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회
[휴거에는 뭐하세요? 바쁘세요? 구해주실 수 있나요?]지친 몸을 이끌고 전선으로 돌아온 백리를 맞이한 것은 휴식이 아니라 또다른 적이였다. 그것도 해치웠을거라 생각했던 초대형 적성종이.
시작은 땅 속에서였다. 전선에서 죽어나가는 적성종의 사체를 먹어치워 다시금 형태를 되찾고 이내 크기를 불리다가 적당한 크기가 되었을 때 쯤 땅 속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 미터, 다른 거인형 적성종에 다르지 않는 크기였다.
혼잡한 전선에서는 그저 난입한 새로운 적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놈을 향해 총구를 겨누자 사방의 모든 적성종들이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백, 수천, 수만의 적성종은 그대로 한데 뒤엉켜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변했고 이내 하나가 된다.
쿠웅!! 쿠웅!! 쿠웅!!!
불길하게 박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부 장기도 없으니 심장이 만드는 내는 소리가 아니라 라프 에너지가 내는 소리였다.
"저, 저건 뭐야?!"
"대형이다!!! 초대형 적성종이다!!!!"
그것은 단순한 초대형이라고 하기에 너무나도 거대했다.
비록 백리가 막 해치웠던 놈보단 작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하기 쉬운것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수만 마리의 적성종들이 융합한 놈의 크기는 적어도 200미터는 되어 보였으니까. 땅에서 본다면 머리가 까마득할 정도의 크기였다.
"무, 슨"
누군가 얼이 마져서 중얼거리며 총을 손에서 놓아 떨어트렸다.
압도적인 크기는 압도적인 절망을 낳는다. 인간이 아주 작은 생물이란걸 새삼 깨닫게 해준다.
지구를 지배한 만물의 영장이고 나발이고 할 것 없이 짓밟히면 뿌직, 하고 죽는 개미만한 존재라는걸.......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여주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우!!!
놈이 팔을 들어올렸다.
그대로 휘두를 준비를 하며 참호 따위 같은 발치 근처에 있는 그들의 하찮은 땅을 박살낼 준비를 했다.
"어딜 이 새끼야!!!!!"
콰아아아아!!!!
백리가 놈의 팔에 발차기를 날려 박살냈다. 태극나선경을 운용해서 금새 분해되서 흩어진다.
하지만 금새 새 팔이 돋아난다. 그것도 한개가 아니라 수천개씩, 전보다는 가늘지만 촉수같은 팔은 채찍같이 휘둘러지며 백리를 덮친다.
쩌저적!!!
하지만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였다. 소피아가 놈의 촉수들을 전부 얼어붙이고 살라딘이 발목을 후려쳐 거목을 넘어트리는 것마냥 쓰러트린다.
200미터가 넘어가는 몸뚱이가 넘어가면서 거대한 충격파가 일어나지만 선두에 선 윌리엄이 그 충격을 받아내어 넘겼다. 그로서 전선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쪽 전선은 말이다.
"뭐지? 해치운거 아니였나?"
"그놈은 해치웠었어요. 그런데......."
"다시 재생한 모양인데요. 크기는 작아졌지만 이만한 크기로도 충분히 위력이 있어요"
"일단 이놈부터 마저 해치우고 보지"
쩌저저적!!!
이번에는 소피아가 놈을 통째로 얼렸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소모가 꽤 컸지만 그래도 백리의 공간참보다는 도망칠 구석을 확실하게 막아서 봉인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 일단은 보류. 괜히 얼은 상태로 깨부쉈다가 세포 한조각이라도 빠져나가면 큰일이니까.
"이 녀석은 차라리 소피아씨가 낫네요"
"각자 장단점이 있는 법이지. 필요하면 내 특성도 배워라. 충분히 도움이 될......."
-지원 요청! 지원 요청입니다!!!!
그러다 그들의 무전으로 긴급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은 그들에게는 절망을, 그리고 인류에게는 마지막 희망을 빼앗는 소리였다.
-현재 초대형 적성종이 출현! 그 수가 7개체가 넘어갑니다! 계속해서 증가 중!!! 그런데, 그런데.......
백리는 그 소식에 현실을 인지했다.
인류의 마지막 보루가 뚫렸다. 처참하게.
*
*
*
*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가 뚫리는데 이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지역이 초토화 되는데 일주일.
그리고 유럽에 까지 놈들이 손을 뻗는데는 2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한정된 공간, 그리고 육로로 이동하는 특성, 그 두가지 덕분에 한달이란 시간 동안 이집트에서 놈들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곳이 뚫리고 놈들의 활동 범위가 확장되면서 점차 개인으로서 막을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진다.
"피난 상황 어떻게 됐어?!"
"지금 시민들이 패닉에 빠져서 대혼란 상태예요!!!!"
"적성종들이 코 앞까지 밀려왔다고!!!! 육로던 해로던 일단 사람부터 피신시키고 봐야 할거 아니야!!!!!"
아직 피난을 끝내지 못한 사람들은 몰려오는 적성종을 보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다 서로 얽히고 짓밟혀 3분지 1이 죽어나갈 정도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적성종에게 죽는다. 그들이 먹혀 죽을 때의 공포, 두려운, 절망, 모든 감정들은 거대신전으로 빨려들어간다.
".........핵을 사용하게"
그리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대통령이 현 상황의 위협을 느끼고 최후의 수단을 사용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건 악수였다.
600발 가량의 전략 핵폭탄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실려 발사되었다. 아프리카의 수천만 적성종에게 쏟아진 핵탄두는 인간이 만들어낸 악의를 확실하게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한가지. 악의를 따지자면 인간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 만든 무기 따위 보다 절망과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든 생물이 더욱 악의가 깊었다.
"어? 왜 가이거 카운터가......?"
지직거리면서 방사능 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가이거 카운터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방사능이 검출된다는 뜻이다.
핵탄두는 확실히 놈들의 3분지 1을 날려버렸지만 이후 더욱 빠르게 증식하며 그것도 모자라 방사능을 뿜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직격이 아니면 거인형 적성종에게는 소용 없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건 피난 밖에 없었다. 놈들을 막는걸 걱정하는게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 탈출하는게 급선무다.
가장 바빠진건 한국 쪽이였다. 그곳에서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난민들을 수용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무작정 입국 심사대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살고 싶다고!!!! 들여보내 달라니까!!!!!"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일단 있는 사람부터 살려야 할거 아니야!!!"
고생하는건 하정욱을 비롯한 입국 심사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의 마음은 그들을 들여보내라고 하지만 그랬다가는 훨씬 더 혼란만 불어 일으킬 뿐이다. 차라리 그런거라면 처음부터 거절해야 했다.
위험하고 혼란에 빠진 상황일수록 더욱 절차에 열중해야 하는건 당연하다. 특히나 소방관으로서 일했던 하정욱은 더더욱 그랬다.
마냥 사람이 차 아래에 깔렸다고 사람들 데리고 차를 들어올리기 보다는 설비를 가져와서 차를 들어올리는 편이 나은 것처럼,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에는 효율보다 정확성이 중요하다. 만의 하나 문제가 생기면 손해가 아니라 생명에 문제가 생기니까.
"물러나십시오! 여기서 부터는 입국이 허가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우선적으로 들어갈거 아니야!!!!!"
"사람부터 구해!!!! 다 죽어가는 와중에 막아서 뭐 어쩌려고!!!!!"
"지금 여러분들은 사유지 불법 침입을 강행하고 계십니다! 영역 바깥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애초에 전기 담장 같은건 설치하지 않았다. 아니, 만약 이런 상황에 전기 담장 같은걸 설치했다면 더욱 피해가 커졌을테니 오히려 혜안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살기 위한 본능 앞에서 규칙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입국 심사대에서 발생시킨 역장이 그들을 떠밀어 영역 바깥으로 내보낸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되었다.
"우리보고 죽으라는거야 뭐야아아아아!!!!"
"살려줘! 제발 살려달라고오오!!!"
"아이만이라도 먼저 들여보내주세요!!! 제발요!!!!"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만한 상황이였다.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 몰려 소리치면서 저마다의 생존을 위해 날뛴다. 아무리 막고 밀어도 그들의 태도는 별반 다를게 없었다.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죽는게 똑같다면 살려고 발버둥 치려고 하다 죽는게 훨씬 나을테니까 말이다.
그들을 들여보낼 수는 없다. 그들을 들여보내는 만큼 원래 들이려던 사람은 화성으로 들어설 수 없으니까.
결국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을 쳐내야 하는 환경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지옥이고 또한 무거운 책임감이 생기는 일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물론, 시온과 앨리사 니어를 비롯한 모녀까지도 말이다.
"이제 어쩔거야?"
"........."
루리의 말에 시온이 눈을 감았다.
결국에는 남은건 그녀의 선택이다. 그들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오로지 시온에게 달렸다.
.......이럴 때는 최악이 없는게 뼈아프다. 만약 비슷한 상황에 그가 있었더라면 분명 달려와서 문제의 근원을 처리해 주었을테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다르다. 설령 최악이 오더라도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을테고 최선을 다하더라도 현 인류의 절반이나 구하는게 최선이겠지. 최악은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걸 더 잘하니까.
"전부 거절하십시오. 그들을 받아들였다가는 예정되어 있던 입국민들을 살리지 못하게 될겁니다. 인도적인 문제를 신경쓰면 이후에 더 트러블이 생깁니다"
"그렇긴 하지"
"그 죄는 제가 다 뒤집어 쓰겠습니다. 상관말고 이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울 아빠랑 같이 일하는 아저씨들 스트레스 수치가 장난 아닌데"
"기계에 맡기면 됩니다. 기계에는 마음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외계인은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제가 뭐 아서왕입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건 아니다. 만약 구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면 보다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는건 당연한 일이였다. 시온은 현 상황이 나빠져도 그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결국에는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방관하는 일이다. 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앨리사 또한 현 상황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살릴 것은 살리며 빠르게 적응했다.
"중동과 인근 지역을 비롯한 사람들의 탈출을 우선시 하고 전장에 공백을 만들어 폭격을 가하세요.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 보다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연합군은 유럽 쪽으로 이동시켜서 미리 전선을 꾸리도록 하시고요. 러시아야 러시아가 알아서 막을테고 아시아 쪽으로 넘어오는 군대는 중국과 인도 정부끼리 의논하여 막으라고 하시면 됩니다. 물론 이쪽에서도 지원을 할거고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현재 치안부터 제대로 정리하세요. 다 잘해도 치안이 유지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기 쉬우니까요"
"네, 물론입니다"
"그........"
"급보입니다!!!! 지금 재림예수회의 간부들이 구속되어 있는 구치소가 습격당했습니다!!!!"
"이런 씨......!!!!!!!"
앨리사 니어는 욕지기를 내뱉으려다가 억지로 억눌렀다.
예로부터 혼란스러운 상황에 기회라 여기고 활동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삼국지에서도 그러할진데 현 상황이라고 비할까. 하지만 억지로 짓눌렀던 사이비 교단이 횡포를 부릴 상황이 되자 앨리사의 마음은 심란해졌다.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 진짜로 그들을 다시 잡아 처넣을 인력도 부족할 시점이다. 아무리 예비군을 불러모아 인력을 보충했어도 포스 유저가 아니라면 시간 끌기 밖에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결국 독하게 마음을 먹는 수 밖에 없다. 그들을 쏴죽이고 상황을 정리할지, 아니면 그대로 둘지.
".......할 수 없군요. 평소라면 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 그런 단체가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 쉽습니다. 재림예수회와 대치하는 군 병력에게 실탄을 배포한 후에 최악의 경우 발포를 허가한다고 해두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하면 됩니다. 상황이 나빠져도 저 하나의 실각으로 처리되겠죠"
위에 서는 사람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가진 권력에 비례하여 책임 또한 늘어나는게 당연한 구조다.
권리만 즐기고 책임은 방치하는건 오히려 상식을 의심할만한 수준의 이야기다. 그리고 앨리사는 자신이 한 일의 책임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었다.
설령 몸이 바스라지더라도 그 책임을 직시하고 책임을 질 것이다. 그게 그녀가 할 일이다.
"이제부터 시간 싸움입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방에는 절망 뿐이고 가지고 있는 희망도 희박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을 놓치면 남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작품후기]* 작중 내용에 대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핵 쐈다가 본전도 못찾은 불곰국......아무튼 이제 이번 파트의 끝도 와가네요.
근데 요즘 하는 꼬라지 보면 사이비 종교들 잡아다 구속해도 전쟁 나서 혼란스러울 때 탈옥할거 같기는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