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84. 이건 몰랐겠지!
해가 뜨기 전까지 줄곧 이어질 거라 예측한 것과 달리, 상황은 빠르게 진전됐다.
“흐음….”
프리지아는 중간에 일 문제로 나간 모양이고, 덕분에 데이시아하고 한 침대에 머물긴 했지만, 고이 잠든 터라 건드리기가 조금 그랬다.
마이기신은 조금 부족한 감이 있어 보였지만, 얌전히 뱃속에 정액을 품기로 한 모양인지라 건드리기 조금 그랬고.
…뭐 사정 봐주지 않고 한다 쳐도 미움받을 일은 없겠지만… 시기가 그때만 있는 것도 아니기에 에드릭은 대충 여유를 보이기로 결정.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옆에 미녀를 끌어안고 잠드는 건 내심 좋아하기도 하니.
사실 섹스를 안 한다 쳐도 그건 또 추구하게 된다고 할까. 새삼 성욕 해소보다 서러운 게 옆구리 시린 거라 하는데, 몰랐을 때야 그러려니 하지만 알게 된 직후론 이에 대한 허전함, 결핍 증세가 훨씬 심각해진 기분이 든다.
그런데 혈기왕성한 사내며 여성인 이상, 그런 식으로 맞닿고 있으면 아무래도… 그렇지?
외부는 어제 늦은 오후, 저녁 이후까지 한창 달아오른 덕에 정작 날이 밝은 직후는 조금 허전한 감이 있었다.
사실상 지금쯤 돼서야 다들 혼절하듯 퍼 자고 있을 테니.
고대며 중세며 그 이전은 사실 즐길 거리라는 게 한정됐기에 결국 남녀 관계가 주력 콘텐츠인데, 그럼에도 인구수가 근현대에 비해 적은 건, 종합적인 문제가 온갖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쟁, 기아, 병 질환, 자연재해 혹은 인재(人災)까지.
문명이라는 건 치수의 역사라 하는데, 결국 물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인간 문명은 농경을 가까이함으로써 그러한 의존 요소가 더욱 극심해졌다.
그러기에 이게 거침없이 불어나거나, 넘치면 답도 없는 거고.
대도시의 면면을 보면, 이곳 카일론 수도처럼…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영국 런던이나 여타 곳 마냥 중앙 부근에 대놓고 물길이 터 있는 예가 적지 않다.
대표적 예가 그렇다 뿐 찾아보면 그와 유사하거나 비슷한 면이 대부분이다.
…라고 무작정 단정 짓기 애매한 건, 이쪽 세상은 마법이니 뭔가 이상한 것들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별의별 것들 때문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당면한 한계며 제한도, 의외로 그러려니 하고 있다고 할까.
…애초에 정령술이랍시고 물을 생성하는 거 자체가 이미 물리 법칙이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긴 하지.
“…….”
이딴 걸 왜 생각하고 있는 거지?
한산한 거리를 보니 괜히 사색 같은 걸 하게 된다.
에드릭이야 원래 술 한 잔에 간단히 하나둘 배 채울 정도의 음식만 바랬는데, 왕께옵서 통 크게(다분 위신이며 자존심 문제 때문에) 술과 음식을 과하게 푼 덕에, 여러모로 간간이 마주하는 백성들의 반응은 잘~ 놀았다! 하는 반응들이었다.
거기다.
“어머! 혹시….”
“와아! 어제 덕분에 재미 좀 봤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거 어떻게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
예전에도 적지 않았는데, 알아보는 이들이 더 늘고야 말았다.
‘…그래도.’
현대처럼 일일이 눈에 띄기 무섭게 사진 찍히고 SNS에 올라가진 않을 테니 그 점은 상관이 없다만.
“그나저나.”
학술대회인가.
책은 안 들춰도 스마트폰으로 기반 정보는 꾸준히 탐독한 덕에 내심 지식이 얕다고 볼 순 없을 테지만.
‘과연 여기 나가는 게 득이 되는 일일지.’
어설피 나가 망신 당할 상황이 오는 것도 껄끄럽지만, 망신살 안 뻗히는 선에서 자연스레 물러서는 건, 내심 더 어려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마법사며 학자들하고 이런 걸 논하는 거 자체가 무의미한데.’
나중에 그런 지식인층, 특권층이랍시고 선민 사상에 빠진 것들에게 무시 안 당하고 그럭저럭 언변이며 발언이 먹히게 하려면, 여기서 사전에 어느 정도 이미지를 굳혀둘 필요는 있겠지만….
‘귀찮아.’
카일론이란 나라에서 구태여 그런 이지적인 인상을 타이틀처럼 새겨둘 필요가 과연 있을까?
마법이 활발하다곤 하나 그건 신학의 영향력이 적고, 이를 대신하는 입장이라 그런 거지, 이를 막연히 좋게 해석하기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왕녀님은 기사며 전사들한텐 적극 지지를 받는 한편, 왕은 마법사들, 신비주의자들의 지지를 독점하다시피 한다던데.’
재수 없으면 다른 의미로 귀찮고도 위험천만한 독박을 쓰게 될지도.
철왕 본인은 마법사도 아니면서 마법사 인맥을 공고히 다진 건, 그의 실용적인 정책 및 사상관 때문이리라.
안 되면 기도하기보단 방도를 찾고, 모르면 기도하기 전에 방도를 만들어낸다.
…아마 그의 인생이 그러했기에 그런 걸지도.
그리고 그의 그런 내용물을 그대로 흡수한 예가 패왕녀이나, 그녀는 도리어 기사들의 귀감이자 모범이 되고 있다.
근데 그러다 눈먼 칼이나 화살, 마법 등에 죽으면 어쩌려고….
왕이며 귀족, 리더가 사실 앞장서서 나선다는 건 어마어마한 부담일 수밖에 없다.
가진 게 많고 누릴 게 썩어나는데 미쳤다고 개죽음을 자처할까.
그러기에 잘나신 분이 자기들처럼 앞장서서 뛰어가는 것에, 백성들은 감동하고 마는 거지만.
…사실 당연한 건데.
그러나 냉병기가 난리법석일 땐 그나마 그렇다 쳐도, 총기며 대포 등이 남발된 시기엔 그런 낭만조차 죽어버렸다.
잘난 기사 나으리도 총알 한 방이면 스틱스강을 건너는 데는 예외가 없는 셈이니.
“흐음.”
그 놈의 마법 때문에 그러한 발전이 조금 더딘 듯 보이나, 결국 시간이 흘러 누군가는 그걸 발견하고, 개발하고, 발명할 터.
어차피 이 모든 건 시간 문제.
“응?”
그나저나.
기분 탓인가? 뭔가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이는데.
얼굴뿐이겠냐.
저 터질 듯한 가슴을 가린 검은색 천쪼가리.
그 위로 새하얀 피부와 은발.
그러기에 더욱 돋보이는 분홍 입술과, 마성에 가까운 자수정 빛을 뿜는 두 눈이 무척이나 요사스럽게 느껴지나… 정작 악의 없는 그 표정은 무덤덤. 담백함 그 자체였다.
특유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저 표정 속에도 각별한 반응을 알아볼 수 있단 거 자체가, 단순히 그녀와 함께 쌓아온 시간 때문만은 아닐 거다.
눈만 살짝 반짝여 이쪽을 발견하곤 반가움을 은연중 남모르게 드러내는 듯한 그 태도는, 역시나 사랑스러웠다.
“언제… 오셨어요?”
말이 들릴 위치까지 접근한 뒤에야 비로소, 에드릭은 무심코 당혹스러움과 반가움을 반반 표출한 상태로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붙들며 물었다.
피부가 민감한 그녀는 벌써 그 감촉만으로 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물론 티 안 나게. 그러나 만지는 이한텐 분명하게 그 느낌이 전달될 정도로.
“……방금.”
차분하게, 그녀는 여전히 무덤덤하게 응답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열의는 확실하게 실감했다.
반가움을 행동으로 표현하려는 양 마주 잡은 손을 꾹 붙드는 것으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반가움을 대신 피력해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나이를 먹든 어쨌든, 이런 마이페이스는 여전하시구먼.
아르세이유에 들렸을 당시 본 거 이후라 쳐도, 제법 오랜만이긴 했다.
“마법사들 많이 몰리고 있는 만큼, 역시 그 때문인가요?”
“응.”
고개만 지긋이 끄덕이며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응답하는 그녀, 에우리에였다.
그 순간.
“일단 언니, 브룸헨달 학파 대표로 온 거잖아?”
뒤따라온 건 아니지만, 타이밍 좋게 불쑥 등장한 프리지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넌 일 때문에 어디 간 거 아니었어?”
에드릭이 지레짐작해 묻자.
“이것도 일이잖아?”
라고 태연히 답하는 프리지아.
이른 오전, 새하얗게 내리쬐는 햇살 속에 그녀의 솜사탕을 연상하게 하는 유전적인 머리카락은, 더욱 몽환적인 빛깔을 내고 있었는데, 옆에 자리한 에우리에의 은발이란 특이 요소가 포함되니 둘만으로 주변이 무척이나 신비스럽게 변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보면 역시, 둘 다 그림 같이 예쁘단 말이지.
물론 에우리에의 미모가 압권인 건 사실이지만, 나름 매력적으로 성장한 프리지아도 결코 무시할 만큼은 아니었다.
…애초에 상인이란 건 반쯤은 매력으로 가치를 띄우는 직종이다 보니, 아예 매력 포인트가 태생적으로 덜 떨어지는 경우가 아닌 한, 가꿀 수 있는 최선을 준비하는 거야 당연한 거라 쳐도….
“길 안내 안 해도 곧장 순간 이동하면 되지 않나? 좌표나 정거장들은 다 알 거 아냐?”
“마법사가 아무렇지 않게 들락거리는 시기엔 보통 이동 마법 못 쓰게 방지 방벽 쳐버리잖아. 그러다 언제 첩자며 이상한 녀석들 올지도 모르는데.”
“그런가?”
“그래서 왕도에서 떨어진 부근에 마련된 임시 좌표까진 마법으로 이동하고, 이후론 각자 알아서 오는 거지. 말을 타든, 날아오든, 마차 뒤에 죽치고 있든, 걸어오든 뛰든.”
에드릭은 막힘 없이 이야기하는 프리지아가 조금 신기해 물었다.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나도 몰랐는데.”
“…자랑이네요.”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우리에가 한마디 거들었다.
“…둘은 많이 친한 거 같아서 보기 좋아.”
“…….”
“하하하.”
그저 웃지요.
담백하게, 조금은 건조하게.
부인하는 것도, 긍정하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웃음을.
그러던 중, 에우리에가 에드릭의 머리 부근에다 코를 킁킁거리더니.
“냄새나.”
“…무슨 냄새요.”
생각해보니 나오기 전에 몸을 안 헹궜네?
실수겠거니 싶었는데, 정작 걱정한 것과는 별개의 내용이 에우리에 입을 거쳐 튀어나왔다.
“여자 냄새.”
“…….”
“오밤중에 뒹굴었으니 안 날 수가 있나.”
프리지아가 실실대며 비꼬는 건지 꼰지르는 건지 모를 태도로 혀를 삐죽 내밀었다.
“좋았어?”
“…….”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데, 비유하자면 잔칫날 자신만 왜 안 데려갔냐며 타박하고 투정 부리는 누나가 있으면 이럴까 싶은 태도인데, 참 신기한 노릇일세….
그게 뭔가 낯간지러우면서도, 편하게 느껴져 무심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이런 것도 좋네.
하렘이면서 막 질투심에 빠져 바가지 박박 긁는 여자도 매력적이지만….
‘이런 엉뚱함도 뭐….’
나쁘진 않네.
그럭저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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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라는 건 일종에 학문 공유, 토론의 장이다.
동시에 이것은 카일론 내에서 행해지는 몇몇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 및 개선점 제시, 그 외에도 국왕 주도 하에 일부 정책에 대한 효율, 실리, 타당성, 필요 유무를 논하는 토론의 각축장이기도 했다.
마법사들이 여기에 많이 참가하는 이유는, 마법 이론 등을 발표하는 장소기도 하나, 그거 외에도 중립적인 지대에서 각 마법 학계, 학파들 간의 이론 대립, 토론 등을 합법적이며 정당한 방식으로, 중립인의 중재 하에 이를 이루어가기 위함인데, 시작이 그러했다면 현재는 그걸 포함해 무수한 학자, 귀족, 문객 등이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는 동시에, 자기 입으로 존재감을 PR을 할 수 거의 몇 안 되는 공식적인 전장이라 봐도 무방할 거다.
사실상 무도 대회가 무인들의 독무대라면, 무인 이외에 궁정이며 왕국에 등요되거나, 여타 귀족들의 눈길에 들고, 명성을 쌓기 위한 공식 석상이라고 할 게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한 만큼,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많은 문객들, 학자에 신학자들조차도 일부 무신자들의 나라에까지 발을 들이는 수고를 감수하며 이곳에 발을 내딛기에 이른다.
누구는 등용되기 위해, 누구는 명성을 쌓기 위해, 누구는 투자를 받거나 이권 확대 및 확충을 위해.
다들 각자의 목적을 안고 자신의 학식과 지식, 지혜, 그리고 웅변을 뽐내는 곳이 바로 이곳.
……그런 의미에서 에드릭하고는 영 맞지 않은 공간이기도 했다.
‘공적인 일이라면야 그러려니 하지만.’
굳이… 자진해서 발 딛기엔….
당연하지만 마법 이론이나 관련 학술 토론에 대해선 두손 두발 들 수밖에.
애초에 자신의 분야도 아닌데 나댔다가 평생 거기에 일신한 전문가한테 개털리면 그건 또 무슨 망신인가.
아니, 안 털린다 쳐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평생 거기에 파묻혔다는 건, 그만큼 외곬구에 자존심도 어마어마할 텐데, 뭣 모르는 놈한테 모욕당하고 휘둘렸다는 걸로 앙심 품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원래 이런 쪽에 있는 인간들이 더 속이 좁고, 편협하기 마련.
학식이 높다고 인격이 도야(陶冶) 되거나, 바르길 기대하는 거야말로 난센스. 말 그대로 그걸 잘하고, 그 분야를 잘 아는 거지, 다른 것까지 기대한다는 건 영 곤란할 따름.
…아닌 이들도 있겠지만, 그걸 기대하는 것도 멍청한 일이고.
원래 높으신 분들이 꼰대가 되는 건 다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거고, 에드릭은 그 점을 굳이 뭐라 하고 싶진 않았다.
원래 세상이란 이권을 지니고, 독점하고, 누리는 이들과 아닌 이들은, 뭘 어떻게 해도 대립하고 맞설 수밖에 없는 흐름이니.
나이 든 자와 젊은 이.
부호와 가난뱅이.
힘이 센 장사와 연약한 이.
두뇌 회전이 빠른 자와 눈치도 늦고 머리도 둔한 둔탱이.
화합, 통합. 그래, 말은 참 좋지.
그런데 대다수가 그걸 원해도 일부 힘 있는 이가 깽판 치면 다 같이 흙탕물로 빠져드는 게 바로 사회고, 국가며, 문명이란 거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소크라테스가 아낀 제자로도 유명한 알키비아데스의 트롤 짓 덕에 확실한 발단이 돼 펼쳐졌는데, 전쟁 과정조차 심지어 아테네 측이 말아먹게 유도하고 망명까지 한 걸 보면, 어지간히 가관이었어야지.
그리고 20세기, 패전한 독일의 경우도, 1차 대전 패한 직후 혼란에 빠진 시점에 서로 난장판 펼치다 결국 히틀러에게 정권을 고스란히 내주고 나치가 완전히 자리 잡아 2차 세계 대전으로까지 이어진 예처럼.
…찾아보면 이런 예가 뭐 한둘인가.
자기 업적 좀 늘리겠다고 이곳저곳 침략해댄 왕이며 군주들 문제까지 논하면 동서양 비교 언급 자체가 무의미해질 거다.
한 사람이 어쩌고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염원, 열망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냐 싶지만, 시위며 폭동에 본격적인 불씨를 붙이는 건, 의외로 단 한 발의 총성이다.
…뭐, 그쯤 되면 사실상 의미가 없다 쳐도 할 말은 없지만.
그런 식으로 반쯤 몰입하다 딴청에 내용들이 지지부진해지면 딴청 좀 피우고….
“좋습니다. 이것으로 이틀간 이어온 대마법 계층 간 이동 수립에 대한 표준 명칭 설정 교류 건에 대한 것은, 다들 들은 내용을 토대로 정리해 학술대회 기간 내에 정리 발표하는 걸로 결론이 나온 것으로 여기겠소. 그 외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