었는데, 왕족이며 궁정에 자리 잡은 신하, 고위 귀족들을 담당하는 이들이 있다 치면, 왕성 내에 근무는 하되 속하지 않은 이들이라거나 계급이 그 와중에 낮은 이들을 담당하는 이들, 속칭 2군에 해당하는 궁정 조리사, 요리사의 손맛을 직접 만끽하는 이들에 속하는 부류가 흑성 기사단원들에 해당했다.
그 외에 흑성 기사단 말고도, 여러 기사며 신하며 온갖 이들이 배식을 받고 배를 채워대곤 했는데 그들이 한 곳에 다 모이면 배식이며 배급 공간이 남아나질 않기에, 일부는 식사 내용물을 일일이 수레에 실어 가져와 훈련장에까지 가져오는 방식을 채택했다.
참고로 양이 엄청나기에 수레 크기도 상당했는데, 그걸 고작 두 사람이 가져오라 하니, 이 문제는 항상 기사단 내에서도 내기 감으로 자주 활용되는 듯 보였다.
어차피 먹는 입이 짧기에 에드릭은 적당히만 먹고자 했는데 맛이 비교적 좋아 평소보다 조금 많이 먹고야 말았다.
“보통 이런 모임 뒤에는 높으신 분들끼리 따로 모임을 꾸려 식사라는 명목으로 회의며 각종 문제를 논의하고, 담소를 나눈다거나 하는 걸로 알았는데, 의외입니다.”
또 다른 기사단원이 이젠 귀하신 몸이 된 에드릭이 사뭇 신기하다는 듯 말을 걸어왔는데, 에드릭은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가벼이 첫 단추를 꿰맸다.
“내가 진득하게 여기 달라붙어서 고고한 탑 속의 공주님처럼 처박혀만 있을 거라면, 궁정 신하들 정도만 상대하는 게 고작이겠지. 애초에 부군이 된다 쳐도 난 가급적 귀족 나부랭이며 권력에 코 박아대는 돼지 같은 것들은 상대 안 한다고 저번에 슬쩍 언급하지 않았던가?”
“아, 그렇게 들었던 기억은 나지만….”
말은 그렇게 한다 쳐도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로 느끼는 걸 보면, 이것들도 높으신 분들이 흔히 해대는 흰소리, 헛소리에 제법 익숙해져 있나 보다.
‘말을 내뱉어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어겨대는 족속들이니까.’
이익과 이점이 중요한 거지, 그깟 별거 아닌 말은, 약조며 약속… 더욱이 계약이 아닌 한 우스갯소리로 떠넘기면 그만 아니겠나.
“그런데 이러면 반대로 기사며 전사들하고 친분 다진답시고 다른 의미로 견제받으실지도 모르잖습니까?”
“오?”
기특한 소리를 해대네?
“그 반대지.”
“반대…?”
“너희들한테 다른 의미로 찝쩍대는 애들이 늘어날 수 있겠지.”
에드릭 자신은 사실 별거 없다 봐도 무방한 상태 아니겠나.
애초에 에드릭은 호가호위, 즉 부군으로서 카일론 왕가에 합류했다는 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다. 에드릭 본인이 지닌 가치며 능력, 그 외에 부가적인 것들이 에드릭의 영향력과 권력을 형성하는 건데, 이건 왕가 측에 합류했다 하여 가치가 상승했으면 상승했지, 추락할 일은 아니란 말씀.
그러기에 작정하고 에드릭으 파벌이며 일부 인사들을 끌어 모아 모임을 가지는 것만으로, 주변 것들은 이목을 집중 시키며 긴장할 수밖에.
패왕녀에게 힘을 실어주면 그 자체로 골치 아프고, 패왕녀와 맞서면 그건 또 그 자체로 번거로워지고.
…애초에 부부인 주제 뭘 그리 견제하고 경계하고 그래야하는지 원. 그럴 거면 결혼을 안 하고 말지.
태생적으로 그렇게 살아온 부류들, 그런 놈들은 어떨지 몰라도 에드릭으로선 이러한 관계는 영…….
“그리고 앞서 내가 한 말이 있기 때문에라도, 나는 안면 익히고 인사를 나누는 정도면 어떨까 싶지만, 내 쪽에서 누구들에게 접근해 관계를 이어가고 어쩌고 하는 건 가급적 삼가려 하거든. 권력 놀음은 자기들끼리 열심히 하라 하고. 어차피 나 말고 부군들은 많잖아?”
“그야… 그렇죠. 사실 대단히 의외라면 의외고… 왕녀 전하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다들 그렇게 놀란 눈치들도 아니고….”
그나저나 먹으면서 꾸역꾸역 말들은 잘 거네.
먹을 땐 원래 입 다물고 얌전히 먹는 거에 집중하는 게 예의 아닌가?
먹으면서 대화를 나눠대는 인싸 특유의 뭐시기는… 개인적으로 고독한 미식가 컨셉을 추구하는 에드릭 입장에선 영… 못마땅한 문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럴 커면 티타임을 가지고 말지.’
그건 애초에 대화며 담소 나누는 목적이니 별 거부감도 없고, 오히려 반겼으면 반겼지 꺼려 할 이유도 없고.
차를 술로 대체한다 쳐도, 뭐 그것도 이해는 된다.
술을 안 퍼마시면 도무지 입을 안 여는 괴이한 족속들이 있다 보니, 세상 살려면 이건 별수 없다고 할까.
“식사 뒤 다시 왕녀 전하를 찾으실 예정이신지요?”
“시간 낭비가 안 된다면 그럴까 싶은데….”
과연 어떨지.
애초에 약조를 따로 해둔 것도 아니기에 혹여 발견해서 만남을 주선한다 쳐도, 그녀 측에서 그럴 짬이 날지도 의문이고.
거기다 하필 오늘이다.
‘나 말고도 얼굴 보고 이런저런 소리하려 밀려드는 애들이 적지 않겠지.’
그 때문에 일부러 종적을 은닉했다 쳐도, 여기선 그러려니 해야지 뭐 어쩌겠나.
부군 후보들도 각자 생각이 있으니 자기들 정보통을 바탕으로 의견을 추릴 텐데, 그런다 한들 선택지는 거기서 거기랄까.
‘투자한 게 많으니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거지.’
흔히 도박에 빠지는 케이스로 본전만 찾자가 있는데, 부군이 되기 위해 시간과 노력, 체면이며 자본이며 온갖 것들을 쏟아 오랜 시간 여기에 묶여 있었는데, 졸지에 이걸 포기한다? 쏟아부은 게 아까워서라도 그러긴 힘들겠지.
비즈니스에서도 이러한 심리를 이용해 기왕 온 거, 한 번 맛본 김에… 하는 맥락으로 이것저것 제품이며 서비스를 구매하고 이용케 만드는데, 큰 맥락으로 보면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봐도 무방할 거다.
애초에 부군이 아닌 상태로 자기들 나라로 돌아간 거 자체가 그들로서는 불명예가 될 테고,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었다고 밝히는 거 자체가 변명 아닌 변명이 될 텐데, 과연 이런 걸 불 보듯 뻔히 아는 것들이 그런 수모를 자처하고 gg 치고 돌아간다는 것도 웃긴 일이지.
차라리 레오란 그 양반처럼 속 시원하게 다 내려놔 버리면 모르겠지만.
‘그리고 선택지에 따라 카일론이 취할 포지션도 무시 못 할 테고.’
부군의 자격을 부가했더니 거절하고 튀었다? 이런 수모가 어디 있는가?! 하고 몰아붙이면… 솔직히 카일론 쪽이 괜한 걸 명분 삼아 해코지한다고 난리 쳐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쨌든 현재 알그리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당대 강국이 카일론이다.
당장 왕이 날아가도 후계인 패왕녀는 철왕보다 더 패도적인 인물로 각광 받고 있는 판인데, 이래선 암살을 한다 치면 왕과 왕녀 모두를 작살 내야 하는 판인데, 그게 가당키나 하겠나.
“머리 아픈 건 다른 놈들이지, 나하곤 관계없으니까.”
“…나름 이제 얼굴 자주 보게 될 분들이신데 엄청 신랄하시네요.”
“내가 왕태녀 전하의 남편으로 왔지, 다른 사람하고 친분 다지려고 여기 온 건 아니잖아?”
“그걸 시원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부터 비범하단 거겠죠.”
“그래서 사람이 돈이며 힘이며, 가질 수 있는 건 전부 보유해둬야 남한테 끌려다니거나, 목줄 잡혀 살지 않는 법이지. 노예가 노예 취급받는 이유가 뭐냐? 자신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잖냐?”
“이렇게 보면 엄청 냉정한 듯도 보이는데, 정작 노예를 다룬다거나, 그쪽하곤 연관이 없는 걸로 유명하신데도 그런 견해를 보일 수가 있는 거군요.”
“세상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거니까. 쓰레기가 있어야, 오물이며 악취가 풍겨대야 신선한 공기의 소중함을 아는 법이지. 거기다 내가 쓰레기 짓 안 해도, 어차피 쓰레기 짓 할 놈들 넘쳐나는데, 나도 거기에 한발 담글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도 잘 사는 판에.”
“…그런 점을 정의롭다고 하는 걸까요. 말은 그렇게 하셔도, 정작 행동 자체만 보면 언제나 모범을 보이면서, 다른 방만하거나 나태하고, 오만한 귀족들에 비해선 무척….”
“좋게 봐주는 건 고마운데, 그렇다고 나중에 동상 세우고 거기다 기도하고 그러진 말고.”
“하하하하!”
배를 다 채우니 생각 외로 마음이 편해지긴 했다.
…그래봤자 불편함이 해소된 정도에 불과했지만.
자, 그래서… 이 다음엔 뭘 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