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21. 그녀가 귀여울 수밖에 없는 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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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잖아.”
방학이 다 끝나가는 무렵이었기에 프리지아는 내심 초조한 듯 보였다.
“뭐가 어려워요?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 의견이 정당치 않음을 지적했다.
“이래서야 극단 배우들하고 뭐가 틀린데?”
“그러면 어떤데요?”
“그거야….”
말문이 턱 막힌 듯 보였다.
정말로 이게 뭔가 아니다 싶으면 논리적으로 반론을 해야 할 텐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 건지 따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지, 막상 판을 깔아주니 별말을 못 하고 있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다 연습이잖아요? 검 다루신다면 실전에서 검 다룬다고 그때만 검 들고 다른 때는 방치하고 나 몰라라 하시진 않으시죠?”
“그거야… 그렇지.”
“똑같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떠세요?”
“이게?”
“말하고, 행동하고, 표현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겁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는데 연습만 한 게 있나요?”
“그건… 그렇지. 근데 난 논리적이고 좀 조리있게, 자신감 있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
“말도 못 하는데 조리 있게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문자도 모르는데 책 쓰시려는 건 아니시죠?”
“그거야….”
내가 그녀에게 시킨 건 유명 소설 책, 서사 속의 인물의 대사를 그대로 읊어대는 거였다.
그냥 읊는 게 아니라 제스처, 몸짓까지 상상해서 최대한 유사하게끔 따라 하라는 식이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던 모양이다. 나름 알려준다고 알려줬었는데….
쉐도잉(Shadowing)이라 해서 이건 다방면에서 활용되는 건데, 간단히 말하면 따라 하는 거다.
내 경우는 인턴 당시 여러 드라마의 작중 인물, 배우자의 연기를 따라 해서 익히는 식이었는데, 처음엔 뭔가 했는데 두 달 이상 시키는 데로 따라 하니, 나도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말투며 몸짓, 제스처를 취하게 되더라.
물론 연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전으로 들어가는데, 특정 작품 연기를 무려 일마다 네 번씩 바꿔서 10일 동안 연달아 했을 때는… ‘나’ 라는 존재를 잊어먹을 뻔했다.
몰입해서 대사 외우랴 대사 나불대는 인물 모습을 최대한 유사하고 적절하게 연기하랴… 끝난 다음 피드백 들어가고 다시 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 전까진 거의 계속 반복하고 시험받고 혼쭐나고….
나중엔 내가 리어왕이었는지 호레이쇼였는지 머큐시오였는지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10일을 보내니, 아싸 특유의 위축된 말투며 분위기 등이 많이 완화가 됐다. 그래도 여전히 어쭙잖은 면은 남아 있었지만, 거의 이거 때문에 지금처럼 능청맞고 태연하게 막말이든 옳은 말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거였는데, 이게 돼야 이제 논리적으로 말을 하건 생각을 한 다음 여유롭게 말을 이어가던 하는 거다.
분위기에 얼어붙으면 보통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머리가 제대로 안 굴러간다. 타인의 눈치 살피랴, 긴장감에 사로잡혀 실수할까 봐 겁먹고 막 이러는데… 그걸 완화 시키는 게 관건.
그리고 그런 습관이 오랫동안 누적돼서 완전히 만성이 됐기에, 본인들은 단순히 논리가 부족하고 말주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악습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기에 말 못 하고, 말을 더듬는 내가 탄생하는 거였다.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 스스로 효과를 본 걸 일러주려는 거였는데, 지금도 막상 이게 맞나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망설이지 말 것.’
행동엔 확신을 담아.
그 모토를 기억해내곤 움츠러들려는 마음을 다시금 붙들었다.
“물론 프리지아 영애께서는 귀족이고 묵직하고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가다듬는 법을 배워왔겠죠. 예법도 그럴 테고요.”
사실 예법만 잘 배웠어도 그게 알아서 다 해결이 됐을 텐데, 배우면서 느낀 건 위압적인 분위기 속에 억지로 주입 당하면, 무의식적으로 그 행위에 반감 내지 답답함을 느끼게 되면, 교육에도 안 좋은 영향이 끼칠 수 있을 거란 느낌을 받았다. 다분 내 생각이지만.
“그러니 조금 더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자신감? 긍지를 저는 조금 심어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 말은, 이 내가 긍지며 자긍심이 부족하다 그 말인가?”
“아뇨, 지금보다 더 많이, 더 풍부하게 갖추시라는 거죠.”
“…정말로 말 하나는 잘 포장해. 감탄스러울 정도로. 그게 부럽단 말이야. 그게! 나도 그걸 하고 싶다고!”
“기한이 짧기에 최대한 속성으로 일러는 드리겠습니다만, 배울 게 꽤 많을 거예요.”
논리적으로 입을 놀리려면 결국 머릿속 사고 프로세스를 뜯어고쳐야 한다.
평소에 말하는데 별문제도 없고 긴장 안 하는데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대화며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면, 이건 사고방식 및 태도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도 당연 악습, 잘못된 습관이 대두되지만, 이래서 유년기 교육이 중요한 건데… 대부분 이런 필요한 교육에 대해선 개념이 없거나 문외한인 게 보통 아니던가.
감정에 치우치는 것도 습관 및 가정 혹은 유년기 교육 문제에 일환이라는 걸 들었을 땐 조금 놀라기도 했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그때 잘못 습관 박히면 노력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안 고쳐진다고 했던가?
“우선은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보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해보는 겁니다. 자유자재로 생각을 말해보세요. 우선… 뭐가 좋을까요?”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좋아요, 그러면 제가 정하죠. 우선….”
그렇게 해서 돌발적으로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해보기로 했다.
“뭐라 딱 정의하기가 그런데. 너무 막연하잖아? 범위가 방대한 것도 같고.”
“좋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러면 범위를 좁혀본다 치면, 어느 정도가 좋을까요?”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 아니면 가족 간의 진정한 사랑?”
“바로 그런 식이에요. 비대한 주제는 축소 시켜 직관적으로 정리하는 거. 벌써 하나 배우셨네요. 아니죠, 배운 게 아니라 이미 알던 건데 제대로 실감을 못 하고, 써먹질 않아서 내 안에 잠재되어만 있던 거예요. 프리지아 영애는 이미 테티아나 님하며 이곳 가문, 그리고 많은 분들을 접하고 그들을 보고 살펴가며, 또 직접적으로 사사를 받으며 배운 바가 적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이걸 그대로 사용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었던 거죠.”
“그, 그런가?”
의외의 칭찬 때문인지 살짝 들뜬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그녀.
…무심코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말이라는 건 이렇게 힘이 있어요. 제가 만약 거짓말을 했더라도 방금 전의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싶어졌죠? 이게 간신들이 잘하는 아첨이라는 겁니다.”
“…야, 너 지금 나하고 장난치자는 거야?”
“아뇨, 좀 전의 칭찬은 진심입니다. 그러나 모든 칭찬이 항상 정확하고 올바른 건 아니지만, 사람은 듣고 싶은 말을 듣고자 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싫은 소리는 듣기 무섭게 얼굴부터 찌푸리잖아요? 지금 프리지아 영애처럼요.”
그러자 흠칫한 프리지아가 못마땅한 시선을 던져온다.
“말했듯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그걸 제대로 안다는 자각을 갖추고, 동시에 그걸 활용하기 위해선 결국 반복 작업, 반복 학습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제가 요령이 부족해서 이런 방법 외의 그런 건 잘 모르겠네요. 알다시피 저도 전문가는 아니고 견식이 엄청 방대한 편은 아니니까요.”
“…책이란 게 대단한가 봐. 어린 나이에 그 정도면 이미 달변가잖아?”
“설마요. 이건 기본에 속한다고 봅니다만.”
내가 책을 많이 읽기야 했지만 그거 덕을 본 적은 별로 없는 거 같은데?
알게 모르게 가랑비에 속옷 젖듯 지혜가 녹아든다는 소리를 접한 적은 있지만, 그게 이거인지 아닌지는 아직 분간이, 감이 확 와닿지는 않았기에 내심은 교양을 숙지했다는 정도로만 그쳤다고 생각은 한다.
텍스트, 문자 읽는 거 빨라지고 정보 습득 능력이 향상됐다는 자각은 있지만… 글쎄? 이건 현대인들 기준에선 기본에 속하는 거니 유별날 것도 없고.
물론 위대한 인물 중 독서 안 한 사람 없다, 심지어 그냥 독서가가 아니라 지독하게 책을 파고 들췄다는 식으로 독서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어떨까 생각된다.
‘책 많이 읽어서 나쁠 건 없겠지. 거기에 파묻히면 문제가 되겠지만.’
책벌레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내용을 제대로 실전에 써먹을 정도로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거라 본다. 단순히 지식만 쌓으면 사전하고 뭐가 틀린가? 걸어 다니는 사전 자체로는 돈을 벌 수도, 무언가를 이룰 수도 없다.
…라고 인턴 당시 오신 강사분이 입 아프게 열변을 토했었는데, 당시엔 그러려니 해도 시간이 갈수록 그렇구나 하고 절절하게 와닿았다. 그만큼 나도 성장하고 있다는 건가?
“읽을 수 있는 건 많이 읽어두세요. 머릿속에 쌓아둔 게 많아야 입으로도, 또 글로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네.”
프리지아는 맞는 말을 들은 양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 그럼 다시 돌아가죠. 그래서 어떤 부류의 진정한 사랑에 대해 논하고 싶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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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을 넘게 열띈 대화를 나눈 우리는, 내 일정상 문제로 결국 중도 하차로 끝마무리를 맺어야만 했다.
“다음에 마저 이어서 해도 되고요. 아무튼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상대에게 내 의견을 전달할 건지, 이해 시킬 건지, 설득을 시킬 건지, 이런 목적을 명확하게 하고서 말을 구사하면 되실 거예요. 대강 이해는 가셨죠?”
“…아니. 전혀.”
말은 그래도 표정이 아까 전보다 한층 여유로워 보였다. 당장은 헷갈려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만큼, 그녀는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것이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아직 도움 됐다고 말 안 했는데.”
“표정이 말해주는데요 뭘. 오늘 고생하셨어요. 그럼 다음에 뵙죠. 저는 테티아나 님께 인사 드리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 가고. 마중 안 간다?”
“오시면 오히려 부담됩니다. 하하하. 쉬면서 들은 것들 한 번 정리해보세요. 배우기만 하고 뭔가 그렇구나 하고 끝나면, 나중에 다 까먹습니다.”
“…말 안 해도 그럴 참이었으니까 얼른 가. 다 까먹으랴.”
그러면서 등 돌려 방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
그래도 매정하게 안 보이려는지 문은 또 안 닫는구나 싶어서, 괜스레 귀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