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여행하는 초월자들을 위한 안내서]내가 일을 끝내고 나오자 마을 광장에서는 멍한 눈으로 백희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끝에는 인간의 두개골이 있었다. 살점을 발라내고 열이 가해진, 희디 흰 백골이다.
다른데 쌓여 있는 뼈 무덤과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한가지 다른 점은 있다.
.........그 두개골의 크기가 기껏해야 성인 남성 주먹 두개 합친 수준이라는 것.
마치 갓난아기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이......이런 일이 정녕 현실이더냐?"
"내가 들어본적이 있는데. 사람 고기 먹는 것들은 어리고 여자일수록 고기가 연하다고 좋아하더라 존나 역겹지만 사실이긴 하고"
백희는 옷에 흙과 오물이 묻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아기의 백골을 갈무리했다.
꽤나 의외의 모습이다. 아니, 위정자 출신 치고는 상당히 융통성 있고 착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그녀가 하는 행동에는 가식이 없다. 순수하게 죽은 아기에 대한 연민으로 그러한 것이다.
유골을 만진다는 거부감이나 그런건 없었다. 그거 이상으로 슬픔이 그녀의 감정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꽤나 마음에 든다. 상황이 아니라 그녀란 존재 자체가.
"하지만 이게 현실이지. 인간성을 포기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잔혹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숨겨져 있어. 인간의 가능성을 악용하는 대표적인 일이라서 참 뭐같지"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 악의의 가능성 또한 무한하기에 이러한 일도 벌어지는 법이다.
자신을 희생해 마을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던 무화와, 그런 마을을 장악하고 대부분 인육으로서 섭취하고 여자는 강간한 놈들의 차이는 선의냐 악의의 차이다.
"단지 제국의 멸망 이후의 세상일거란 생각만 한게 안일한 것이였다......이렇게나 인간된 도리마저 저버린 자마저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인가?"
"나는 제국의 국모가 될 자였다. 죄를 짓지 않는다면 이 별의 백성은 누구나 나의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것은......."
냉동 수면장치 옆에 있던 미라가 된 외조부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이후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이 세상에 적응했다 생각했던 백희가 다시금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건 좋은 일이다.
좋은 위정자는 한줌 밖에 불과하지만 찾아보면 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국민이나 백성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연민을 느끼는 위정자는 더욱 드문 법이다. 내가 보기에 백희는 전 차원을 뒤져도 한줌은 커녕 한톨 수준의 위정자다.
백성의 고통을 모르는 왕은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왕이 될 뿐이다.
만약 그녀가 제대로 제국을 이어받았다면 태평성대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이고 만약일 뿐이지만 나는 어쩐지 그랬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요람으로 데려갈 보람이 있다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으아아아........!!!! 엄마! 아저씨! 촌장님! 누나.....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아아!!!!!"
정리하고 쌓은 뼈 무덤 앞에서 무화는 울고 있었다. 수십명이 살았던 촌락에서 생존자는 4명 뿐이며 그나마도 더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늘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처참한 현실이다. 그저 주술사로서 능력을 쓰면서 폭주하지 않는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포자기하고 날뛰는 놈은 자기 목숨도 가볍게 여기니까 제압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우리는 한동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착잡하고 쓴 맛이 올라온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고, 본격적으로 광견 놈들을 최조하기로 했다.
놈들은 스물 정도 되었는데 촌락에 비하면 적은 수지만 이놈들 전부가 전투 인원이란걸 생각해야 했다.
설령 촌락에 같은 수 만큼의 전투 병력이 있었어도 나머지가 노인이나 아이, 여자 같은 보호받아야 하는 인원이라면 승패는 뻔하다. 게다가 살인에 익숙한 놈들이니 오죽하겠냐마는......고기도 먹어본 놈이 더 잘먹는다고 하지 않는가?
아, 여기서 고기 이야기 하면 인육 생각나니까 방금 한말은 취소한다.
나는 우선 아까 인질극을 벌이던 놈부터 깨웠다. 상황을 파악하고 머리를 써서 인질극을 벌이는 것부터 아는 것이 많고 이 광견 무리 중에서 제일 위에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크.....윽!!!!"
"일단 몇가지 물어볼건데. 솔직하게 대답해라. 알았지?"
"좆까 새끼야! 퉤!!!!"
"아, 응. 그럴줄 알았어"
놈이 갑작스레 뱉어내는 누런 가래침을 슬쩍 피하고 해체용 단검을 들었다.
상대가 짐승이니까 이런거 써도 된다. 솔직히 고문 기술이 경지에 이르면 쓰던 안쓰던 상관은 없지만.
뜨드득! 콰직!!!!
놈의 왼손의 손톱을 전부 뜯어낸 후에 뜯겨나가 말랑말랑한 살이 나온 부분을 단검 끝으로 짖이기듯 뭉겐다. 다섯 손가락 전부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단순한 고문이라면 별거 아닌 모습이지만 단지 여기까지의 과정이 약 1초 정도 걸렸을 뿐이다.
고통은 뒤늦게, 그리고 한번에 찾아온다. 처음에는 조금 따끔하게 느껴질 뿐.
".......끄우아아그아아아아아으으아아아아악!!!!!"
"발성이 꽤나 괜찮구만. 세상이 달랐다면 성악가가 됐겠어"
인간이 고통에 겨워 내지르는 비명 소리는 근본부터 다르다. 그 왜 복식호흡이란거 있잖냐. 대충 그런 느낌이다.
손톱 하나만 뽑혀나가도 울부짖는게 인간이다. 고통이 강한 인간이라면 하나 정도 뽑혀나가도 눈물이 찔끔 흐르거나 이 악물고 참을 수 있겠지만 한 손에 모든 손톱이 뽑히고 그 뽑힌 부분이 짖이겨졌는데도 버티는 사람은 나도 몇명 밖에 보지 못했다.
"이름"
"그, 으으윽......채, 채정......."
"그래, 채정아. 몇번 더 물어볼건데 또 개지랄 떨면 안봐준다?"
인간은 나약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통과 쾌락, 둘중 어느 것에는 약하다. 고통에 강한 사람은 고문에는 버틸 수 있겠지만 마약 투여에는 버티지 못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뭔 개소린가 싶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보통 사람은 고문을 당할거라 생각하면 그 각오를 다지지만 입을 여는데 딱히 고통만 필요한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쾌락을 견디고자 한다면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그게 고통으로 바뀌면 또 달라진다.
인간의 불완전한 면모가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둘 다 강한 사람은 보통 초월자고.
"여기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했냐"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감금해서 강간했습니다......"
"얼마나 잡아먹었지?"
"거의 대부분......자살하거나 죽은 여자도 잡아먹어서.......윽, 끄우아아아아아악?!?!?!"
"아, 미안. 이건 화풀이"
내가 놈의 왼손을 가볍게 짓이겨 박살내자 놈이 비명을 질렀다. 보통 사람들은 오른손잡이니까 왼손 정도는 없어도 될거야!!!
아, 왼손잡이라고? 그렇다면 이제부터 오른딸잡이로 바꾸려무나!
"끄으으, 으어어어, 아아아아.....!!!"
"그럼 다음 질문......너네 마약은 어디서 났냐?"
"예?"
"설마 마약 같은게 땅에서 솟아난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지?"
"저, 적혼화는 원래 땅에서 자랍니, 끄으으아아아아아!!!!!"
"누가 말대꾸하래?"
나는 놈의 손을 팔뚝까지 썰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는 아주 조금 밖에 흐르지 않는다. 중요한 혈관은 피해서 해체했기 때문이다.
그 뭐냐, 과학실이나 박물관 가면 인간 신경이나 혈관 표본 같은거 있지? 산채로 그것처럼 해부했다고 보면 된다. 신경은 살아 있어서 존나 아픈 주제에 출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쇼크는 좀 걱정해야 하지만......마약 빤놈이 쉽게 쇼크로 죽진 않거든! 경험담이야!
"아무튼 너희들 전부가 한동안 복용할 마약을 그냥 얻었을리 없잖아. 분량이 꽤 될텐데 니들이 농사 짓는 것도 아닐테고 근처 촌락에서 먹을것도 없는데 한가하게 그런걸 심을리도 없고, 어디서 났냐고"
마약은 화학적인 분야를 쓸 수 없다면 보통 추출해야 하는게 정상이다.
대표적으로 이 분야에 알려진 물건이 양귀비, 거기에서 추출해낸 성분은 전쟁도 일으켰을 만큼 효과가 크다. 아, 물론 아편 전쟁은 영국의 병신크리가 더 크지만.
아무튼 농사 지어서 먹을거 수확해도 모자란 사람들이 쾌락 외에 볼거 없는 마약을 키웠을리 없다.
더군다나 놈들의 입에서 나는 찌든내의 농도가 높고 상태가 꽤나 나쁘다. 년 단위로 복용한거 아니면 정제된 마약을 빨았을 가능성이 높은데......마약을 재배하고 그걸 또 정제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여기서는 못해도 도시 레벨 아니냐?
"과, 광견 소굴에서 얻었습니다"
"광견소굴?"
"예......저, 저 앞의 무화산에 있는 광견 소굴에서......"
무화산이라. 화산이 아니라서 무화산인지, 아니면 무화의 이름이 무화산에서 따온건지 몰라도 아마 거기가 요즘 세력을 얻었다는 광견들의 본거지일게 분명했다.
......아니, 조금 낌새가 그렇다.
아무리 사람을 부려먹어도 광견 놈들에게 이러한 장기적인 시야기 있을리 없다. 놈들은 황충, 메뚜기 떼나 다름없다. 지나가는 것은 전부 파괴하고 먹어치울 뿐이지 뭔가를 생산해내는 능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다.
지금만 하더라도 봐라. 수십명의 인간이 살던 촌락은 고작해야 4명 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우리가 늦게 왔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들이 전부 죽었다면 놈들은 다음에 어떻게 할까?
마을을 운영해? 아니, 그저 다른 마을을 찾아 똑같은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일 뿐이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고, 죽으면 그 고기를 먹고......
그런 놈들이 마약을 생산하고 자기가 소모해도 모자랄 판에 뿌린다고? 보아하니 돈 내지도 못할텐데 그냥 무료로?
뭔가 흑막이 있는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다면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다.
"대충 알만한건 알았네"
"사, 살려주십시오.......뭐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이야, 너 태도 보면 역시 인간성이 박살난게 보인다니까. 정말로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텐데"
마을 하나의 인구를 대부분 죽이고, 그 시체를 먹고, 여자를 겁탈하고.......그런 짓을 저질렀는데도 살고 십다고 말한다는건 생존 본능 이전에 인간성이 없다는 반증이다.
만약 인간성이 남아 있다면 최소한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고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게 정상이거든. 나도 보통은 그런 사람들을 곱게 죽여주는 편이지.
하지만 나는 놈들을 그리 쉽게 죽여줄 생각이 없다.
"너네 프로메테우스라고 들어봤니?"
산채로 내장이 뜯어먹히는 기분이 어떤지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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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장기자랑을 해도 죽지 않는다. 배 가른다고 죽었으면 외과 수술은 왜 있냐?
이 땡볕에 배 가르고 누워 있으면 금새 말라 뒤지겠지만 인간의 생명력이란 질긴 법이다. 특히나 사람 고기 먹고 영양분을 보충한 놈들이라면 더더욱.
이곳에도 조류는 있다. 보기 드물 뿐이지만 그거야 종류가 그렇지 세계 특성상 시체를 먹는 까마귀 같은 조류는 얼마든지 있었다. 아무리 살아 있어도 움직이지 못하고 장기자랑을 하고 있는 놈들이라면......충분히 시체로 보이겠지.
"으어, 으허어어억!!!!"
"사, 살려줘! 살려줘어어어어!!!!"
"끄흐흐, 끄히히히히, 으하하하!!!!"
"으흑, 어어어어!!!!"
놈들의 비명소리가 교향곡이 되어 들린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보지 않았고 루리마저도 쪼끔 안색을 굳히며 돌아갔지만 무화만큼은 놈들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하다. 아무리 강한 아이더라도 아이는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일들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눈앞의 잔혹한 일을 견디고 지켜보는건 별개의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화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까마귀......아니, 내가 아는 까마귀에 두배쯤 큰 덩치에 독수리 같은 느낌의 조류가 놈들의 내장을 산채로 쪼아먹는걸 지켜볼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포기하고 인간을 먹었다면 하다못해 동물로서 자연이 순환하는 법칙에 들어가는게 그나마의 속죄다.
결국 인간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뿐이니, 그것은 초월자이지만 환생자인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도 죽으면 어지간해서 시체는 썩는다고. 좀 오래 걸리긴 하지만.
"네 마을을 이렇게 만든 놈들에 대한 복수는 했다. 하지만 아직 남은 녀석들은 있지"
".........."
"어차피 가는 길에 방해 될테니까 겸사겸사 쓸어버릴 생각인데......너는 어떻게 할거냐?"
무화의 계약은 마을의 이주를 지원해주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대가로 내건 것이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계약은 반쯤 파기 되었다. 지원해야 할 마을은 부서진지 오래이며 생존자는 고작해야 네명에 불과하다.
이미 맺은 계약은 계약이라 하지만 전제 조건 자체가 뒤틀려 있으니 잘만하면 최소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 애가 원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4명 밖에 살아남지 않았어도 생존자는 생존자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지만.......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게 마을 하나의 목숨이라 그러면 무거워서 책임감이 생길지 몰라도 4명의 목숨과 비교하면 가벼워진다.
차라리 처음부터 4명을 책임진다 그랬다면 몰라도 지금 무화의 마음은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울게 분명했다.
"........들은게 있어요. 촤악님이 모시는 분은 유랑귀족분이시죠?"
"뭐, 그렇지"
"제가 팔 수 있는건 이미 반쯤 팔려버린 저 자신 밖에 없어요"
그 상단주 아저씨랑 구멍동서라 되란 소리면 극렬하게 거절이다. 내가 아무리 동성애를 하긴 해도 일단 그건 사랑하는 사람 한정이다.
쇼타 시온 정도라면 쌉가능! 하고 외치고 달려들겠지만 다른 사람은 좀.......
"만약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그럴 때는 확실하게 나가는게 좋아. 그런식으로 본인조차 확신이 없으면 누가 사주냐. 상인 따라다녔다면 어떻게 광고를 해야하는지 대충 보지 않았어?"
".......저를 사주세요. 뭐든지 하겠습니다"
"좋아"
거래는 성립되었다.
한편으로 누군가 나를 보며 이럴거면 그때 몸을 팔던 이름 모를 소녀는 왜 도와주지 않았냐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지만......적어도 무화는 자신의 가치를 나에게 증명했다.
보석도 보증서 붙어 있는게 장물인지 아닐지 모르는 것보다 훨씬 비싼 법이다.
아무튼 루리 지갑이나 털러 가볼까!!!
[작품후기]* 작중 내용에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올리는걸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인터넷이 안되서 야밤에 기사님 부를 수도 없어서 어쩔까 하다가 껐다 키니까 되더라고요.
낮에 보시는 분은 별 차이 없으시겠지만......
그나저나 개인적으로 설국열차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애들 잡아먹는다고 말한 부분은 여러가지로 충격적이였습니다.
영화같은 미디어 매체에서 대놓고 인육 소재가 나온 것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하더라도 꽤나 신기했거든요.
이것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다(절망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