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말아주세요!488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여행하는 초월자들을 위한 안내서]기영 화자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백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납득했다. 오래전에 멸망한 제국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는건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가능한 일이였다. 애초에 귀족들은 그 시절에 멸망한 귀족들의 일부가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그 외모.....예, 기록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저의 조부님인 기영 화수님이 모셨다고 하신 황태녀 전하인 모양이군요"
"화수? 기억에 없는 이름이군. 나를 모셨다 한다면 내 시대의 사람일텐데 화수란 이름은 없었다"
"맞습니다. 그런 자는 없지요. 시험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해한다. 그 시절에도 의심을 해야하는게 당연했는데 지금이야 오죽할까"
서로 떠보는 것을 넘어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이제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멸망 이전 시절에 연관된 사람들끼리의 대화가 되었다.
"제국의 핏줄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만"
"눈치 채셨습니까?"
"시대가 지났다. 제국이 붕괴된지 오래이며 제국은 역사를 넘어 기록에도 남지 않게 되었단 것을 나 또한 인지하고 있다. 그 시절의 인간이라면 일말의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그대는 제국이 멸망한 뒤에 태어난 인간이지 않느냐?"
"예,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당신께 예를 표하는 것도 이 시대에서는 귀족이자 과거 령 제국의 핏줄이기에 보이는 존중에 불과합니다. 지금의 저는 황족에 충성을 맹세한 기영 가문의 가주가 아니라 도시 기영의 주인입니다"
"이해한다"
백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간의 가진 것을 생각하면 턱없이 차이가 난다.
비록 우리가 가진 여의보주를 그녀의 것이라 한다 할지라도 맨몸으로는 그런 보물 하나 지키지 못한다. 그에 비해 기영 화자는 남부에서 손꼽히는 도시의 주인이다. 가진 힘, 돈, 권력, 모든게 압도적인 차이가 있어서 매꿀 수 없다.
"보아하니 여행을 하신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모양이군요. 만약 필요하시다면 이곳에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괜찮다. 나는 갈 곳이 있으니 마음만 받도록 하겠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 저희들은 이 시대에서 오래 바깥에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오래 걸릴 여정은 아닐거다. 그 와중에 죽는다면......내 천운이 아닌 것이겠지"
귀족은 바깥에서 오래 살 수 없다고?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이 시대 사람들은 강한 햇빛과 열에 견디기 위해서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환경의 변화에 적응한 진화의 한 갈래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진화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오랬동안 동면한 귀족들이 그러한 경우다.
자외선을 받으면 피부 노화, 화상, 혹은 암 등의 빌병을 유발한다. 그걸 견디도록 진화한 이 시대 사람들보다 흰 피부를 가진 귀족들이 약할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자신의 목숨을 운과 같은 불확실한 것에 맡기실 생각입니까?"
"만약 운이 없었다면 냉동 수면 시설에 갖혀 잠이 든 채로 썩어버렸을테니까 지금 여기 있지도 못했겠지. 나름 내 운을 믿는 부분도 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흐음......."
생각해보니 그렇네. 우리가 그녀를 만난 것도 운이 강했고 인연 또한 크다.
북부에서 여의보주를 훔친 루리가 남부로 내려와 우리를 만나고 비밀 방공호에 있는 백희를 찾아 여정을 함께할 확률은 꽤나 적을테니 그것은 운, 혹은 운명이라 볼 수 있다.
........운명의 절대자가 웃으면서 이번 일을 짠 느낌이 가득하지만 모르는게 약이겠지.
"그리 생각하신다면 알겠습니"
슬쩍, 기영 화자의 시선이 나에게 왔다.
그녀의 시선은 루리나 진교에게 향하지 않았다. 들개 중에서 나름 유명해도, 수렵견 출신이여도 그런건 귀족 앞에서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듯 관심조차 없다.
그나마 내가 표면상으로 강화병으로서 그들의 호위를 맡고 있으니 이 정도의 관심을 주는거지 뼛속 깊은 선민의식이 그녀의 눈에서 느껴진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드리기에는 조금 불안합니다. 강화병 하나로는 지킬 수 있는 무력에는 한계가 있을테지요"
"뭐, 나름 실력이 있는자라서 말이다. 홀로 일기당천을 해내는 자이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호오, 그렇다면 백희님의 안전을 담당할 저 자의 실력을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나에게 물을 일이 아니겠지"
슬쩍, 백희가 발을 빼어 시온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백희는 나름의 염치가 있는지 자기 멋대로 나를 이용해먹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에게 주도권을 넘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당신의 호위인가?"
"뭐,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인건 맞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것과 누군가를 지키는건 별개의 문제인 법이지. 백희님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아도 괜찮겠나?"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 이거 그거군.
정치쪽에 영 잼병인 나도 얼핏 알것 같은 느낌이다. 기영 화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희를 끌어들이려고 하고, 그걸 위해서 일부러 나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진다면 안전의 부실함을 핑계로 잡아두려고 하고,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부상을 입으면 그걸 핑계로 잡아둘 확률이 높다.
........끌어들일 이유야 얼마든지 있다. 보아하니 강화병은 중요한 병력이고 표면상 유랑귀족인 상대라면 비호해주는 대신에 공짜로 강화병을 얻을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백희는 멸망한 령 제국의 마지막 남은 핏줄. 귀족들에게 있어 명분 싸움을 들어가면 최우선권을 지게 되는 최강의 조커였다.
무리를 해서라도 얻고 싶은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대로 힘으로 해결하면 이 도시를 적대하게 될테니 나름 원만하게 해결해야 했다.
"유경을 불러와라. 그리고 연무장을 비워둬라"
"알겠습니다"
기영 화자는 시종에게 말해서 유경이란 자를 부르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연무장이라고 해서 실외에 있을것 같았는데 의외로 실내에 있었다. 대충 이 건물이 50층 정도 되어 보이는데 그 중 한층 전체를 연무장으로 쓰는 것이다.
꽤나 시설이 괜찮았다. 이런저런 방비도 되어 있는것 같았고, 어지간한 전투로는 파손되지도 않을것 같았다.
이내 연무장으로 호출된 사람은 두터운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유일하게 보이는 맨살인 얼굴에는 자잘한 흉터가 엿보이고 그가 입은 갑옷은 일전에 보았던 은양위장 주대가 입은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였다.
위협적으로 웅웅거리는 갑옷은 백희도 알고 있는지 살짝 안색이 변했다.
"수신기갑?"
"역시 아시는 모양이군요. 종종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어서 확보하고 있습니다"
"어중간한 양산형 구동기갑과 다르게 소량 밖에 생산되지 않는 물건을 이 시대가 되어서도 잘도......"
"복원하는데 애를 먹긴 했습니다만 충분히 그 값을 하는 녀석이죠. 일당백인 강화병의 신체능력 조차도 열배 이상으로 늘려주는 물건이니. 두분의 호위가 아무리 일기당천이라 한들 상대할만 하지 않습니까?"
숙련된 전사, 거기에 강화병, 마지막으로 수신기갑이라는 상급 구동기갑까지.
도시의 주인인 기영 화자가 신뢰할만한 조건이였다. 충성심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눈에서 보이는 굳은 의지는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하의 됨됨이가 주인의 됨됨이가 되란 법은 없다. 그건 이 상황을 보면 답이 나오는 이야기니까.
"죽이거나 심각한 치명상만 입히지 않는다면 어떤 수단이던 허용한다. 승패는 먼저 항복하거나 제압당한 사람이 패배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양측, 동의하는가?"
"예, 알겠습니다"
"대충은"
룰은 지극히 간단했다. 사실상 죽이지만 않으면 뭐든 해도 된다는 의미다. 오히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룰이 적은 편이 더 편했다.
연무장 한가운데서 나는 그와 마주하여 대치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열번쯤 찍으면 사사룡도 베어낼법한 묵직한 대검이라 보기만 해도 꽤나 위협적인데 눈빛은 그보다 더 위협적이다.
어지간한 양아치는 눈빛만으로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어쩐지 동질감이 든다.
근데 험악한 인상에 용도 베어낼 대검 같은거 들고 다니니까 꼭 아직도 연재하다가 작가가 완결 내기 전에 수명이 다할것 같은 작품이 떠오르는건 내 착각이지?
차라리 사냥꾼x사냥꾼이면 내가 시온이랑 결혼할적에 전 차원 뒤져서 혼수로 장만한 완결권이 있을텐데!
"기영 도시군 금양위장 유경. 그쪽은?"
"최악. 유랑귀족 시온의 개인 호위"
"무기는 쓰지 않나?"
"보시다시피"
자기 소개와 간단한 질문 외에 말은 없었다. 묵직한 대검의 검격이 그대로 떨어져 온다.
그 검은 날이 서 있기는 했지만 베기보다는 짓뭉게고 으깨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아, 어째 매치가 되는 부분이 꼭 한팔이 의수로 되어 있는 광전사 같은 느낌인데. 물론 놈의 양손은 멀쩡했지만 말이다.
콰아앙!!!!
휘둘러진 대검을 파하자 그대로 땅에 직격한다. 꽤나 단단한 돌로 되어 있어 보였는데 그런거 상관없이 그대로 금이 가고 박살나 파편이 총탄 마냥 튄다.
놈의 대검이 다시금 들려지고 이번에는 내 옆구리를 향해 횡 베기가 날아온다. 이번에는 잠시 시간을 들여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는 압도적으로 가는게 좋을까, 적당히 상대해주는게 좋을까?
어느 쪽도 장단점이 있다. 압도적으로 가면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상대란걸 알려줄 수 있고 적당히 하면 친분을 다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필요한건 힘이겠지. 파워! 더 큰 파워! 존나 큰 파워어어어어!!!!!
쩌어어엉!!!!
그렇게 생각하면서 놈의 대검을 후려쳐 튕겨냈다. 금속이 충돌한듯 불꽃이 강렬하기 튀긴다.
"아니?!"
"기술도 좋고 강함도 있는데 상대가 나빴다"
다른 곳이였다면 싸움 속에서 오고가는 정이 어쩌고 하면서 친분을 쌓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보다 무력이 더 앞서는 세상이란 소리다.
지금은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서 격차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여기는 약자에게 연민과 동정을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곳에서 통하는 공용어는 바로 폭력이다.
"댁한테 잘못은 없지만 주인 잘못 만났다고 생각해"
되도록이면 화려하고 강하게 간다. 어차피 탐내고 있는 시점에서 좀 더 탐낸다고 진득하게 달라붙을 뿐이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대한 화려하게 깽판쳐서 섣불리 건드리면 좆되는 개새끼로 인식을 각인시켜야 하는게 좋다.
화르르르륵!!
쿠우우우우!!
양손에서 불과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염동력으로 기류를, 열양지기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다.
원래 나는 이런 속성계는 전문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식이다. 상대가 좋은 장비 좀 있다고 오만하다면 그 오만을 쳐부숴줄 만큼의 힘을 보여줘야 하기에 주술사인척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중속성?! 거기다가 강화병이라고?!"
"조금 진심으로 하려는 모양이군"
"저자는 황실의 비밀 병기라도 되는겁니까?!"
기영 화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게 느껴졌다.
강화병도 드물고 주술사도 드문데 그 둘 다인데다 주술쪽은 속성이 보통 하나인걸 보면 내가 규격외로 보일 수 밖에 없겠지.
"일단 잘가"
콰아아아아아아앙!!!!!
주먹과 함께 응집시킨 바람에 불꽃을 튀겨 단숨에 위력을 증폭시킨다. 원래 불에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해주면 쉽게 피어 오르는것과 같은 원리다.
상대는 나름 강했지만 딱히 걸리적거리는 수준은 못됐다. 하다못해 지구의 마스터 유저 수준도 아닌데 적당히 한것 만으로도 충분히 타격을 주고도 남는다.
맨몸으로 받아냈다면 조금 위험했을지도 모르지만 입은 장비가 좋아서 좀 충격 받아 기절한 것으로 끝냈다.
"이걸로 끝?"
"..........."
기영 화자의 욕망 어린 눈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음, 트러블의 예감!
아무튼 소인배라면 몰라도 귀족을 자처하는 이상 체면을 중시할 수 밖에 없다. 요컨데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뒤에서 수작질을 해도 표면적으로는 지킬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대결이 마무리가 된 상황에 기영 화자가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약간의 정리를 하여 이번 일을 끝냈다.
"확실히, 백희님의 호위는 문제 없을것 같군"
다만 시선이 나한테 향해 있는게 문제지만 말이지!
"유경을 일격에 패퇴시키다니. 설령 북부의 강자라 할지라도 그리 밀리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자들을 만났으니 내 운도 아직 따라준다는 뜻이겠지"
"........여정은 어디를 목적지로 하시고 계십니까?"
"아직 정확하게 정해진 곳은 없다. 하지만 가야 할 곳이 있다는건 확실하지"
"음......알겠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손님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러 주십시오. 편히 쉬신다면 "
"그러도록 하마"
양보와 타협은 여기까지. 하루 정도 일정이 지체되게 되었지만 차라리 그게 낫다. 귀족한테 쫒기거나 기약 없이 발이 묶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일단 가장 먼저 시온과 백희의 대우는 귀족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이 건물의 대부분의 시설을 사용하게 해주고 이동 또한 자유롭게 해준다.
다만 진교나 루리 같은 애들은 방을 내주긴 했지만 행동은 자유롭지 못하다. 아마 귀족과 다르게 출신이 들개라면 보통은 이런저런 물건 훔치거나 이상한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할테니까 당연한 반응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원하시는대로 사용해 주십시오"
"성심을 다해 받들겠습니다"
"이런걸 볼 때마다 여기 인권이 씹창이란게 생각나는데 말이지......"
대충 일곱명 정도로 보이는 각자의 매력이 있는 미인들이 내 시중 및 밤시중을 들러 내 방에 쳐들어왔다.
딱 봐도 포섭하기 위해서 각 잡는게 한눈에 보일 정도라 헛웃음만 나온다. 게다가 내키지 않는 기색이나 두려움이 엿보이는 사람도 세명 정도 있는게 좋은 방법으로 꼬신건 아닌것 같았다.
근데 한가지 말하자면 나는 '미녀'라 하지 않고 '미인'이라 했다.
왜!!!! 두명은!!!! 남자냐!!!!!
[작품후기]* 작중 내용에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미인계(남녀포함).
암시장에서 쌍둥이 남매를 세트로 팔 때부터 예상 했어야죠. 고대 그리스는 오히려 동성애가 진실된 사랑이라 생각해서......여기는 맛만 좋으면 된다는 식이지만요.
사회가 씹창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번성할수록 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설령 인간된 도리를 벗어난 일이라도 말이죠.
뭐? 그래도 힘으로 안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