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그럼!457회
[초월자한테도 치정 문제는 중대사다]일단 이 문제에서 중요한건 예진이다.
요즘 잘 돌봐주지 못했어도 나름 부모로서의 정은 주고 있는 아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에 다른 좋은 집에 입양 보냈지 데리고 있지는 않았다.
근데 예진이는 아무리 그래도 고3이다. 루리야 이제 슬슬 성인이 됐을테지만 예진이는 그래도 미성년이다.
포스 유저니까 육체적으로는 완숙해 있었어도 백리 이 새끼는 미성년인 애를 건드린 것과 같았다.
........음, 일단 내 육체적 나이가 18살인데 시온이랑 한건 적어도 지금은 미뤄두자. 괜히 복잡해진다. 어차피 속은 둘 다 수천살이고.
"니가 미성년자랑 잔거 알지?"
".......네"
"변명 안하고 곱게 대답하는거 보니까 잘못한건 알고 있는 모양이네. 피임은 했어?"
"아, 그건 했어요"
"뭐, 너희들 마음은 이해가 안되는건 아니다만......."
백리는 충격에 빠져 있었고 한창 때의 남녀가 만나서 그 충격을 해소할만한 일이라고는 그런것 밖에 없을테니까. 한편으로는 예진이가 방법을 잘 고른걸지도 모른다.
근데 방법을 잘 고르고 나발이고 그건 별개의 문제지. 안그러냐?
"너 내가 지금 여자인거랑 자기가 환자란거에 감사해라"
"네?"
"아니였으면 지금 당장 팼어"
".......어, 죄송해요"
"죄송하면 됐다. 그리고 어차피 다 나으면 팰거야"
"안팰 생각은 없는거죠?!?!"
"샷건 하나 들고 올테니까 퇴원하면 집 가지 말고 병원 앞에서 기다려. 어차피 다시 들어갈테니까"
"도대체 어떻게 팰 생각이예요?!?!"
솔직히 미성년자 딸내미 건드린거 치고는 관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내가 한대 작정하고 치면 샷건 한대 맞는 것보다 훨씬 더 아프고 목숨도 위험할텐데 말이야.
아, 씁, 여자 몸뚱이가 되어서 그런가. 괜히 봐주려는 마음이 생기네. 여자 몸은 다 좋은데 모성애 같은게 생겨서 약간씩 제지가 걸리는 편이다. 이게 나쁜건 아닌데 개인적으로 남자쪽 몸뚱이가 더 좋다.
로드에 이르면 성별 문제도 해결 되겠지만.......솔직히 이렇게 조금씩 다른 재미도 있어야 환생 하고 그러지.
"그리고 한가지 더. 일이야 잘 풀렸다 치더라도 너는 아니야"
"........예"
일은 잘 풀리고 상황도 잘 돌아가서 남은건 정리와 평화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백리의 처지는 심각해진다. 이미 자기가 한 짓을 다 까발렸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둘리 없었다.
사태가 진정되고 사람들이 다시 평화를 찾아 행복해질 때 쯤에도 백리는 거기에 끼어들어갈 수 없다. 본인 스스로의 납득과 세상의 납득의 문제다.
"우리가 실드 쳐줘도 기껏해야 호라이즌에서 생활하는 정도지 그 이상은 무리야. 평생 사람 안만나고 살 생각 같은걸 해야할껄. 그럴 수 있겠어?"
"저는......."
"자살같은거 생각하지 마라. 예진이 운다"
"..........."
나는 백리의 눈에서 자포자기한 기색을 읽었다. 현 상황이 이렇게 마무리 되었으니 백리가 자기 자신이 해야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뒤에 남은 사람이 할 일은 뻔했다.
지금 그가 진 책임은 무거운 것이다. 외면하거나 짊어지거나, 어느 쪽이던 힘든 길이며 평생을 가더라도 그 책임을 질 수 있을것 같지는 않다.
"일단은 쉬면서 잘 생각해봐"
".....네, 알겠어요"
내가 뭐라 더 말해줄 수는 없는 부분이다. 백리가 나처럼 강한 것도 아니고 서로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나는 사람을 죽여도 그 죄를 속죄할 마음은 없다. 어차피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
만약 백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대영웅 뿐이겠지.
나는 슬쩍 다시금 일하던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
내가 백리 이야기를 하니까 최길현이 아, 하고 무언가를 깨닫는다.
"일어났나보네. 나도 나중에 그러면 만나러 갈까"
"그 녀석 한편으로 자살도 생각하고 있던데 대영웅이면 가서 말려봐. 설마 그런거 하나 못하는건 아니지?"
"원래 사람을 살려는 사람을 죽이는건 간단하지만 죽으려는 사람을 살리는건 어려운 법이야"
"그래서 못해?"
"너야말로 말하는 방법을 다르게 했으면 좋겠는데"
최길현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이미 눈치 챘다는 뜻이다.
"딱히 네가 그렇게 도발하지 않아도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가서 조언 좀 해줄거야. 그리고 나한테 바라는게 있으면 그런식으로 말하지 말고 간단하게 도와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돼"
"어이구?"
"난 너한테 아직 돌아갈 길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 이 녀석은 그런 녀석이다.
대영웅이 대영웅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강하고 악을 징벌하는 존재가 아니라서다. 자신의 정의를 내세우고 타인을 배척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놈은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다.
이런 나 같은 인성 파탄 살인귀한테도 내밀어줄 손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어지간히 그러지 않고서야 놈은 다른 사람을 구해주려고 한다.
그것은 모두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러하겠지. 그래서 대영웅이라 불리는거다.
"그 이야기는 집어 치워. 만날 때마다 잔소리냐. 사람 죽인게 시체로 쌓으면 지구 만큼은 아니더라도 달 정도는 나올것 같은 사람한테 보여줄 자비심이 있으면 재림 예수회인지 뭔지 사탄이 조진 애들부터 구해보지?"
"자의랑 타의의 문제지. 그 죄를 갚아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도 있고. 너는 환생자라서 여태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을텐데? 지금부터 사람을 구하는데 힘을 쓴다면 언젠가 죽인 사람보다 구한 사람이 더 많아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거참 등신같은 소리 하네"
나는 그대로 대화의 주제를 끊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회피다, 도망이다, 현실에 직시하기 싫어서 하는 망설임이다.
나는 이미 선을 넘었다. 내가 환생자가 아니였을 때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죽였을 때부터 이미 구원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법 조차 나를 심판할 수 없으니 나를 심판할 합당한 자격이 있는 대영웅에게 죽기를 바랄 뿐이다.
나에게 평온한 최후는 없다. 그저 싸우다가 죽는것 뿐. 그것 뿐이다.
이런 내가 싫다는건 나 자신도 깊이 깨닫고 있다. 아마 놈이 구하려는 나는.......이런 나의 내면일지도 모르겠지.
.......아, 여자가 됐다고 감수성이 좀 더 풍부해졌나. 아무튼 다시 일로 돌아가자.
"다음은 어디야, 이탈리아? 이야, 꽤 정겨운 곳이네"
"그러고 보니까 거기 교황님이 사탄이랑 어쩌구 해서 성인으로 추대받고 있다던데"
"그 새끼 지옥에서 민트초코 처먹이는 놈이잖아. 쫄아서 튄거 아님?"
"원래 사탄은 선한 자를 이기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지"
이탈리아는 어느정도 인프라가 남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국가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체계가 붕괴하여 이주를 선택한 쪽이다.
이런 쪽이라면 우리한테 굽히고 들어올테니까 적당히 챙겨주면 이야기가 쉬워질거다. 나는 잠깐 휴식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마음을 풀고 그대로 이탈리아 대표를 들어오게 시켰다.
"실례 하겠다"
"어.......?"
들어온 사람은 꽤나 독특하면서도 내 기억 저편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다.
골든 블론드의 선명한 금발. 그리고 그것과 대비되는 검은색의 안대를 차고 한쪽 눈을 가렸으며 가슴은 작지만 라인은 확실하게 여성인 모습.
약간 무뚝뚝한 시선이 나와 직시한다. 하지만 나도, 그녀도 서로의 눈에 있는 감정을 어쩐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
"이탈리아 대표로 온 아드리아나 파첼리라 한다"
외모가 닮은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름까지 같은 것은 나도 뭐라 섣불리 대답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금발, 안대, 빈유 같은 내 이상형 소리 하는 속성이야 전세계를 뒤져보면 한명쯤 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내가 기억하는 이름마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
용하연이나 히비키 같은 전생에 쟁쟁했던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초월자였기 때문이라고 봐도 된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반갑습니다. 최길현이라고 해요. 우선 앉으시죠"
내 상태를 눈치챈건지 최길현이 슬쩍 나 대신 주도권을 잡아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의 호의에 나는 살짝 물러나서 생각한다.
내가 아직 환생자가 되기 전에, 내가 최악이란 이름으로 나 자신을 확립했던 환생 1회차의 삶에서 내가 사랑했던 여성이 눈 앞에 있었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그래봤자 타인이다.
내가 히비키를 슈텐과 영혼이 같을뿐인 존재라 파악했던 것은 기억의 유무였다. 그것 또한 용화정과 용하연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 기억도 주도권이 누군가에게 있는가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진다.
설령 기억을 찾는다 할지라도 지금의 히비키가 슈텐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같은 외모, 같은 영혼......그런다 할지라도 그녀는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니다. 그저 그릇만 같을 뿐 내용물은 같지 않다.
"세세한 부분을 조율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이주를 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예, 그럼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잠깐 생각하는 동안 최길현이 이야기를 끝냈다. 어차피 나도 크게 관심은 없던 부분이고......워낙 눈 앞의 일이 충격적이여서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최길현에서 나를 향한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볼일입니다만......혹시 어디선가 절 본적 없습니까?"
"........."
나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뭘 보고 나랑?
기억은 분명히 없을텐데? 있다 하더라도 용하연이 용화정인 시절에 보여주던 기시감 정도일텐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지금의 나를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남자로서의 외모도 그때랑은 조금 다르고 여자로서의 외모는 다른 사람이라 볼 정도로 완전히 다르니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뭘 보고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거지?"
"단순히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눈매가 익숙해서 알아봤지. 대마왕 최악 아닌가?"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당신이랑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소리인데?"
"하백리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전생에 대한 기시감이라 하더군"
백리 이 자식 도움 참 안되네. 하필이면 그걸 그렇게 이야기 해주고.
본인에게 악의는 없었겠고 눈치란걸 바랄 상황도 아니였을 테니까......대신 퇴원하는날 보자.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쩔건데?"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전생의 나는 당신과 어떤 사이였나?"
"어차피 기억도 없는거 알아서 뭐하게"
"적어도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는 알고 있을테니까 말이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그런 원수 사이였다면?"
"그런것 치고는 이탈리아 어를 꽤 잘하는군. 그쪽 출신도 아닐텐데 원수를 위해서 언어 하나를 배우나?"
"........아"
나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녀와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지구권 언어 중에서 중국어, 일본어, 영어 같이 메이저한 언어 외에 특이한게 있다면 이탈리아어 정도인데. 그것은 그녀와 연인이였기 때문에 습득한 것이다.
마누라가 외국 사람인데 그 나라 언어를 모른다는게 솔직히 말이 안되니까. 아니, 솔직히 10년만 외국인이랑 같이 살면 그쪽 언어는 기본적인 회화 정도는 할 수 있겠다, 그치?
"그 정도로 확신하고 있다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거 아니야. 그럼 됐잖아"
"왜 나를 피하려고 하나?"
"그건........"
설령 그녀가 기억을 되찾는다 할지라도. 기억을 되찾아 내가 아는 아드리아나 파첼리가 될지라도.
지금의 나는 그녀가 알던 내가 아니다. 일개 인간이였던 최악이 아니라 최흉의 대마왕인 최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마주하기가 겁이 나는 것이다.
절대자를 앞두고도 겁이 나지 않았는데, 과거의 인연을 앞두고 확실하게 끝맺지 못하는 것이 내가 나약하다는게 느껴졌다.
......이래서 내가 아직 확실하게 로드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나약함이 나에게 아직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말이다.
차라리 완전하게 인간성을 포기하면 이렇게 고뇌할 이유도 없었을텐데. 이럴때 생각하면 조금 그렇다.
"일단 이야기 할게 많이 보이는데. 잠깐 밥이나 먹고 할까요?"
우리 두사람이 할 이야기가 많은 것을 눈치챈 최길현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래, 일단 밥부터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
예전에도 그랬으니까.[작품후기]* 작중 내용에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악이 장모님이 아니라 장인어른이였으면 백리한테는 주먹이 날아갔을텐데......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튼 본처 내습.
최악의 수천년 환생 대부분의 지분은 시온이 가지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걸(1회차) 본처가 가지고 있음.
이거슨 마치 사혼의 구슬 조각을 거의 다 모은 나락이랑 마지막 한조각 가지고 있는 이누야샤 같은 느낌.
치정 문제는 개꿀잼이니 오늘 중으로 하나 더 올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