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흉의 대마왕-476화 (476/507)

476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여행하는 초월자들을 위한 안내서]축제는 애매하게 마무리가 되고, 원래 마을의 한 집에서 머무를 예정이였던 우리들은 도로 드럼호로 돌아와 다시 비좁은 곳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딱히 쫒겨난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이곳으로 왔을 뿐.

"언니 모습 드러내면 그럴줄 알았는데......결국은 터져버렸군"

"왜 그런겁니까?"

"내 피부색 보여?"

"건강한 느낌의 까무잡잡한 피부입니다만"

"응, 조금 타서 그렇기도 하지만 보통 이곳 사람들의 피부색은 이래. 지구에는 있는 황인이나 흑인은 여기에 없고 다 이런 색이야"

"네 말을 들으니 백인은 있단 소린데......"

나는 시온의 피부를 보았다.

곱디 고운 흰 피부다. 그것도 단순한 백인 수준이 아니라 '저 빛을 보라! 곤도르가 원군을 부른다!'하고 소리칠법한 그런 피부색이다.

원해서 이런게 아니라 이게 디폴트다. 시온이란 하논이 인간이 되면 이런 모습이 될거다, 해서 정해진 선이란 뜻이다.

초월자로서 시온이 가진 영혼의 본질같은거라고 할까. 결국에는 영혼도 미인이라는 소리다.

"이 더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천성적으로 이런 피부를 타고날 수 밖에 없어. 하지만 유일하게 흰 피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지"

"그 사람들이랑 저를 착각했다는 소리입니까?"

"응, 조금 이야기 길어질텐데 괜찮아?"

"계속 해보십시오"

이 세계가 멸망할 적에.

아주 오래전에 세계가 멸망했다. 하지만 그 전에 몸을 피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벙커나 쉘터 같은 곳으로 몸을 피한 사람들은 그대로 세상이 다시 안정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물론 단순히 지낸다면 식량이나 자원이 부족하겠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냉동수면에 들어가 멸망을 피했다.

멸망 이후 지상의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 유전형질이 바뀌었다. 살인적인 태양광에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멜라닌이 많이 분비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세균 같은 부가적인 이유도 있긴 있지만 아무튼 일반적인 지구의 흑인과 같은 이야기다.

이후 시간이 지나 피난소에 있던 사람들이 냉동수면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지상의 사람들과 다르게 온전한 멸망 이전의 기술력을 가지고 세력을 구축, 그렇게 하여 거대한 도시의 지배자가 되거나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현 문명의 피부색과 명백하게 다른 그들의 흰 피부색을 보며 귀족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문명을 다시 세우지 않는거지? 대충 봐도 멸망 이전의 기술이 있었다면 충분히 발전하고도 남았을텐데?"

"그런 피난소에 기술자가 들어갔을거라 생각해, 아니면 좀 있는 사람이 들어갔을거라 생각해?"

"아하, 결국 쓸 수는 있어도 만들지는 못하는거구나"

"사람사는데는 여기나 저기나, 멸망한 곳이나 다 같은것 같습니다"

그러한 피난소에 일반 시민까지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있어도 그들의 시설보다 가진자들의 시설이 훨씬 좋고 오래 버텼을테지. 결국 살아남은건 그런 자들이란 소리다.

이후 흰 피부의 귀족들은 우월감에 젖어 행동했다. 멸망한 세계, 우월한 기술력, 차별된 권위, 그것들이 합쳐져서 그들은 이 시대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만 있는건 아니고 전쟁으로 세력을 잃거나 기타등등의 이유로 자기 거점인 유적에서 쫒겨난 귀족도 있거든. 대부분 자기 거점에서 벗어나지 않는걸 생각하면 아마 시온 언니도 그런 부류의 귀족으로 생각할거야"

"울 마누라 건드릴 가능성은?"

"썩어도 준치라고, 어지간해서는 건드릴 생각 안할껄"

이런 여행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시온의 안전이다. 아니, 시온이 다칠리도 없지만 몇놈 뒤지는 것보다 시온 마음 상하는게 더 빡친다.

윤리와 법, 도덕이 박살난 이 세상에서 시온 같은 외모를 지녔다면 남자들의 표적이 된다. 강간이나 폭력이 한결 가까운 상황에 힘으로 하려는 인간 미만의 것들이 차고 넘친다.

그나마 이 마을에서 시작은 잘 찍긴 했지만......다음부터는 이런 사람들만 만날거란 보장은 없다.

"아마 이 드럼 호도 언니의 유물이라 생각할껄"

"유적에서 나온건 죄다 유물이라 부르는 모양이구만"

"원래 미지를 뭉뚱그려 표현하는건 대부분의 인간의 특기잖아"

시온이 귀족 취급 받는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다. 대접을 받는건 좋긴 하겠지만 노리는 자도 분명히 있을테니까 말이다.

뭐, 덤벼오면 뒤지는거지만.

드럼 호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 일찍 수원지에서 물을 길어 물탱크를 채웠다. 꽤나 많이 들어가서 루리가 물탱크의 게이지를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크으으, 처음으로 물탱크 가득 채웠다"

"이 정도면 한동안은 물 걱정 없겠네. 가끔 씻을 수도 있겠다"

"하아아앙! 아저씨의 액체가 한가득 들어왔어!!!"

"너!!! 그런 섹드립치면 못써!!!"

"비처녀한테 뭘 바람?"

힐끔힐끔 이쪽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재각각이다.

어제는 그나마 모래 호랑이의 가죽으로 인해서 호감과 경외의 시선이 강했다면 이번에는 적의 어린 시선도 종종 있었다. 아무래도 도시가 아니라 이런 사막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이유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있다면 휘둘러보고 싶고, 휘두르면 대상을 정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 사람의 본성을 알고 싶으면 권력을 쥐어주란 말도 있고.

"얼른 가자. 얽히면 귀찮아져"

"다른건 괜찮겠어? 본전이라도 뽑아야 할텐데?"

"나름 가죽값 될만큼 물을 뽑았으니까 괜찮아. 계속 있다가는 촌장이 질척거릴거야"

루리의 말처럼 우리가 마을을 떠나던 찰나 촌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광경을 보았다.

귀족이란 한편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이런 곳까지 올 정도의 귀족이라면 이용해먹는게 좋을거라 생각하는걸까. 모래 호랑이 가죽건은 욕망을 잘 제어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모습은 확실히 과욕이였다.

"재기를 노리는거야. 이런 마을의 촌장쯤 된다면 도시에서도 나름 알아주는 요직에 있었을테니까. 귀족의 유물을 얻어서 마을을 부흥시키면 다시금 도시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거겠지"

"그런 사람 본적 있는 말투입니다만"

"응, 우리 마을 촌장도 그랬음"

드럼 호는 다시금 사막을 항행하기 시작했다. 수원지 주변은 그나마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지만 그 너머로 가는 순간 다시금 사막이 펼쳐진다.

우리가 넘어왔던 대사막이란 곳도 며칠은 항행해야 넘어올 수 있었다. 그나마도 중간에 나타난 우리들을 루리가 픽업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편도로 2주 넘게 걸리는 아주 큼직한 사막이다.

도보로 건너려고 했다면......주 단위는 고사하고 몇달이 걸렸을거다. 드럼 호도 호버 기능이 있어서 사막의 바다를 건너는데 그리 장애를 받지 않은 덕분에 빨랐던 것이니까.

"근데 말이야. 그런 대사막을 왜 넘어온거야?"

"그야 언니 아저씨 둘 픽업하려고 온거지"

"그렇다면 차라리 기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지. 아니, 애초에 우리한테 알려준 좌표가 대사막 한가운데인 시점에서 의심스러운게 좀 있는데"

하다못해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이해를 한다. 하지만 좌표는 사막 한가운데다.

루리가 좌표를 알려준건 한참 전의 일이니 결론은 그거다. 루리는 대사막을 건너가야 할 일이 있었고 계획까지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날 부려먹겠다는 소리는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뭔가 앞으로 일어날 트러블에서 쓸만한 인력을 얻겠다는 의미로 생각되는데. 맞지?"

"오또케 알아찌!"

"너네 루리들은 항상 들키면 그 소리 하더라"

나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알려주지 않으면 여기서 하선하면 그만이다. 루리라고 마냥 편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음......사실 난 쫒기고 있어"

"누구한테?"

"북부 귀족 중에서 가장 세력 쩌는 놈인 재호 유귀라는 놈이 있어"

"염병, 뭘 하다 쫒기게 됐는데?"

"그냥 물건 하나 훔쳤는데 죽을듯이 쫒아오더라고"

"루리는 굉장한 것을 훔쳐갔습니다!"

뭘 훔쳤는지 모르겠지만 쫒기고 있다면 그만큼 중요한거일 확률이 존나 높겠지! 루리는 여기나 저기나 트러블 메이커냐!

"그치만 이러지 않으면 귀족짱은 나한테 관심도 없는걸!"

"갸아아아아아악! 유토피아놈이 만든 좆토피아라도 있는겁니까!!!!"

"앗, 시온이 발작한다"

"뭐야, 킹치만 거부반응이라도 있어?"

"아무튼 왜 훔쳤는데?"

"이 새끼들은 여유가 있으면 좀 더 많은 사람을 풍족하게 만들 생각을 해야지 전쟁할 생각 밖에 없거든"

"그건 어쩔 수 없네"

다른 이유라면 나도 정색하겠지만 그런 이유라면 나름 납득할 수 있다.

나야 전쟁 같은 것은 '전쟁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회! 파괴한다!'같은게 가능하니까 신경 안쓰지만 이런 씹창난 세계에서 전쟁을 또 일으켜봤자 남는건 잿더미 뿐이다. 아니, 그나마 남아 있던 잿더미도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봐"

루리는 드럼 호의 창고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터운 금속재질 통에 자물쇠까지 걸어둔것인데 자물쇠는 없지만 철사로 단단하게 묶어서 공구 없이는 열기도 어려워 보인다.

워낙 구석에 처박혀 있는거라 며칠간의 항해 중에 나도 본적이 없던거다.

이내 루리는 한참 끙끙거리더니 철사를 풀어내고 안에 있던 것을 꺼내 보여준다.

"내가 놈들한테서 훔친게 이거야"

"이건......."

반응은 시온에게서 들려왔다.

커다란 유리구슬 같은, 마치 용이 가지고 다닌다는 여의주 같아 보이지만 반투명한 내부에서는 신비하게도 무언가가 웅웅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작은 무언가가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있는것 같았다. 마치 고급 손목시계의 무브먼트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이건 꽤나 의외입니다. 드럼 호의 기술력을 보고 조금 흥미가 생기긴 했었지만 이런 물건이 있었을줄은 예상 못했습니다. 흠......"

"뭔지 알겠어?"

"설마 모르고도 훔친겁니까?"

"내가 알기로 이건 꽤 여러가지 기능이 있는걸로 알고 있거든. 동력원이기도 하지만 일부 유적의 접근 허가 권한을 대신하기도 해"

"호오"

나야 이런 물건 보는 눈은 없다. 뭔가 복잡한 기능이 달려 있는데 써보지도 않고서 알아보기에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기술 분야는 시온의 전문이다. 설령 이능력 계통의 기술이라도 일단 권한이 있다면 시온이 다루고 파악하는건 문제 없다.

"꽤나 수준이 높은 영자 발전 기술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부에 들어가 있는 것은 미량의 영자와 고밀도의 엑토플라즘......아니, 이 정도의 양을 추출하려면 문제가 꽤나 많을텐데......"

"기능은 파악할 수 있겠어?"

"일단 루리양이 말한대로 발전 기능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것 하나가 도시 하나의 전력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개쩌네"

"저희 호라이즌의 솔리드 리액터 같은 것에 비하면 한참 저레벨 기술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거 하나로 걸어다니는 핵 발전소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온은 좀 더 세세하게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말을 이었다.

"단순히 이것만으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영자는 감정에 호응하는 영혼의 최소단위지만 이 유리구슬 자체가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대로는 그냥 보기 예쁜 유리구슬이나 다름없습니다"

"북부 귀족 수좌인 유귀는 이걸 여의주라 불렀어"

"차라리 드래곤볼이라 부르지 그러냐"

생각해보니 여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인데 꽤나 동양권이네. 언어도 한글이랑 비슷하고.

막 세종대왕님이 불로불사가 되어서 통치하다 세계대왕이 된 이문대 같은건 아니지? 나중에 반쯤 박살난 이순신 장군님 동상 보면서 오열해야 할까 살짝 고전틱한 발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대략적인 기능은 파악했습니다. 이게 있으면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겁니다"

"이런걸 훔쳐서 뭘 찾으러 가는거야?"

"남부에 있는 유적. 정확히는 '요람'이라 불리는 시설이야"

"뭐하는데인지 대충 알만하군"

루리가 찾는 곳은 유토란 이름의 낙원이다. 하지만 실제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곳을 찾아 나서는 것과 낙원을 만들고 거기에 유토란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 중에서 어느게 더 나을지는 뻔한 일이다.

"정말로 유토란 이름의 낙원을 찾는건 차선책이야. 최선책은 낙원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거지"

"그래서 그걸 훔쳤습니까?"

"내가 안훔쳐써!!!!!"

"증거가 여기에 명백하게 있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하지만 추적자도 대사막을 건넜다면 어느 정도 떨어졌을 것이다. 배 타고 2주 넘게 왔는데 들러붙는 놈들도 적지 않을까?

"아, 근데 걔네들 따로 통신망 있음"

"어?"

두두두두두두!

저 멀리서 사막의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무언가가 떼거지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엔진 소리가 들린다. 드럼 호와 같은 기술을 쓰고 덕지덕지 붙이고 기워 개조한 이동수단들이 몰려온다.

시온이 거기서 몰려오는 수십대의 호버 바이크를 보면서 손가락을 깍지끼며 소리쳤다.

"8기통! 8기통!"

"아, 시발 저런 놈들 있을줄 알았다. 근데 그렇게 좋아하는건 좀 아니진 않냐?"

"빨통! 빨통!"

"루리 넌 섹드립 좀 집어넣어!!!!!!"

나는 되도록이면 그 사회의 문명을 존중하고 그곳의 법을 따라주는 편이다. 한국에서도 시비가 걸리면 패기보다 경찰을 부른다.

근데 여기는 무법지대지?

장기자랑 하나 해볼까?

[작품후기]* 작중 내용에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과거 기득권층이 쉘터에서 살아남아 이후에 세상으로 나온 뒤의 모습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가진게 많으면 준비할 수단도 많고, 그렇기에 살아남을 확률도 높겠죠. 원래부터 탐욕스러운 자는 많지만 그런 자가 힘까지 가지고 제지할 수단마저 없다면 폭주하기 마련입니다.

가진게 많은 사람이 다 나쁘다는건 아니지만 권력에 취한 사람은 본성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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