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문명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이 이런짓 하는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하지만요.....떡밥떡밥.497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여행하는 초월자들을 위한 안내서]재호 유귀가 전하라 부르는 호칭을 들으니 새삼 백희가 령 제국 시절의 황태녀였단 사실이 와닿는다. 연기도 아니고 그런 칭호는 함부로 입에 담는게 아니니까.
보통 사극에서 폐하, 전하, 저하, 이런저런 이름으로 부르긴 하지만 그 중에서 전하는 황후나 태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이였다.
백희가 백희 황후가 아니라면 황태녀란 말이 사실일테니 전하라 불려도 이상하진 않다.
-.......정말로 령제 백희 황태녀 전하십니까?
"네 녀석 따위가 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그동안 간덩이만 부풀린게 분명한 모양이구나"
-허허, 어찌하여.......
"운이 좋았지. 네놈이 여태까지 살아있듯 말이다"
-하기사, 소인도 이렇게 살아 있었사옵니다. 하물며 황태녀 전하 또한 옥체보중하였을 가능성 또한 있었겠지요.
"그리 환영하는 말투는 아니구나"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옵나이까?
백희의 말투는 적대적이였다. 하기사 여태까지 본게 있으니 그럴만도 했겠지만 정치판에서 구르다 황태녀의 위치까지 오른 그녀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건 좀 이상하다.
아무래도 분노 외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령 제국은 몰랐고 세상은 멸망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너와 나, 단 둘만이 제국의 남은 사람일지도 모르지"
-........
"기영 화자의 도시에서, 그의 선조가 나를 받든 봉신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기영 가주는 나에게 예를 표하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았는데 령 제국이 멸망한 지금에 와서 큰 예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또한 격식 없이 이야기 하고 있지"
-그렇다면 지금 연락을 하신 것은 무슨 의도이옵니까?
"네가 설령 날 죽이려고 드는 것이라도 이해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인간된 도리는 지켜야 했지 않느냐"
정치인이 되기 전에 사람부터 되어야 하는 법이다. 사람을 통치하여 사람 위에 있는 자가 짐승이 되어서는 안되는게 당연했으니까.
차라리 괴물이라면 낫다. 괴물이 인간을 사육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니, 하지만 짐승이 인간을 사육하는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이상한 구조다.
"고서에서, 경전에서, 선조들이, 역사들이.......그것들이 우리에게 강조하던 것이 부모께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는 인간된 도리가 아니더냐? 그러한데 너는 이 시대에서 인간의 도리를 버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게냐"
-......하하하핫!!!!
통신기 너머에서 웃음 소리가 들린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그래, 정상인 코스프레 좀 하긴 했지만 웃음소리 자체에도 광기가 있다. 여태껏 만난 광견 놈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그런 광기가 말이다.
-인간된 도리라고 하셨사옵니까? 인간된 도리? 인간? 인간? 기껏해야 작고 보잘것 없는 목숨 아닙니까! 제것이 아닌 목숨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그것이 알바가 아니지요.
"........적어도 그 정도로 막나가던 자는 아니였을텐데"
-설마 전하께선 령 제국이 멸망하던 날의 기억을 잃으셨사옵니까?
"왜 그리 짐작하지?"
-하하하! 그럴만도 할 것이옵니다. 소인 또한 한동안 기억하지 못하여 방황하던 때도 있었으니 전하의 반응을 보면 그러할것이지요.
그때, 재호 유귀의 반응이 바뀌었다.
여태까지는 나름의 존중을 보이던 그가 으르렁거리면서 명백하게 적대하며 소리쳤다.
-령 제국의 멸망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년이 내 앞에서 인간의 가치를 논하는가? 홍수로 백성이 쓸려나가고 가뭄으로 말라 죽는 자를 본적도 없으면서?
"............."
-인간된 도리란 것을 지킬 인간이 있을 때 하는 법이오. 보아하니 소인보다 먼저 냉동 수면에 들어가 멸망 이후의 처참함도 보지 못한 주제에 벌레처럼 죽어나가는 백성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일푼의 감정도 없으면서 나에게 할 말이 있단 말이오?
"허나, 그래서는 안되었다. 네가 하는 짓은......"
-적어도, 전하께서 나타나기 전까지는 령 제국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해야할 일이였지.
"........."
백희는 우리가 운이 좋아서 발견한 뜬금포 정식 계승자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우리들이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령 제국의 진짜 계승자는 재호 유귀 한 사람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에 와서 백희가 그때의 기억을 되찾지 못하는 이상 처참한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자는 재호 유귀가 유일하다.
나나 시온을 제외하면 세력이 없는 백희는 아무것도 못한다. 놈들이 광견 소굴을 꾸리고 존버타는 이상 루리로서도 요람에 다다를 수 없을테니까 오히려 황위에 가까운 것은 재호 유귀다.
"그때......무엇을 보았나?"
-그것은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일이오. 아마 본인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지만 기억하기를 꺼려할테지. 각오를 다잡고 넘어야 그 기억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터인데......가능하겠소?
"장담은 못한다"
-할 수 없다는 말이군. 그렇다면......여기서 죽는게 났겠소. 장례는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시기를.
이내 재호 유귀의 통신이 끊겼다.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은 통신, 다시 건다 하더라도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백희는 무표정했지만 눈은 심란한 감정이 가득한 눈으로 통신기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였다.
재호 유귀는 미쳐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반쯤 미쳐있었다. 본래의 성격은 유지하고 있는 주제에 과감함만 늘어서 유능함이 증가된 상태였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는 소심한 사람이 술만 들어가면 말이 많아져서 사교적인 성격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놈이 바로 그와 비슷하기에 그 시절보다 더 능력이 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잊고 있는 것일까......"
백희의 나직한 중얼거림만이 옅에 울려퍼질 따름이였다.
*
*
*
*
나도 여러일을 겪어본지라 기억 상실 정도는 예사 일이다. 사실 환생자로서 자주 걸리는 병이 있다면 오히려 기억 상실 쪽이 더 가깝다.
내가 보통 환생자로서 자아를 각성하는 나이는 최소가 5살 정도인데 그건 내가 본격적으로 초월자 반열에 들었을 때의 이야기다.
전생의 기억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보존된다. 하지만 가끔 영혼과 육체가 호환이 안될 때가 있는 법이였다.
영혼의 기억만 나오는 경우도 있고, 육체의 기억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건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아서 결국에는 모든 기억을 되찾았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말해보자면 백희의 기억은 충격을 받아서 과거를 잊어먹은 케이스다. 제일 흔한거지.
"나도 의사는 아니니까 뭐라 확답은 못하지만 그래도 그건 스스로 되찾을 의지가 있다면, 혹은 계기가 있다면 다시금 되찾는건 시간 문제가 될거야. 결국 냅두면 된단거지"
"무책임하군"
"네 기억 잃어버린게 내 책임이냐?"
"뭐, 반쯤 농담이다. 아무튼 이제부터 재호 유귀가 본격적으로 나를 노려 올 것이 분명하니 서둘러서 길을 떠나는게 좋을거다"
"이쪽 위치라면 대충 파악할 수 있으니......아, 혹시 추적 기능이 있을지 모르니까 이건 파기한다?"
"마음대로 해라"
도청을 못해도 위치를 파악하는 기능은 있을만 했다. 나는 영자 통신기를 그대로 박살내 가루로 만들고 촌락을 불태운 뒤에 다시금 드럼 호로 올라탔다.
마을을 불태운건 딱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놈들의 시체와 함께 처참한 마을 주민들의 시체 또한 장례를 치르기 위함이다.
우리가 여유가 있다면 그들의 시체를 모아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었겠지만 결국 사막에서는 그래봤자 흙이나 모래가 되어 사막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 순환하고 이어지며......악의도 없고 선의도 없다. 자연은 그냥 자연이며 누구에게나 공평할 따름이다.
생전에 인간의 도리를 벗어나 죽었다 한들 결국 죽은 뒤에 자연은 품에 안아 보듬을 뿐이였다.
"놈들이 이제 우리가 왔다는걸 알았으니까 추격이 거세질거야. 여태까지 겉모습만 그랬던 추격은 몰아넣기 위한 수단이였다면 이제부터는 잠도 제대로 못잘 정도로 바빠지겠지"
"뭐라고 했음?"
"아, 진짜 아저씨 있다는거 자꾸 까먹네"
"하지만 그대라 할지라도 다수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 법이다. 아무리 초월적이 강자라 한들 휴식없이 장기적으로 병력이 쏟아진다면......."
"광견 놈들이지만 통제가 힘들다 뿐이지 개개인의 수준 자체는 어지간한 들개보다 뛰어납니다. 오히려 마약까지 한 덕분에 육체능력은 더 강해서.....최악님이라도 놈들이 수천 단위로 쏟아진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에 나와 루리, 그리고 시온의 시선이 한군데서 마주쳤다.
이건 내 정체를 모르는 자들의 이야기다. 여태까지 여행하면서 이런저런 말이나 대화로 설령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까지 눈치 챘을지언정 대마왕이란 점은 꺼내지 않았다. 숨기려는게 아니라 딱히 꺼낼 필요가 없어서다.
아니, 웃으면 안되는데 존나 웃기네!!!
"권능 쓸거임?"
"권능이고 나발이고 저놈들은 곱게 죽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대로 찢여 죽인다"
"찝찝하면서도 쾌적한 여행길이 되겠네. 아저씨 여행 온다고 할때 상회입찰해서 부른 보람이 있다니까. 아니였으면 여기서 뒤졌을듯"
우리들의 태도에 진교는 의문을 품었지만 섣불리 묻지 못하고 백희만 물어볼 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당신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뭐......두고 보시면 알겁니다. 훗날 이야기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마을을 불태워 간단한 청소를 하고 우리들은 다시금 마을을 떠났다.
내가 있다면 남은 것은 요람에 이르는 것 뿐이다. 놈들이 아무리 개지랄을 해도 그걸 막진 못한다.
내 존재 자체가 오버 스펙이라.......건물 하나 철거시키겠다고 도시를 날려버리는 수준인데 오죽할까.
그리고 광견 이후의 손님은 생각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기껏해야 3일 정도일까. 광견 놈들이 몰려온 것은 똑같았지만 그 이후의 손님이다.
"으하하하하핫!!!!!"
"여자다! 따먹자! 죽이자! 먹자!"
"팔 한짝만 잘라주면 안잡아먹을께!"
"쟤들은 안그래도 미친놈들이 정신이 나가버렸네"
하지만 저것은 양동이다. 우리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눈에 띄는 병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놈들만 하더라도 세자리수, 싸우면 난전이 될 가능섶이 높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똥줄 좀 타는 모양인데.......후딱 처리하고 가자"
"권능 안쓴다며! 안쓴다며!"
"안써"
후우우우우우!!!!
대충 공기를 응축해서 몰려오는 놈들에게 날린다. 불꽃까지 쓰지 않는 이유는 그거까지 쓰면 살상력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놈들은 곱게 죽일 생각이 없다. 놈들은 짐승과 같은 녀석들이니 짐승 같은 대우를 해줄 뿐이다. 인간이 짐승에게 해주는 대우를 본다면 알만한 일이다.
단순 가축만 보더라도 거꾸로 매달아서 피 빼고.......뭐, 대충 그런 느낌.
콰아아아아아!!!
이내 응축된 공기의 탄환이 날아가 놈들 사이에서 폭발했다. 공기의 질량은 보잘것이 없으나 없지는 않다. 1기압이 왜 있는가를 보면 알기에 압축해서 날린 공기탄은 파괴력이 있다.
그래, 대충 사람의 사지 정도는 찢고도 남을만큼.
"끄아아아아아!!!!!"
"내 팔! 내파아아아아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엄마! 엄마!!!!"
풍륜차가 폭발해서 죽은 놈들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살아 있다.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다리가 여기저기에 널부러지고 흘러내린 내장을 주워 담으려 하는 것은 꽤나 처참한 광경이다.
뭐! 동정심은 들지 않지만!
"킬러퀸! 제 1의 폭탄!"
"이건 그것보다 스트레이 캣에 가깝지 않냐"
하지만 이건 단순한 함정.
그 뒤에 오는게 진짜다.
쩌어어엉!
"........아니?!"
"나는 댁이 온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댁은 이런 것도 예상 못했나봐?"
누군가 내 목을 노리고 단검을 휘둘러왔다. 하지만 단검은 역장에 의해 튕겨 나갈 뿐 나에게는 조금의 상처도 주지 못했다.
평범한 물리 공격이 아니라 영력을 머금은 공격이라 조금이나마 내 역장을 뚫을 가능성이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계란이 한 억 단위로 있으면 돌도 부술 수 있겠지만.....그거야 돌이 저항하지 않을 때 이야기고.
백희가 경악해서 한발 물러났다. 아무래도 잘 아는 녀석인것 같다.
"보이지 않는 술법사 암살자?! 네 녀석 재호 유귀의 술법사 중 한명이구나!"
놈이 이 거리까지 다가오는데 감지한건 나 한명 뿐이다. 심지어 시온도 눈치 못챘다.
아니, 시온은 나름 초월자인데 눈치 못챈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종족 특성상 원래 영자 쪽에는 약해서.......게다가 영력을 사용해 자신을 숨긴 사람은 과학 기술로는 감지 못한다. 이능력을 쓸 수 있어야 가능하지.
"공기를 굴절시켜서 자신을 숨기다니. 컨트롤이 여기 애들 수준은 아닌데? 물론 날 죽이기 보다는 여의보주를 훔치거나 인질을 잡아야 했어야 했지만......"
"바람의 유법(모드)!!!"
"너 아까 전부터 죠죠 드립 칠거야?!"
잠깐 시온에게 태클을 거는 사이에 술법사 암살자가 물러나 도망치려고 했다. 다시금 영력을 이용해 공기를 굴절시키고 그대로 물러나 도주한다.
"큭!!!"
"어딜 도망가?"
어중간하게 간보면 도망칠까봐 일부러 암살 당하는척 빈틈을 보여주었다. 3자리수에 달하는 광견 놈들은 내 틈을 만들기 위한 양동에 불과하고 본래 목적은 이놈의 암살이다.
아무래도 공기 계통에 특화된 주술사로 보이지만 컨트롤 실력이 여기 애들 수준이 아닌게 역시 귀족의 아래에 있는 놈이라고 생각된다. 멸망 이전의 령 제국 수준은 꽤나 높았던것 같다.
그래봤자 내 아래지만. 아무튼 나는 곧바로 놈을 제압해서 끌고와 목을 움켜쥐었다.
"유언은?"
"자, 잠깐......"
"네, 잘 들었고요. 다음 생을 기대해 주세요. 인생 가챠 단차 들어갑니다"
"암살자 같은거 했으면 다음 인생 가챠는 씹창일텐데! 3성 쓰레기 예장 정도로!"
우드득!
루리의 말은 일단 무시하고 그대로 놈의 목을 꺽어서 죽여버린다.
솔직히 이 이상의 정보를 캐내는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그런거다. 정보를 캐내야 한다면 재호 유귀 본인한테 해야하니까.
시온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놈의 시체를 보고 중얼거린다.
"인생을 거품처럼 살다 간 사나이......"
"왜 마지막은 메가톤맨이야?!"
그리고 그 대사를 우리가 하면 안되는거잖아?![작품후기]가끔 극렬하게 고기가 땡길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오늘인 모양이네요.
이럴 때는 두툼한 스테이크 같은걸 큼직하게 썰어서 소스 찍어다가 먹어야 합니다. 맛난걸 먹으면 글도 잘써져요.
아무튼 심심한데 연참이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