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화 〉82. 대회 뒤풀이 겸… 그렇고 그런?
보통 대회 결승하면 시작부터 이런저런 명목으로 왕이며 높으신 분들이 대거 등장해 자기 잘난 척들 해대며 다시금 일장연설을 통해 권위를 확인받는 등.
마치 우리 세계의 개념 없는 정치인들이 이곳저곳 온갖 행사에 참가해 인지도를 넓히고자 유세 떠는 마냥 뭔가를 분주히 해대기 마련인데… 여긴 반대로 대회가 다 끝난 직후에서야 모습을 드러내더니 치하의 말이랍시고 몇 마디 하더니, 곧장 대회 메달 및 우승 트로피 등을 전달하는 통에, 에드릭은 그 담백함에 자못 놀라고야 말았다.
‘말은 들었지만….’
사실상 3,4위전, 그 다음 벌어진 결승전 외엔 별거 없는데도 관중들이 이리도 많이 몰려든 건, 다분 결승에 대한 기대감, 흥미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다.
따지고 보니 이 정도로 두문불출하는 왕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대회 참가자, 본선에 진출해 다시금 수위에 들어 원활한 성적을 뽐낸 이들은, 다시금 모두 이곳 경기장 쪽으로 불린 상황이었다.
난장판이 된 경기장은 마법사들에 의해 금세 보수된 상태라 멀쩡해진 상태로 왕을 맞이했으며, 왕은 자기 수하들로 하여금 각 참가자들에게 건넬 메달과 트로피, 꽃, 대놓고 입구가 풀린 은화, 금화 자루 등을 든 채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게 참 진풍경이 따로 없었다.
어쨌든 순위가 제일 낮은, 16강에 든 직후부턴 전부 매달 및 부가 상품 등을 우수, 장려, 참가상 명목으로 전달받는 터라, 그 자체만으로도 몇몇 이들에겐 상당한 의미가 있을지도.
무엇보다 왕의 눈에 들었다는 거 하나, 비록 왕이 자신을 어찌 생각할지 의문이지만, 눈도장 찍은 게 어딘가 하며 황송해하고 있을 이들이 한둘은 아니었을 거다.
에드릭이야 애초에 왕이란 게 없는 시대에 태어나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 상태로 살아왔기에 거기에 휘둘리는 경향이 적겠지만, 이곳 시대는 왕이란 하늘, 신이 내린 존재로 막연히 맹신하며 선망하는 그런 경향이 짙기에, 실제로도 카일론의 철왕의 등장은 그들에게 대회에 참가해 피튀기는 일전을 불사하는 거 이상의 긴장감을 불러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
아, 집에 가고 싶다.
어쨌든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최후에 와서야 철왕과 마주하게 된 에드릭은, 예법에 맞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땠나? 재미는 있었나?”
“…지루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일전에 패왕녀와 함께 독대했을 당시 보였던 그 매서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금의 철왕은, 철저하게 선량하면서도 위엄 넘치는 왕의 그것은 적절히 연기해대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동네 할아버지, 아저씨 꼴 날 수도 있는데, 묘하게 그런 느낌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무도회, 사교회에 얼굴을 내비쳤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듯하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위엄이 넘친다고 할까.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품이 흘러넘치는데….
‘아주 세세하게,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 이 말인가.’
그것도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착각하는 선이 아니라 철저하게 타인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핀다는 전제로, 어떤 식으로 내비쳐야 어떻게 느끼며 실감할지, 이를 철저하게 계산해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철왕의 철두철미한 자기 제어, 관리법의 위대함을… 과연 몇이나 꿰뚫어 볼지는….
“그리고 알다시피, 대회 우승자에겐 짐이 직접 청을 하나 들어주고자 하는 관례가 있지. 알고 있었나?”
“소문으론 접해봤습니다.”
“그래? 하면 생각해둔 바는 있는가?”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만, 나중을 기약해서 물려도 되겠는지요?”
“허허!”
에드릭의 터무니없는 요청에 이를 지켜보던 무수한 관중들이며, 왕의 시중을 들며 보좌하는 수행원들, 호위 인원들마저 어이가 없는지 에드릭을 향해 적대적인 시선을 쏘아댔다.
그리고 대회 참가자들조차 한쪽 무릎을 수그린 채, 에드릭의 저 당돌한 요청을 듣곤 놀라긴 매한가지. 저런 제정신 아닌 정신 세계를 갖추고 있어야 저런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닐 수 있는 건가?
본의는 아니지만 에드릭의 패기로움에 다들 감탄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아니 된다. 그 청을 들어주는 것조차 이 대회의 과정, 그 일환이거늘, 그리 싱겁게 끝을 보아서야 이를 지켜보던 이들을 포함하여, 이 열기에 몸을 불사른 관계자들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 비추어지겠는가?”
“흐음….”
말은 그럴싸하게 했지만, 결론은 시끄럽고 지금 말해라. 그래야 헛소리 안 할 테니. 라는 식으로 들렸다.
뭐, 그렇다면야….
“그럼 별거 없으니 바로 말씀드리죠. 제 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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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풀이 차원에서 남정네들 손에 끌려올 뻔한 걸 간신히 빠져나온 에드릭.
특히 같은 부군 경선 후보인 레오란은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을 차석으로 끌어 내려버린 에드릭을 어떻게 해서든 뒤풀이, 술자리에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썼지만, 에드릭은 존재하지도 않는 선약까지 들먹여가며, 애써 그 불편한 권유로부터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본의 아니게 형성하게 된 뒤풀이 그룹 인원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역시 내가 눈여겨본 사내로다!”
“…팔자 좋아. 끝나기 무섭게 여자들 끌어들이고 말이야. 누가 성욕 마신 아니랄까 봐.”
처음은 데이시아. 두 번째는 마이기신. 그리고 세 번째로 비꼬며 핀잔을 준 건 프리지아.
“…….”
왜지? 어쩌다가 이런 팀이 형성된 거지?
거기다 분주한 게 싫어 조금 조용한 곳으로 가고자 해서 현재는 사실상 네 사람… 아니 사람 셋에 엘프 하나가 방 하나를 독점한 채 술과 음료, 온갖 음식들을 펼쳐둔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셈인데….
“그건 그렇고 소원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셔서 되겠습니까?”
데이시아의 조금 안타깝다는 물음에 마이기신이 길쭉한 귀를 쫑긋거리며 목청을 드높여 에드릭의 선택을 비호(庇護)했다.
“왜 아니 되나? 통쾌하지 않나! 모름지기 무리의 지도자는 자신의 자식, 부하, 동료들로 하여금 하나라도 더 베풀어야 마땅한 거지! 은혜를 내리지 않는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적절했다! 이 정도로 많은 인원들의 배를 불릴 제안을 내놓다니! 이것이 그대의 그릇이로구나!”
“…잘난 척 한 번 하고 손해 보는 장사를 해대니, 팔자 참 좋아.”
막판에 프리지아가 찬물을 끼얹듯 비꼬아댔지만, 에드릭은 뭘 모르네,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데? 장사로 치면 이보다 이득되는 게 있을까 싶기도 하고.”
“…뭔 소리야?”
“??”
“호오, 그건 또 흥미가 돋는구나!”
여성 셋이 궁금하다는 듯, 빨리 말하라는 양 눈을 반짝이는 통에, 에드릭도 별수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선 오늘 일로 인해 내 이름은 카일론 내에서 확실하게 퍼져 나갈 테지.”
“……?”
“무슨 소리?”
“넌 이미 유명 인사라 모를 인간이 없을 거 같은데.”
셋은 아무래도 에드릭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는 것처럼 보였다.
“프리지아.”
“왜?”
“너 알헤디나가 누구인지 아냐?”
“알헤디나? 들어는 본 거 같은데….”
“참고로 알헤디나는 내게 가호를 준, 사실상 저쪽 대륙의 신적 존재다. 수호신, 점령신, 고대신으로도 불리지.”
“……??”
프리지아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 저는 들어봤습니다.”
이때, 데이시아가 한몫 거들었다.
“개척 군주, 에드릭 코넬의 배후자, 후원하는 초월자라는 식으로 소문이 나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는지요?”
…왜 나도 모르는 소문을 그녀가 알고 있는 걸까.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봐봐. 그 신적 존재도 관심이 없으면 모른다니까.”
그보다….
“너 내 소문 따로 긁어모은 적이 없나 보구나?”
“…어차피 얼굴 볼 거면서 일일이 뭔 소문? 할 일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쓸데없는 걸 왜 사서 모아? 어차피 너 유명한 건 아르세이유 당시에도 이미 독보적이었는데.”
“…….”
그런가? 나름 노력한 보람이 있네, 하고 이건 자화자찬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내가 아무리 잘 났든 못 났든, 평범한 이들로선 내 존재가 솔직히 알 바가 아니라는 거지. 관심이 있다 쳐도 한두 번 듣는 정도고, 내가 뭐하는 존재며, 그들에게 득이 되고, 호감이 가고,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지 말지도… 그들로선 사실 알 바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이곳 카일론 수도 내에서 네 이름 널리 알렸다, 이게 중요하다 이거야?”
“…그러고 보니.”
이때 데이시아가 다시금 개입했다.
“…아까 마이기신 님 말씀처럼, 무리의 지도자가 자신의 자식, 부하, 동료들로 하여금 하나라도 더 베풀어야 마땅한 거라 하셨죠?”
“암, 그건 필수적인 요소지. 자기 잇속만 챙기는 탐욕스러운 지도자는, 본인이 비할 데 없이 막강하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력하지 않은 한,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하긴 어려우니. 공포와 함께 사리에 맞게 은혜를 베푼다. 권위와 위엄, 그리고 은혜는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에게 있어선 무엇 하나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요소다.”
“…부군 후보들이 여럿 계시다지만, 에드릭 님은 이번 요청을 통해 모두에게 강렬하면서도, 가볍게나마 좋은 인상을 남기셨을 걸로 보입니다.”
“…아니 고작 술하고 고기 좀 돌린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으음?”
프리지아가 뭔가 떠올랐는지, 잠시동안 입을 굳게 다문 채 고민에 빠져들었다.
에드릭이 철왕에게 요청한 건 실로 간단했다.
[제 우승 기념으로 다들 술 한 잔, 배를 채우게끔 먹거리라도 대접하고 싶군요. 술 못 먹는 아이들은 우유든 음료라도.]
애초에 이런 걸 예상 못 한 건지, 철왕조차 잠시간 말을 못 잇다 파안대소하며, 이를 허락하며, 수도에 머무는 모든 이들에게 대출혈 서비스 마냥 하루 동안 음식과 술을 제공하기로 한 터라 이를 지켜보던 관중들도 다 같이 환호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를 중계로 지켜보던 외부의 백성들도 이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곤 덩달아 만세를 불렀다는데….
이때, 프리지아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네 인지도, 유명세가 퍼져가며 또 인기가 개선된다는 건… 사업적이로든 네 부군 경선 문제로든 간에, 어느 쪽으로도 나쁠 건 없다 이거네?”
“…의외네. 거기까지 본 거냐?”
에드릭은 조금 감탄했다.
단순히 돈을 천문학적으로 주세요! 직위를 주세요!
이게 여전히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터.
혹은 땅을 달라고 하던가, 그 외에도 실질적으로 실리를 추구할 요청은 수도 없이 많을 터.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지.’
그래도 되지만, 그러면 또 손해다.
이건 에드릭이 짊어진 위명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는 일.
이렇게 보면 에드릭으로선 선택지가 얼마 없었을지도.
그렇다고 어중간한 요청을 하면 그 자체로 형성돼 있던 이미지들이 추락하거나 격하될 여지도 다분했고.
이미 벌 만큼 번 놈이 돈을?
개척 군주나 되는 놈이 고작 직위를?
역시 아무리 잘난 놈도 결국 땅 욕심은 별수 없나 보구나!
쩨쩨하게 저런 걸 고작…!
급에 안 맞는 선택을 하는 걸 보아하니, 역시 태생적 한계, 핏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로군!
……그 외에도 까기도 작정하며 아주 바리에이션이 넘쳐나는 터라, 솔직히 에드릭은 이거 떠올리기도 무척 귀찮았었다.
…아니 순순히 소원 비는 게 이리도 번거로운 게 말이 돼?
내심 억울하기까지.
…대회 우승도 안 한 놈이 김칫국 거하게 들이킨다 싶겠지만, 어쨌든 대책은 세워둬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이런 걸 일일이 떠올리던 에드릭은, 그 귀찮음에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나 대신 이런 거 알아서 생각하고 대책 세워주는 놈이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바로 참모진, 책사의 존재.
애초에 에드릭 본인이 그쪽 성향이긴 하나, 그거하고 이건 좀 별개의 문제기도 했고.
에드릭 자신은 굳이, 스스로가 똑똑하다 생각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모자라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은 정도가 고작.
어쨌든….
“이걸로 내가 부군이 되든 안 되든, 내 이미지는 안정적으로 떡상… 아니, 좋은 방향으로 퍼져갈 거란 말이지.”
“아하….”
“떡상? 그건 뭘 뜻하는 이국어인가?”
“하여간 잔머리는 예나 지금이나.”
…본의 아니게 여성들 앞에서 뭔가 잘난 척한 것 같지만, 그래도 악의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포장하거나, 거짓으로 자신을 꾸민 건 아니기에, 에드릭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