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29. 경력 넘치는 신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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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릭은 전말을 설명했다.
“…그걸 믿으라고요? 지금?”
…바로 기각.
‘진짠데!’
에드릭은 울상지었다.
“아니, 정말인데….”
“그러니까….”
릴리에나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구태여 입 밖에 냈다.
“한 사람이 쓰러지는 걸 보고 잡아주려다 자신도 발이 걸렸는데, 그걸 옆에 있던 분도 잡아주려다 발이 걸리고, 그러다 멀쩡히 서 있던 분까지 엉켜서 쓰러졌다? 말이 되요? 변명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진실인 건가 싶기는 한데….”
설명이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나? 앞뒤는 맞지만 이건 뭐….
“저라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겠습니까?”
어떤 심경이냐 하면 컴퓨터 망가져서 수리 기사 혹은 아는 사람 불렀는데 멀쩡해져서 애써 돌려 보내니 바로 먹통이 돼서 다시 불렀는데 또 멀쩡해지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오이밭에서 신 고쳐 신지 말라?
지금 딱 그런 심정이었다.
“…사실인가요?”
이 경우는 피해자들에게 물어보는 게 정답이겠지.
그러자.
“글쎄에요오?”
엘프 소녀가 미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다.
“마, 맞아요. 저 말이….”
머리색이 신기한 소녀, 프리지아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고.
“…….”
파충류의 꼬리며 날개가 인상적인 아인족 소녀는 얼굴을 붉힌 채 침묵으로 일관할 뿐.
‘뭐지?’
맞다는 거야 틀리다는 거야?
아님 여기서 싫은 소리 하면 안 좋은 일이 닥칠까 봐 차마….
“왜, 왜들 그래요?! 이래서야 제가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는 거 같잖아요?!”
“난 덮쳐져서 좋은데?”
“다프넬!”
엘프 소녀가 기이한 소리를 해댄다.
음, 그러니까 저 엘프는… 에드릭 씨가 이곳 탑인 걸 알고 낚으려는 꽃뱀…으로 여기면 되려나?
‘엘프인데?’
옷이 좀 야시시하긴 했지만 원래 자연과 함께 하는 종족이랍시고 추위며 더위에 큰 영향을 안 받는 종족이다 보니, 옷이 얇은 정도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하나는 인간, 하나는 아인종. 딱 봐도 하프 드래곤…은 아니고. 맞나? 아니, 그냥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거라던가? 정체가 뭐지?’
아직 이곳 세계에 대해 완벽히 안다고 자부 못 하기에 릴리에나는 단정 짓길 포기하곤 판단 내리길 보류했다.
“당장은 그렇다고 치죠. 사장님 여자관계까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닐 거 같고….”
“쩝.”
오해 단단히 산 모양인데.
에드릭은 소리 죽여 탄식했다.
그나저나.
‘아바타 잘 뽑았네.’
릴리에나는 내심 감탄했다.
알푸스를 봤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에드릭은 확실히….
‘여자들에게 인기는 좋을 타입이야.’
선이 고운데도 적당히 남성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잘 꾸미면 미소녀(?)로 탈바꿈도 가능해 보인다.
마초적인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에 그쪽 취향의 여성이라면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현대적인 미남 그 자체네.’
거기다 나이 어린 느낌이 확고한 덕에… 이게 뭐랄까. 잘 생겼는데 귀엽고, 멋지게 생겼는데 조금… 으음!
아바타는 대체로 본인이 꾸리는 거기에, 조언을 듣고 조정을 받는다 쳐도 본인의 센스 나 디테일이 부족하면 비주얼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으로 보면, 에드릭이란 아바타는 확실히 성공작임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알푸스 선배? 이쪽이 전에 말한 그분인가요?”
“그래. 전선에서도 뛰고 던전도 돌고! 유망주야 유망주.”
“…그런데 왜 굳이 여기로?”
“궁금하면 본인한테 물어보던가.”
알푸스가 시선을 주자 릴리에나는 눈치껏 답했다.
“경력도 쌓았으니 이젠 안정적인 직장에서 여가 좀 즐기면서 살려고요.”
“아, 네.”
충분히 납득가는 내용이긴 한데… 왜 저리 성의 없게 들리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찾아와요.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프리지아는 그리 말하며 동행했던 아인종 소녀와 자리를 떴는데….
“다프넬?”
“왜?”
“…안 가세요?”
“여기가 내 자리 아니었어?”
에드릭이 앉은 소파 팔걸이 부근에 엉덩이를 걸친 채,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몸을 자꾸만 터치하고 있는 다프넬이었다.
“…나중에 찾아갈 테니 이쪽 사정 좀 고려해주세요.”
“쳇!”
릴리에나를 한껏 노려보던 다프넬이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사장실을 나선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기까지 알푸스와 릴리에나, 에드릭은 침묵한 채 그러고 5초 가량 서로를 바라만 봤다.
“방음 확실한 건가요?”
노파심에 릴리에나가 묻자.
“그래. 밖에 비서가 엘프인데 설마 방음을 안 했을까?”
“문이 꽉 안 닫혔는데 사람이 인근에 있으면 경보음도 울려요.”
본사 규정상 보안을 철저해야 한다. 오죽하면 본사 명이 따로 없어 ‘본사’로 때우고 있겠나.
“어쨌든 자기소개는… 필요한가?”
알푸스의 물음에 에드릭이 곧장 답했다.
“…저는 필요하죠. 현실에서 못 봤는걸요.”
“아, 그렇네. 나야 휴가 다녀오면서 같이 합류해서 온 거니까. 그럼 간단하게… 저쪽 세계에선 따로 통성명 나누고, 여기서는 새로이 인사 나누는 게 좋겠지?”
“제가 먼저 소개 드리죠. 그게 예의인 거 같으니. 이곳에선 릴리에나 베르기테라 불리고 있어요. 어쨌든 제가 아랫사람이 될 테니 편하게 부르세요. 릴리라 불러도 되고, 리에나, 리나, 에나, 편한 대로 부르세요.”
“전 여기선 에드릭 코넬이라 불립니다. 일단 명목상으론 마레아 백화점 점주, 사장… 대표이사죠. 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요.”
서글서글한 미소로 그리 이야기하는 소년.
무언가를 과시하거나 잘난 체하는 듯한 기색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이 부분은 합격.
뭣도 아닌 새끼가 지위 믿고 까불면 어떨까 싶었는데… 아니, 그래도 선배니까 개기진 않을 작정이었지만, 개념 없이 나대면….
‘그럴 거 같진 않아 보이네.’
보통 자기 아랫사람이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버러지들이 있다.
현실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마찬가지.
일을 잘하면 잘하는 대로 시비 걸고, 못하면 못 하는 대로 시비 걸며 조롱해대는데, 이게 사람 새끼인지 경쟁사에서 내부 환경 망치려고 투입한 스파이인지, 단순 무능한 기생충인지 전혀 분간이 안 가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서 자기들 일은 또 이쪽한테 일임하고 못 하면 책임은 또 이쪽에 뒤집어씌우고, 잘하면 자기들 잘난 맛에 목소리만 커지고.
…그런데 이런 놈들이 잘만 승진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일 잘하는 것보단 정치질 잘하는 게 갑이구나 해서 얼마나 짜증 났는지.
회사 부피가 커지면 개인 몇몇은 일개 부속품에 불과해진다.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나 없으면 망할 거란 책임감을 과중하게 심어주는 주제 자를 땐 가차 없다.
그리고 나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 꼴을 보면, 거기서 무력감과 허탈함이 밀려듦과 동시에 멘탈이 가루가 되는 거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 취직하러 이곳저곳 돌아다녀 본들 장기적 근무를 못 했다는 명목으로 또 컷 당하고….
부모님께선 더러워도 버티고 버텨야 나중에 더 좋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버틸 수가 있어야 버티지.
‘요령 부족.’
지금이라면 융통성 있게 잘 넘어갈 수 있겠지만 당시엔 풋내기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회 초년생에다 대학 생활 때까지만 해도 항상 상황을 주도해왔던 버릇 덕분에, 시작부터 고개를 수그리고, 눈치 보며 허리를 꺾는 걸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부조리한 사회 집단 속에선 그녀처럼 튀는 부류는 오래 가기가 힘들었다.
거기서 타협을 하든가, 그 성향을 고수하며 공을 세워 빠르게 치고 올라가던가 인데, 그녀는 둘 다 실패했다. 타협도 못 했고, 빠르게 치고 올라가지도 못했다.
아니, 기회는 있었지만… 그 기회를 강탈당해서 문제였지.
그걸로 싸우고 난리 치고 그러다가 결국 짤렸고, 소문이 이상하게 돌아 취직도 막히고.
그래서 중소기업에 투신했건만 거긴 더했다. 회사를 잘못 선택한 건지 대부분이 그런 건지는….
‘아아! 생각하니 또 화가 나네.’
심호흡! 심호흡!
“아, 내 정신 봐라.”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에드릭이 그대로 한쪽에 놓인 주전자 비슷한 것에다 물을 부었다.
“차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차요?”
“저쪽처럼 라떼 커피는 힘들어도 블랙 정도는 가능해요. 그 외에도 다양하게 있는데….”
릴리에나는 잘 모르니 에드릭의 조언에 따라 크게 부담 없는 허브 티를 요청했다.
반면 알푸스는….
“쌍화차!”
“……진심이세요?”
“왜? 문제 있어?”
“후우! 손 많이 가는데.”
그러면서도 용케 그걸 또 타서 대령까지 해주신다.
“흐음.”
이것도 합격.
비서가 있는데도 직접 차를 탄다? 무언가를 대접한다는 성의, 윗사람이 몸소 이런 걸 보여준다는 건… 좋은 징조다.
물론 권위를 내세워야 할 때면 이런 방식은 옳지 못한 방식이다. 때때로 직접 이런 걸 행하는 걸 천하게 여기는 버러지들이… 이곳 세계에선 많은 편이기도 했으니까.
뜨거운 걸 목 안으로 흘려 넣자 긴장이 완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조금 들어가 있었나 본데, 다행히 처음보다 마음은 편해졌다.
‘영 인복이 없었으니까.’
내가 잘못했나 고민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남 탓하지 말라는데, 그 새끼들이 문제인 걸 어쩌라고!’
운이 나쁜 건지 매번 만나도 그런 것들만 만난다.
참는데도 한도가 있지… 그냥 평범하게 일하고 보내주면 뭐 어디가 덧나나? 술은 왜 그리 처먹이려 하는지!
그거 기껏 거절하니 일하는 내내 그걸로 꼬투리 잡고 징징대고!
‘빌어먹을 꼰대들!’
그냥 꼰대 라면 차라리 낫지, 이것들은 쥐꼬리만 한 회사에서 황제 대접 못 받아 화를 내는 사이코 새끼들이다. 그러면 돈이라도 많이 주던가! 주는 것도 없는데 시키는 건… 어휴!
‘그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지.
최초 발령 났을 때 죽을 뻔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 바라보며 종일 자판 두들기는 것보단 이게 100배는 나았다.
무엇보다 여긴 정치를 신경 쓰기 전, 당장 눈앞에 자기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지 않으면, 인정 자체를 못 받는 곳이었다.
얼마나 좋냐! 일 잘하면 기회도 팍팍 주고!
‘그래도 아직까진 사원이지만.’
여기선 남 탓보단 자기 탓을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집에 거의 들릴 일이 없어진 게 유일한 흠이었지만, 그것도 3개월 차가 되니 익숙해진지 오래고.
“우선 릴리에나 사원은 사원이되 네 호위 겸 보조, 외출 시 동행해 스케줄 관리해주는 수행 비서 역까지 맡게 될 거니까 호흡 잘 맞춰두도록 하고. 비서실장이란 자리를 아직 만들 생각은 없지만, 잘 풀리고 사람 좀 충원하면 그걸 맡길 생각이니 릴리에나 사원, 너도 기존 직원들하고 잘 어울리고.”
“예, 알겠습니다.”
“내부 업무는 아까 오면서 봤지? 내근 비서 따로 있으니까….”
“코넬이라 했죠?”
문득 릴리에나의 시선이 사장 책상에 놓여 있는 명패 쪽에 향했다.
“에드릭 님의 성이 코넬인데, 관련 있는 건가요?”알푸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연! 완전 우연. 우리도 신기해하던 참이라니깐.”
“재미있는 우연이네요.”
릴리에나는 믿기 어려운 모양인지 의혹 어린 시선으로 알푸스와 에드릭을 한 번씩 노려봤다.
“정말인데….”
에드릭은 또 억울해졌다. 왜 사람 말을 믿질 않는 걸까.
“릴리 사원까지 합하면 현재 비서들만 셋은 되니, 둘 정도 더 받아서 그룹으로 묶으면 되겠네.”
“봐둔 사람이라도 있나요?”
에드릭이 묻자 알푸스는.
“조급해하진 말고. 급하게 먹다 체한다.”
지당한 말로 상황을 일단락 맺었다.
“당장은 그렇게 됐으니까… 어디 보자. 오늘은 회포 풀 겸 식사나 하지. 아, 릴리 사원은 술은 어때?”
“…반주 정도는 괜찮습니다.”
“눈치 볼 거 없어. 마시기 싫으면 주스 달라 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알푸스가 주도적으로 둘을 향해 손짓하며 목청을 드높였다.
“자자! 나름 기념비적인 날이니 다들 힘차게 배 채우고, 일들 잘해보자고! 오늘 밥은… 에드릭, 네가 쏴라. 너 사장이니까.”
“하하하….”
그저 웃지요.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조금 못 미더운 느낌을 받은 릴리에나였다.
‘끌려다니기 쉬운 타입인가?’
그런 편견을 가지기 좋을 정도로, 그는 물러 터진 구석이 있었다.
…물론 다음날, 정상 출근해서 하는 일을 보조하기 무섭게 그 안이한 편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