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흉의 대마왕 321편
<-- -->
이야기는 끝났지만 나는 바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여자 안으려고 그러는건 아니고 술이랑 안주가 남아서. 먹을걸 남기는건 내 성격이 아니다. 설령 이런 곳이라도 먹을건 다 먹고 가야 한다. 그게 요리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거라고.
안주에 신경쓰고 있는데 끝난 거래에도 불구하고 루주는 나가지 않고 계속 방에 남아 있었다.
"제가 견식이 부족하여 대협의 존성대명을 듣고자 하온데.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최악. 그리고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중원으로 돌아온 것도 간만이거든"
과일 하나 먹고 술 한잔 마시려는데 그보다 먼저 루주가 술병을 들었다.
"소녀가 대협께 한잔 올리겠사옵니다"
"받지"
중장년의 여성이 소녀라고 하면 괴리감이 있지만 소녀(少女)가 아니라 소녀(小女)니까 괜찮다. 자기를 겸손하게 말하는 쪽의 단어다.
그윽한 매화향이 퍼진다. 술은 그렇다 치고......옆에 붙어 있는 루주의 가슴 공세가 신경쓰인다.
내가 그레이네 집안 사람 남자들 같이 숙맥도 아니고 그런거에 얼굴 붉히거나 기겁하지는 않지만 신경 쓰인다고 한건 불편한 쪽에 가깝다.
그녀는 내 기색을 읽었는지 괜히 루주까지 올라간 눈치가 아니란 것처럼 슬며시 거리를 두었다. 아, 이제야 좀 낫군.
"10년을 넘게 이 청두 지부의 지부장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대협의 존성대명은 듣지 못했사옵니다. 강기를 그렇게 능숙하게 다루실 수 있다면 필시 초절정의 고수일진데 혹여......"
"뭐 은거기인이나 무림초출이냐고? 글쎄"
어차피 여기에 길게 있진 않을거다. 게다가 다시금 떠나면 여기에 또 올 일은 없겠지. 나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퍼지든 그건 상관없다.
막 어린애 따먹는 변태새끼라고 소문만 안나면 대협객이던 천하의 둘도 없는 마인이던 알게뭐람. 어차피 성격 개차반인거 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사람도 잘 죽이는 살인귀인데.
애초에 내 스승의 여기 별호가 천살제다. 그 제자나 다름없는 내가 멀쩡한 소문이 퍼질리는 없었다.
대충 술과 과일을 우겨넣어서 다 먹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주는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시선을 주자 손을 거두었다.
"대협께서 맡기신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부탁하지. 어차피 길게 끌진 않을거야"
시작부터 끝까지. 아마 길어도 주 단위로 걸리지 한달까지 가진 않을거다.
나는 마저 값을 치르고 연화홍루를 나섰다. 루주가 가게 앞까지 나와 고개 숙여 배웅해준다.
"대협의 다음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대우가 이러는걸 보면......실력을 과하게 보여주었나?
내가 기억하기로 검기나 쓰면 일류 고수고 강기를 써야 절정......그 이상부터, 그러니까 어검술이나 내가 아까 보여준 수준 정도는 되어야 초절정 고수라고 불린다.
같은 칼질이라도 막 칼 처음 잡는 사람의 칼질이랑 숙련된 셰프의 칼질은 다르잖아. 강기도 써봐야 아는 법이니까.
음, 현 무림 정세도 좀 알아볼껄 그랬나. 윤 왕조의 무림 말살 정책 때문에 전체적인 수준이 낮아진걸지도 모른다.
이윽고 나는 다시금 객잔으로 돌아갔다. 해가 졌으니 어지간하면 둘 다 자고 있을 것이다.
".......하, 시발"
쾅! 콰직! 퍼어어어억!!!
하지만 객잔은 생각보다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로 보아 용하연이 깽판치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내 시발 객잔이면 곱게 끝나지 않을거 알았지.
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는 없으니 들어가기로 했다.
*
*
*
*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최선이라고 불리는 아이에게는 겨우 하루만에 일어난 일이였다.
집과 가족을 잃고 산에서 움막을 지어 살아가던 아이가 절세고수를 만나게 되고, 그 절세고수가 알고보니까 친인척이여서 자신을 도와준다는 우연과 우연이 수도없이 겹친 일은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최악은 노처녀 히스테리나 부리는 고스로리 절대자가 개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해서 쉽게 납득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최악이 하오문에 볼일을 보는 동안 용하연은 선이를 돌보고 있었다.
그래도 보호자 없이 나름 산에서 살고 있던 아이라서 그런지 손이 많이 가는 일은 없었다. 옷을 새로 사고 객실에 물을 올려서 따로 씻으니까 남아 있던 빈곤한 모습도 사라져서 꽤나 귀여움 받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되었다.
"저기......"
"왜 그러지?"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용하연은 그리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악이야 나름 친해지면 이야기할만 하지만 용하연은 그렇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무림인 특유의 독선적이고 고압적인 성격이 행동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선이는 그녀와 이야기 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우물쭈물하면서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용하연은 한숨을 쉬었다.
애는 커녕 결혼도 해본적 없는데 애를 키워본 경험이 있을리 없다. 그런걸 보면 애는 수백은 키웠던 육아고수 최악과는 정반대다.
그녀도 내심 어떻게 대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우선 자기 소개부터 하기로 했다.
"내 이름은 용하연이다"
"네?"
"생각해보니 내 이름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좋은대로 편하게 불러라"
"그러면 아주머니......"
"............."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래"
호칭은 중대문제다!
선이는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한 최악의 지인이니까 아주머니라고 부르려고 했지만 무서운 용하연의 침묵에 금새 호칭을 바꿨다. 그녀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정신 나이는 둘째쳐도 육체적 나이는 20대니까 오빠라고 불러도 괜찮은 최악과 다르게 반로환동 했어도 육체적 나이는 50대인 용하연은 아줌마라 불려야 하지만 젊게 보이고 싶은건 여자의 공통적인 부분이다.
"그 녀석은 걱정할 필요 없다. 정말로 네 핏줄일테니까 사욕 없이 확실하게 도와줄테지"
"어렴풋이 그렇게 느껴지기는 하지만요......"
"무공도 가르쳐줄거다. 잘만 하면 절세고수가 될 수도 있을거다"
"그건 좀 기대되요!!"
무공이나 무림인 이야기만 나오면 선이는 성격이 달라진듯이 적극적으로 변한다. 나름 이야기를 이어갈 소재를 찾은 용하연은 술을 한모금 마시고 조금씩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결국에는 무공이란건 지식량이 판단을 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런 면에서 그 녀석은 좋은 스승이 되어줄테지. 가르칠 수 있는건 몇달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충분한 시간일거다"
"두분은 어디서 오셨어요?"
".......서역에서"
"서역이요? 거기 색목인들이 산다는 곳 맞죠?"
"대충은"
일단 두사람은 서역에서 온걸로 입을 맞췄다. 괜히 다른 차원 이야기 하기도 빡세니까 그냥 지구 한바퀴 돌다가 수백년 걸려서 온거라고 하는 편이 낫다.
인간이 수백년을 사는건 어지간해서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곳은 무림이 있는 곳이다. 그 어떤 기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며 이미 그녀의 사제인 만병왕도 멀쩡하게 살아서 신혼 생활이나 알콩달콩 보내고 있었다.
"우선 국하루의 일부터 끝나면 본격적으로 가르칠거다. 뭐......애초에 잘 먹질 않아서 몸을 만들기보다는 살부터 찌우는게 급선무니까 당장은 무리다"
"잘 먹으면 빨리 가르쳐주시는 건가요?"
"그러겠지"
"그러면 많이 먹을게요!"
선이는 이름대로 성격이 모난곳 없이 착했다. 부모를 잃고 산에서 혼자 살았다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밝은 성격은 한편으로는 그 아이도 범상치 않다는 일면을 보여주었다.
최악은 어린시절 부모를 잃어서 천살성으로 각성했다. 덕분에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이 없는 살인귀가 되었는데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충격 받을만한 일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선이는 반대였다. 그런 일을 겪고도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네가 무공을 익혀서 무림인이 되고 싶은건. 부모님의 일을 복수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냐?"
"네? 아뇨, 그냥 멋있어서 그런건데요?"
"진짜로? 네 마음에 복수심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느냐?"
무림에서 복수는 미덕이다. 스승의 복수를 제자가 했다면 그것은 욕을 먹을 짓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건 최악의 스승인 천살제 류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였던 서문세가의 여식이 남궁세가의 음모로 멸문지화를 당하자 당시 천살제였던 진영한의 제자로 들어간 류는 이후 남궁세가를 멸문시키는걸로 복수했다.
하지만 천살제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사파나 마인이라 불리지 않으며 존경받는 절대고수의 이름이다. 그만큼 복수 같은 은원관계는 무림인에게 있어서 당연시 된다.
힘이 있고 충분히 복수를 완수했다면 정파 하나 지워버린걸 업적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나는 복수를 말리거나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할 수 있다면 부추기는 편이지. 더군다나 부모의 원수는 불구대천의 원수이지 않나? 설령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더라도 네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거다"
".........."
그건 약간의 시험이였다. 불합격은 없지만 점수로 매겨지는 시험은 과연 그 아이가 어디까지 맞출 수 있을까 보는 테스트였다.
"저도 부모님이 돌아가신건 슬퍼요. 안타깝고, 생각날 때마다 울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양 주방장을 죽이거나 하면 저도 그 사람이랑 똑같은 사람이 될거예요"
"........."
최악은 이미 선을 넘었다.
하지만 선이는 그 선을 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만큼 살인이 인간성을 깍아먹는 행위라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게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복수 같은 것에 열중하다가 다치거나 인생을 낭비하면 부모님이 오히려 슬퍼하실 테니까요"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하겠다고?"
"완전히 포기하겠다는건 아니예요. 고수가 되어서 이름이 퍼지고 얼굴 한번 비추고 가면 양심이 찔리는 양 주방장도 언제 죽이러 올지 모르는 저를 두려워하면서 여생을 보내지 않겠어요? 그때 쯤이면 저는 그 사람을 신경도 안쓸텐데 말이죠"
"호오"
착하지만, 바보도 아니고 호구도 아니다. 그저 복수의 방식과 생각이 다를뿐.
정말로 바보에 호구라면 아예 복수 자체를 포기하거나 복수를 시도하지도 않았는데 상대를 용서하거나 해서 어물쩍 넘어간다.
꽤나 재미있는 아이다. 백리만 아니였다면 용하연도 자기 제자로 들이는걸 고민해봤을 정도로 말이다.
"나름 합격이다. 꽤 괜찮군......일단 밥은 먹고 이후에 푹 자라. 애는 일찍 자야 크는 법이다"
"네! 알겠어요!"
밥도 다 먹었겠다 선이는 객실로 보내서 자게 두었다. 객잔 안에만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녀가 대처하는게 가능하니까 애만 보내도 문제 없다.
홀로 자리에 남은 용하연은 조용히 술을 들이켰다. 밤이 찾아온 도시의 소란스러움은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였다.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못해도 그녀의 사후 수백년이 지났을 무림은 변한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좋다. 문명적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발전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소리겠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에게는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테니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여우는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한다. 용하연에게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마치 2퍼센트 정도 애매하게 부족한 느낌은 김 빠진 콜라마냥 용하연의 심기를 거슬렀다.
뭘까, 도대체 뭐가 빠졌을까.
생각하면서 금새 술 한병을 비우고 또 한병을 주문했을 무렵,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디에서든 많이 본 음욕이 가득한 눈빛이다.
"흐흐흐, 아가씨 혼잔가?"
"기왕이면 우리랑 놀지 그래?"
"혼자 있으면 적적할텐데 말이야!"
껄렁하면서도 허리춤에는 칼을 한자루씩 차고 있는 건장한 남성 셋이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기세를 봐서는 무공 한자락 익힌 수준이지만 셋이서 몰려다니니 쪽수로 밀어붙이는 모양이다.
"우리 귀주삼호(貴州三虎) 어르신들의 술 좀 따라주는게 어떠냐?"
용하연이 생각하기로 별호에 지역과 숫자가 들어가면 별볼일 없는게 다수다.
그녀도 마룡후라는 별호와 함께 천하삼절이란 별호도 있지만 그거야 범위가 무림 전체니까 다르다.
"아, 그래, 그렇군. 이래야 무림이지"
드디어 용하연의 부족했던 2퍼센트가 채워졌다.
윤리나 법이 아니라 힘의 놀리가 지배하는 곳은 시도때도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래야 진짜 무림이다.
힘이 없으면 그만큼 고달프지만 반대로 힘이 충분하면 뭐든지 가능한 무법지대. 그곳이 바로 무림이다.
그녀는 등에 매놓은 그레이 소드를 뽑아들었다.
"이제야 고향에 돌아온것 같군!"
========== 작품 후기 ==========
역시 객잔에서는 깽판을 쳐야 제맛.
그나저나 수준 낮다고 얕보면 안됩니다. 여기는 무림이예요. 막 어디서 고대의 마인 같은거 튀어나올지 모름.
나와봤자 한방컷 아니냐고요? 글쎄.....
아무튼 오늘 하나 더 올렸으니까 내일도 2연참 해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