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30. 어쩌다 이런 일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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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여자들을 대하는 방식이 신기하다 싶어서요.”
“어떤 점이요?”
“받으려 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게요.”
거기다.
“뭐랄까, 섹스에 엄청 열을 올리려는 것 같지도 않고.”
“아닌데요? 저 섹스 엄청 좋아하는데요?”
이 여자가 날 어떻게 보고….
“그런데 기회가 여러 번 왔을 때도 일 핑계 대고 물린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잖아요.”
“당연히 일이 중요하니까요. 우선 순위는 확실하게 따져야죠.”
“그게 힘든 거라고요.”
“그게 왜 힘들어요. 당연한 건데.”
“…….”
이걸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건데.
남자라면 더더욱.
“그건 그렇다 쳐요.”
명쾌한 해답은 안 됐지만, 납득하기엔 충분했기에 이건 넘어간다 치고.
“앞에도 잠깐 언급했는데, 왜 여자들에게 집착을 안 하세요?”
“하는데요?”
“아니에요. 그 정도면 하는 게 아니죠!”
릴리에나는 단언했다.
“내! 여자인데 왜 외부로 돌아다니며 다른 남자들하고 어울리고, 놀아나게 방치하는데요?”
“예? 언제요? 제가?”
“…….”
자각이 없는 건 아닐 텐데….
“다프넬 씨의 예를 봐도, 그녀가 하는 일은… 그쪽 일이잖아요?”
“예, 그렇죠.”
“…그거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할 게 뭐가 있어요?”
“내 여자가 남에 남자하고 떡 치면 기분이 좋으시겠어요?”
“내 여자는 아니죠.”
“…….”
“그녀는 제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녀는 엄연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개인입니다. 그걸 소유다 뭐다 그런 걸로 구속하고 어떻게 하려는 게 오히려 선을 넘은 게 아닐까요?”
“…맞는 말이신데 보통은 그렇게 생각 못 하잖아요?”
“못 하면 안 되죠. 저는 항상 그녀들의 최우선 순위가 뭔가를 생각합니다. 그녀들이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 꿈을 추구하면 꿈을, 특정 목적에 따라 그녀들이 그걸 이룰 수 있게 도와주고자 하는 입장이죠.”
“거기에 선배는 포함돼 있나요?”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아니! 그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행복하려면 같이 행복해지고 그래야죠!”
“왜요?”
“왜라니….”
릴리에나는 슬슬 골치가 아파 왔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들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는 거죠. 물론 이것도 무조건적으로 그녀들이 우선 순위인 건 아니에요. 그녀가 누군가를 증오한다 해서 그 사람을 살해하는 게 행복이라 해서 제가 그걸 이루어줄 순 없는 거니까요. 도리에도 어긋나고, 법적으로도 어긋나죠.”
“…여기선 또 정상적인 소리를 하시네요.”
그래도 말하기 전까진 혹시?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점은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다간… 엄한 범죄에 휘말려 출세에 영향이 미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눈앞에 보이는 거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그녀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추구하는 바가 뭔지 그걸 고민하고, 그걸 들어줬으면 싶은데,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 같이 있는 동안은 편하게, 즐겁게… 아무튼 그렇게 되어줬으면 싶은 거죠.”
“보통 말이에요. 애인을 옆에 끼고 사람 사귀고 이런 건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런 거지, 상대방을 위해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눈치 봐서 억지로 따라가려고 상대 위하는 척하고, 일종에 투자 개념으로 인간관계 셈 치는 부류들 아니면… 그조차도 결국 장기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건데….”
“저야 같이 있으면 그 자체로 많이 받고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니까요.”
“…….”
말이 안 통하는 건지, 앞뒤가 안 맞는 건지… 다시금 헷갈리기 시작한 릴리에나였다.
그래서였을까. 목이 타고 속이 타고 그래서 그녀는 곧장 몇 잔의 와인을 안주도 없이 삼켜대기에 이렀다.
“그게 이상하다니까요! 왜 자기 행복을 추구 안 해요?!”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럴 리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려는 게 아니고요?”
“으음….”
아무래도 이건, 그녀의 가치관이랄까, 신념하고도 연관된 문제였나 보다.
에드릭 자신의 입장에선 그녀들에게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게 받고 있다고 생각되는 게, 누구들에겐 기본, 당연한 무언가인지도 몰랐다.
예컨대 좋아해서 관심을 주고, 애정 표현을 하는 게 당연해지면, 거기에 감동받는 일도, 기쁨을 얻는 것조차 미흡해지는 예처럼.
그 정도로 그치면 다행인데 나중엔 그조차도 번거롭게까지 느껴질지 모를 일이다.
첫눈에 반하거나 좋아했다는 감정조차 시간이 지나면 희석된다.
결혼하기 전엔 세상 좋았는데 하고 나니… 싸우기만 하더라.
뭐가 문제일까?
그렇게 될 바엔, 그냥 선을 긋는 게 낫지 않으려나?
에드릭이 취직하기 전에도 단순히 경제적 문제를 떠나 결혼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친구들은 아다들이 할 법한 생각이네 하며 비웃어댔지만.
좋아하다가 싫어하게도 되고, 새삼 좋다가도 짜증나는 게 그런 관계라 했는데, 그럴 거면 대체 왜 사귀는 거지?
그래도 좋으니까.
녀석들의 답은, 당시 그에겐 전혀 공감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
…그걸 감수해야 남녀 관계가 진전되는 거라면, 굳이 필요할까?
옆구리가 시리면 죽을 거 같다는 인간들이 있다.
난 안 그런데?
“서로가 필요하니까 엉키고 그러는 거죠,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면 그건….”
“그건요?”
“…그게 백마 탄 왕자님 말고 뭐겠어요. 현실에서 그런 인간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말하다 릴리에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 이거였네.
뭔가 뒤숭숭한 기분이었는데, 그 이유를 확실하게 깨우쳤다.
그녀는, 조금도 아니고 많이 부러웠던 거다.
남자나 여자나 자신만을 위해주는 공주님, 왕자님의 존재를 꿈꾸지 않아본 이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지금 보니 선배가 딱 그런 인상인데? 외모도 마음에 들어, 심성도 썩 괜찮아… 그렇다고 너무 바보 같지도 않고. 어디 가서 누구한테 맞거나 사기당할 거 같지도 않고.
‘어, 그러고 보니?’
이거 의외로 훌륭한 신랑감 아닌가?
‘아니아니아니아니지! 그건 아니야!’
여자를 여럿 후려쳐대는 인간 중 좋은 인간은 없지! 반대로 남자 여럿 후려치는 여자들 중에서도 좋은 여자는 없듯.
“흐음.”
에드릭도 그쯤 와서 눈치챘다.
사회에서 워낙 많이 당해온 덕에, 인간 불신이 심각해진 그녀로서는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챙겨주는 듯한 자신의 행태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던 모양이다.
‘내가 호구도 아니고 무작정 퍼준 적 없는데?’
애초에 그녀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도, 결과적으론 얻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꼭 물질이나 눈에 비추는 관심, 애정 등이 아니더라도 말이지.
자기만족도 따지고 보면 훌륭한 보상 아니던가?
‘욕심을 과하게 안 먹어야 세상 살기 편해지는 법이지.’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정의한다 치면.
첫째는 나 아닌 것을 바꾸려는 태도.
둘째는 나를 바꾸려는 건데.
전자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방식.
후자는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도 보지 말자! 라는 마인드다.
내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
또 1억을 벌고자 하는 이가 100만원을 지니고 있으면, 의외로 불행을 느낀단다. 그것도 엄청나게.
반면 1000만원을 벌려던 이가 100만원을 모은다? 조금은 뿌듯해한단다.
반면 500만원 혹은 그 이하를 모으려던 이가 100만원, 200만원을 모으면 새삼 행복해진단다.
무슨 차이일까?
“릴리에나 씨는 꿈이 방대한가 봐요?”
“…아닌데요.”
취기가 살짝 서린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기 좋은 집에서 가족들 데려다 놓고 풍요롭게 사는 거? 잘 생긴 남자들로 하렘 구성해서, 날 공주님 떠받들어주는 그런 환경에서 곱게 늙어서 죽는 거? 그런 걸 바라는 거죠.”
“그걸 이루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돈 많이 벌어야죠.”
“돈 많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건가요?”
“…그거 외엔 방법이 없잖아요.”
돈이라도 많아야 그것들이 나한테 깜빡 죽어나겠지.
내가 원하는 걸 하고자 하면 결국 돈이 있어야 된다.
“돈이 없어도 그렇게 되게 할 순 없고요?”
“안 되는 걸 아니까 그러려는 거죠.”
예컨대 기대를 하지 않아야 실망도 안 하는 법.
에드릭은 어느 정도 그녀의 핵심적인 고민에 밀접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공을 세워 출세하려 하는 건 아마…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닐 거다.
이 경우 돈은… 명분이자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성과이기에 그렇게 느끼는 걸 테지.
예컨대 그녀는….
‘인정받고, 대우받고, 존중받으면서, 사랑받고 싶다, 그런 건가?’
아니, 누구든 다 그렇게 생각하겠지. 현대인이고 고대인이건 간에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러니 이걸 조금 더 좁혀보면….
“그럼 이건 어떠세요?”
“…뭐요?”
때마침 컵을 반쯤 채운 와인을 입안으로 흘려 넣은 그녀가 입가를 훔치며 의혹을 표했다.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릴리 씨에게 잠시나마 최선을 다해볼 수도 있습니다만.”
“예? 무슨 소리세요?”
잠깐 이해를 못 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던 릴리에나.
“아, 그러니까… 절 사랑하시겠다? 좋아하는 척하시겠다 이 말씀이신가요?”
“아뇨, 척 아니에요. 그리고 이걸 헷갈려하시면 곤란한 게, 저는 아예 선을 그었으면 모를까, 저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 가운데 그들에게 거짓을 보이거나 위선, 연기를 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다만 진심으로 대하고자 하는 거죠. 노력을 하는 겁니다. 노력.”
“…거짓말.”
“말하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으면 보다시피 믿지 못하니까요. 저 자신도 못 믿는데 타인에게 무작정 믿어달라 하는 게 더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
“그러니까 보여줄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요? 섹스라도 하자고요?”
“원하신다면요. 그런데 그게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그게 아니어도 상관없다니, 그거 외에 무슨 방법이 있는데요?”
“그걸 알려드리겠다는 겁니다.”
릴리에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요, 한 번 해보세요.”
이것이 술김에 그런 건지, 뭔지 모를 기대감에 등 떠밀려 허락한 건지, 당장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쳤지 미쳤어!”
잠결에 벌떡 눈을 뜬 릴리에나가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렸다.
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끝까지 가진 않았다.
‘사람 애만 마구 태웠지!’
물론 시작은 술에 취해 있었다곤 하지만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속내를 털어놓도록 충분히 시간을 줬고, 전혀 번거롭거나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차분히 들어주고, 웃는 얼굴로 공감해주고, 안타까울 땐 안쓰러운 표정을… 그러면서도 재차 위로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또 분노할 땐 누구보다 화가 난 듯 격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러면서도 항상 내 쪽을 배려하는 듯한 시선을 주었다.
눈치를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그런 거였는데 그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인지 뭔가… 낯간지러우면서도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자꾸 오그라드는 게….
거기서 슬슬 잠기운이 밀려올 때쯤, 나머지는 내일 맨정신에 다시금 이야기를 나누고, 할 수 있는 걸 같이 해보자는 식으로 말하며 자리를 뜨려는 걸, 무심코 붙잡은 건 릴리에나 본인.
사실상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는데.
“가, 같이 자요.”
“??”
“아! 그래도 건드리진 말고요!”
……뭐하자는 소리야?!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런 소리를 했다고?! 뭘 어쩌라는 건데?!
이때 에드릭이 했던 말도 가관.
“저 잘 때 알몸으로 잡니다만?”
“…….”
이때, 술김에도 정신이 번쩍 든 거 같긴 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저, 저도 알몸으로 자는데요?!”
미쳤지 미쳤어! 이 미친년! 네가 돌아도 한참 돌았구나! 어쩜 그런 말을!
말만 했으면 다행인데 자존심 때문에 또 옷까지 훌러덩 벗어 먼저 침대에 몸을 파묻고는.
‘뭐 하세요?! 안 와요?!’ 하고 윽박지르기까지 했었다.
“…….”
창밖에서 새가 지저귀는데, 그 지저귐이 꼴사나움을 지탄하는 듯 들려오는 건 무슨 연유인지.
여기서 그냥 잠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텐데…….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듯,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