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54. 패왕녀.
에드릭이 판단컨대, 알브레시아스의 음성은 의도적으로 위엄을 담고자 목청을 굵게 해 발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특유의 섬세한 울림이, 부드러워 보이는 태생적 분위기와는 무척 상반되는, 이목을 사로잡는 강렬함이 동반됐다.
철저하게 연습해 적용 시킨 건지,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나날이 단련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엔 이질감 같은 건 어느 것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포인트.
뭐… 단순 왕녀여도 교육이 엄했을 텐데, 사실상 적통이면 아주 사소한 것부터 크고 작은 것들 모두를 교정받아가며 단순 예법을 초월해 제왕학이란 명목으로 온갖 것들을 배웠을 테니… 고작 이런 걸로 놀라기엔 일렀다만.
그리고 이 목소리… 듣기엔 따라선 꽤 이쪽 취향일지도.
무엇보다 저 갑옷을 보라.
사내라면 이러한 택틱컬한 모습에 무릇 시선을 빼앗겨도 전혀 흠이라 할 순 없으리라.
어쨌든.
에드릭은 그제야 정신이 깨는 듯 했다.
솔직히 여태 집중 못 해 반쯤 멍 때리고 있었는데, 방금 걸 기점으로 조금, 지루함에 의해 퇴색됐던 현실성이, 색감이 돌아오며 온갖 소음, 공기까지.
대기의 체취가, 주변에서 피어나는 침묵 사이로 간헐적으로 울리는 웅성거림.
이러한 반응들이 그제야, 제대로 실감 되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내몰리듯 왔기에 사실 적극성도 나락, 의욕도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이다. 이 몸이 바라는 부군의 가장 큰 덕목은 2가지다.”
그런데 불쑥, 시작부터 본론을 꺼내는 게 아닌가.
“첫째, 이 몸에 대한 절대적 충성. 반항하지 말라. 대항하지도 말 것이며, 오로지 이 몸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진심으로 이 몸을 사랑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나 또한 기꺼이 그로 하여금 그 이상의 극진한 대우를 거듭 약속하겠다.
그러니 자리 자신들의 의지를 확실히 하라. 이 몸의 반려, 그가 가지는 권력, 위엄, 가치는 오롯이 이 몸이 존재하기에 비롯된다는 것을.
하여 쓸데없는 허례허식, 같잖은 도전 정신으로 감히 권위에 도전하려 들면, 부군이고 나발이고 목을 칠 것이다. 신분고하 막론하고 이는 예외 없다. 본인의 부군이 된 다는 건 오로지 본인의 소유물이 된다는 각오를 지니도록!
하니 정치적 목적으로, 정략혼이란 가당찮은 목적으로 이 자리에 온 이가 있다면 기회를 줄 테니 이번 기회를 빌어 모조리 꺼져라. 그런 낌새가 발견되면 그 또한 결코 관대하게 넘어가진 않을 테니.”
……….
입장에 따라선 거침없는 축객령이 될 수 있는 발언에 분위기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일말의 미사여구조차 없는, 완전 전멸한 일방적인 요구 사항.
그러나 한편으론 합당하기도 한데….
마치 마른하늘에 홍수가 쏟아지는 기세로 호언 하듯 질러버린 덕에, 내부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개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걸 대놓고 티 내거나 성토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었지만.
그런데 어쩌나. 이조차도 끝이 아닌 모양인데.
“하나론 부족해 여럿도 고려는 하나,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하건대 이 몸은 지극히 까다롭다. 어지간한 이가 아니라면 눈에 찰 일도 없을 테니, 쓸데없는 기대감에 취해 망신당하는 일 없도록 처세 똑바로 하라!
사내로서 여자인 이 몸보다 부족하고 미흡한 모습을 보인다면, 본 왕녀는 가히 실망감을 금치 못해 일말의 기대조차 사라져, 그대들 보기를 평야에 널린 잡초 보듯 대할 수 있음이라. 그러니 자존심을 지탱하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려도 늦지 않음이라. 하니 서두르거라!”
흐음, 그러고 보니 여왕이라 치면 부군 여럿 두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물론 그에 걸맞은 남편을 옆에 둔다면야, 또 정치며 정략적 목적까지 엮인다 치면, 이건 이것대로 미묘할지도?
그나저나 대놓고 꿇어라! 하다니, 어지간히 터프한 분이시네?
사실 왕국, 그리고 왕녀님 입장에서야 이게 맞긴 하지.
부군으로 온 존재가 정치적 개입을 통해 세력을 구성하거나 깽판을 쳐대면 나라 꼴 아주 잘 돌아가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니.
의외로 섬세하고 유약해 보이는 외모에서 저런 위엄과 품격이 드러난다는 것도 새삼 신기한 판에….
아니, 오히려 그래서 위험한가?
겉 포장을 보고 살짝 방심했는데, 막상 내용물이 괴물이라면?
애초에 무심한 표정으로 웅변 비슷하게 주변을 사로잡아대고 있는데, 보통 열변을 토하면 자기 기분이나 분위기에 취하기 마련인데도, 그녀에게선 그런 기색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즉 자기 과신, 도취 된 듯한 모습이 달리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감정 처리가 능숙하다던가, 포커페이스가 뛰어나다는 거고, 이건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일 가능성이 농후한단 건데….
아니면… 고작 이딴 사소한 걸로 자부심에 취할 일이 없다던가… 하는 이유도 무시할 순 없으리라.
…어쨌든 적통이라 해도 그녀는 여성.
중세 시대 기준으로 여성이 왕이 되려 할 땐 상상을 초월하는 무수히 많은 시련과 국가적, 사회적 편견을 극복해야만 하는데, 그러기에 그녀가 철저하게 실리적 성향을 추구하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풀 무장 상태로 연회장에 철커덕대며 등장한 시점에, 그녀의 성향, 성질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게 가히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그나저나.
저렇게 질러 버리면 오히려 자존심 때문에라도 반드시 그녀를 깔아뭉개고자 하는 족속들이 생겨날 텐데.
…의도한 거라면 이건 이것대로 조금… 뭐랄까.
당돌하다? 맹랑하다?
기질이 강한 부류들은 의외로 자신보다 기질이 사납고 맹렬한 이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고.
‘그러니 해볼 테면 해봐라?’
아니아니, 억측은 금물이지. 아무렴.
“어차피 시험을 주관하는 건 아바마마시니, 본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건 없다. 그래도 이곳까지 온 성의가 있으니, 다시 한 번 헛고생 말고 인생이 소중한 만큼, 그 시간 아끼라는 배려를 새삼 보인 바다.
혹여 듣기 거북하게 들렸더라도 어쨌든 본 왕녀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인생의 동반자로서 동행할 이를 선출하는 작업이다. 부디 경들, 귀하, 귀공들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필시 후회 없는 선택들을 하도록.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도, 다시 되돌릴 수도 없으니.”
맞는 말이긴 하죠.
…어설픈 기대나 어쭙잖은 각오면 서로가 피곤해지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이다.”
깔끔하게 자른 듯 했지만, 에드릭이 보기엔 내심 몇 마디 더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으나, 슬쩍 국왕에게 시선을 준 그녀는 체념인지 단념인지 모를 고소를 머금는다.
이윽고 등장했던 것 못지않게 과감하게 전신 갑옷의 위엄을 널리 떨치듯 철커덕 소리를 남발하며 연회장을 곧장 뜨려다….
“…….”
그러던 중 무심코 가는 길에 시선이 마주쳤다.
에드릭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가까이서 보고자 거리를 좁힌 덕분에, 어쨌든 눈앞에 당도한 그녀의 모습을 두 눈에 선명히 새길 기회를 손에 넣었다.
확실히…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마주할 때의 느낌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무엇 하나?”
흠.
이럴 땐 역시 눈치 게임이지?
나는 자연스럽게 접근해 그녀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녀는 그걸 단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는.
“…….”
묘하게 이쪽을 몇 초간 응시하다 술잔은 반환하곤 그대로 자리를 떴다.
“후우.”
와, 근데 눈빛이 뭐 저리 살벌하대?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대놓고 직시하니 뭔… 곰이나 호랑이 같은 게 노려보는 줄 알았다.
‘그래도….’
예상 이상… 아니, 상상보다 훨씬… 매력적인 왕녀라는 거에 한에선, 이견에 여지가 없었다.
사실 첫눈에 반한다거나, 어쩌는 걸 아예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오히려 외모만 봐도 이건 손꼽힌다 해도 무방했는데, 그러한 외모로 위험천만한 분위기며 위엄을 몸에 두르고 있는지라, 외모가 오히려 그 살벌한 기세에 파묻힌 것처럼 여겨 이건 이것대로 대단히… 신선했다.
여태 저 정도로 기가 다부지고 강렬한 여성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파라메라 대륙에서 온갖, 기가 센 여성들을 많이도 상대했고, 무엇보다 멜레니아 아가씨도 상당히 기세가 야무지신(?) 분인데, 진정한 의미로 전장이며 전투를 휘젓는 군주여서 그런지 새삼 실감 된다.
…얌전한 곳에서 귀한 대접 받으며 대강대강 살아온, 그런 왕후장상… 공주, 왕녀들하고는 아예 격이 다르다는 걸.
참 신기하지. 이런 게 매력이 될 수 있다니.
물론 현모양처며 다소곳한 여성이 취향이라면 이는 오히려 마이너스일 테지만….
에드릭은 어쨌든, 모든 방향성을 열어두고자 했기에 이러한 매력에도 사뭇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란 참 간사한 거지.’
잠깐 쏟아지는 폭우, 천둥 번개처럼… 연회장 분위기를 다른 의미로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라진 그녀.
근데도 에드릭은, 이제야 조금 기분이 침착하게 가라앉았음을 실감했다.
물론 편해졌다는 건 아니지만.
처음과 달리 갈등하기 시작한 이들, 내심 포기한 이들과, 그럼에도 남아… 부군 경선에 참가하고자 하는 이들까지.
그들의 각오가 확고하게 굳혀진 시점은 바로 이 순간일 거다.
…뭐 에드릭으로선… 그럼에도 아직까진 그러던가 말던가 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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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에 연갈색 눈을 반짝이는, 준수한 외양의 청년이 말했다.
“경쟁자들이야 다양하나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하다고, 일단 세간에 평하는 이들은, 각 왕국의 왕자, 멸망한 제국의 후예라 자처하는 사기꾼들, 유력 가문의 혈통이라던가, 영향력이 뛰어난 상가의 핏줄이라던가… 다양한 편입니다. 아, 당연하지만 평민이나 아무런 근본 없는 이가 없는 건 아니나, 어지간히 걸출한 이가 아니라면 버티기도 힘들 테니 금세 탈락하겠지만, 또 모르지요. 변수란 건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 줄 모르는 거니.”
“흐음….”
에드릭이 짧게 침음하자, 청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소녀, 붉은 드레스에 어울리는 연한 적발을 늘어뜨린 여식이 마저 거들 듯 푸른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하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번 경선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아마 짐작조차 못 하겠지요.”
“저라고 다를 게 있나요?”“에드릭 님이야 저희가 대놓고 힌트를 드릴 테니, 남들보단 나을 지도요?”
경선의 첫 관문은 사실상 카일론에 얼마나 많은 인맥 네트워크를 깔아두었느냐 하는 건데, 에드릭의 경우 아르세이유에서 이곳으로 올 당시, 그곳에서 친분을 맺었던 카일론 귀족과 친분을 맺어뒀던 바가 있었기에, 쉽게 그들의 호의를 살 수 있었다.
백화점 운영 당시 그런 이들에게 밑밥 좀 깐다며 오죽 많이 선물 공세를 투척했어야지.
심지어 그런 선물들 태반은 에드릭 본인의 자비로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애초에 그는 이곳 세계에선 딱히 돈 욕심이 없었다.
품위 유지비라는 건 어차피 자신이 내는 것도 아니었고.
잘만 굴린다 치면, 돈 걱정 없이 사는데 전혀 지장은 없었다는 것.
애초에 이곳 사치품에 크게 욕심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묘하게도 벌어들이는 금액에 비해 다소 검소(?)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고, 이는 여러 구설수를 낳았는데, 평민의 근본을 못 벗어나서 저런 거다… 라는 비방이 뒤따른가 하면, 철저히 실리적으로 사용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상인의 귀감이다, 라는 식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의외로 돈보다 중요한 걸 알기에 돈에 구애되지 않는 이라는 평을 받는 등의… 여하튼 또래와도 다르며 나이 적당히 먹어 자식까지 둔 귀족들조차 그의 평소 행실엔 여러모로 의아한 시선을 내비치기 일쑤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과 어울릴 때는 돈을 팍팍 써대며, 자신의 수하나 직원들에겐 앞뒤로 충분히 주머니를 채워주니, 부하들로선 충성하지 않을 리가 있을쏘냐.
그러기에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부류가 아니라면 에드릭은 철저하게 사귀고 싶은 부호 중에도 나름 수위를 다투는 인물 중 하나였고, 의외로 혈통에 휘둘리지 않는 한, 여식과 맺어준다던가, 약혼을 거행해 붙들고 싶은 인물 중에서도 단언컨대 수위를 다투곤 했었다.
물론 에드릭의 방만한 여색(?)에 치를 떠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실 이곳 세계 기준으론 지극히 평범한 축인데, 에드릭은 어쨌든 잘 생겼고, 젊고, 인성도 좋으며, 인물됨도 탁월하기에 대시하면 대부분 여성이 넘어간 터라, 그 성공률이 너무 사기적이라 치를 떠는 부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에드릭이 각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되는 바가 상당했는데, 우선 자기 취향이나 성향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며 철저히 신사적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받아 들여주는데 일조한다는 사실.
거기다 풍부한 경험에 의해 에드릭은 여성을 즐겁게 해주는데 탁월함을 갖추었다는 소문이 잇따른 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여성으로 하여금 일방적인 ‘봉사’를 결코 강요하지 않는, 성관계 시 권위주의적 행태를 일절 내비치지 않는다는 게 무릇 많은 여성 관계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터라, 애인까진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자보고 싶은 인물로도, 아르세이유에선 매번 손에 꼽히기도 했으니.
이에 청년이 호기에 차 그런 에드릭을 치켜세워줬다.
“그런 분이 요번 경선에, 그것도 저기 파라메라 대륙에 위명을 떨치는 개척 군주라는 이명까지 받으며 등장했으니, 다들 경계가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흐음,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