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흉의 대마왕 3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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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는 한동안 집안에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틀어박혀 있었다.
자신이 유토피아에게 놀아났고 그로 인해서 가장 든든한 아군을 잃어버린데다가 지구가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는걸 안 사람의 어께는 무거운 법이다.
육체적 충격은 초재생 특성으로 회복할 수 있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자기 스스로 딛고 일어서야 하는 법이다.
그러지 못하면 그 끝에 있는건 자살 뿐.
"똑똑똑? 나랑 같이 눈사람 만들래?"
"........농담칠 기분 아니야"
"농담 아닌데. 지금 바깥에 첫눈와서 잠깐 기분 전환 삼아 나가자고 하려는 거였는데"
백리의 방 안은 아무것도 변한게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무언가 손댄 흔적 없이 침대에만 웅크려 있는 백리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계속 그렇게 있을 뿐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기 일보 직전이나 기력이 심각하게 떨어져 있었겠지만 초월자에 발을 들인 육체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도 거의 100퍼센트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은 오히려 백리의 죄를 떠올리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상기할수록 짐은 무거워지고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이미 적성종으로 인해 수만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 책임이 전부 그의 탓이다.
"오빠 보러 온 사람들이 꽤나 많은데. 안만날거야?"
"만날 기분 아니야"
"으이구, 이 화상아. 계속 그러면 그렇게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있을거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바깥의 사람들이 떠들면서 이야기 하는 대화는 백리에게까지 잘 들린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과 스스로 딛고 일어나는건 별개의 문제다.
"엄마랑 아빠도 걱정 많이 하고 있어. 일단 두분은 다 시온 아줌마한테 말해둬서 호라이즌에서 머물고 있어서 안전할거야"
".......형은?"
"갔어, 무림 가서 용하연 아줌마 좀 데려다주고 온데. 아마 당분간 안올껄"
이미 최악은 지구를 떠났다. 적어도 몇달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몇달 동안 지구는 지옥을 경험하게 될게 뻔한 일이다. 최악이 있었다면 자기 이름과 같은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백리는 우울한 목소리로 루리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한걸까?"
"그걸 이제야 알았어?"
오빠고 뭐고 루리는 일단 펙트를 꽂고 보는 아이였다. 직설적인 루리의 화법에 백리는 할말을 잃었다.
애초에 할 말이 많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내심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잘한거겠지. 적어도 저어어어어어어기 멀리 수만광년쯤 떨어진 다른 인류 문명을 구원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관리자 아줌마도 안타까워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하겠지"
"......그래봤자 의미 없는걸"
"그래, 원래 남 중병보다 내 감기가 더 아픈 법이야.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거처럼 생각하지 못하거든"
대마왕의 심판은 마구잡이로 행하는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정확하고 거기에 준하는 근거가 있어야만 했다.
단순하게 적성종과 같은 괴물이 차원을 넘어 나타나는 행위까지 침략 행위로 본다면 차원끼리의 마찰로 인해서 발생하는 자연적인 차원진 마저도 침략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한 편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을 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수많은 인명이 걸린 일인 만큼 그에 합당한 절차와 근거가 필요한건 당연한 일이다.
지구의 시점에서 볼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알리언 박사란 증인도 있었지만 증인의 증언만으로 판단하는건 여자의 말만 믿고 무고한 남자를 성추행범으로 모는거랑 다를게 없다.
적어도 직접 그쪽 차원으로 넘어가 확인하거나......아니면 이쪽 차원에 남아 있는 물증을 확보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물증 중에서 가장 확실한건 지구가 멸망하는거고"
대마왕의 심판을 받은 문명이 무죄 판결을 받아 남는다면, 그것은 대마왕의 비호 아래에 존속할 가치를 지닌다.
적어도 자기들끼리 치고박으며 싸우다 망하는게 아닌 한 외부의 간섭으로 망하는 일은 없다. 우주에서 날아오는 거대 운석, 외계인의 침공, 지금과 같은 차원 침략 등등에서 대마왕은 그들을 보호해준다.
심판을 통과만 할 수 있다면 든든한 뒷배를 둘 수 있다는 점이다.
지구에는 이미 심판을 통과한 몇몇 국가들이 있지만......전부 끝내기 전에 심판 보류 요청을 해버려서 그것 또한 전부 무효가 되었다.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뒤지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개죽임이고. 그거 다 오빠 책임이야"
"........."
"그나마 다행인건 오빠가 그걸 아니까 우울증 걸려 있다는거지. 아니였으면 인성파탄자라고 욕했어"
백리는 아직도 방에서 나가지 않는 루리를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뭐하러 들어온거야?"
"나 외출할건데 이따 손님 올테니까 알아서 문 좀 열어줘"
"무슨 손님?"
"있어, 보면 알아. 오빠 상황 보니까 지가 해야 할 일도 모르는 좆븅신이니까 등을 떠밀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솔직히 내가 말한다고 쳐 듣지도 않을테니까 훨씬 더 이야기 잘 해줄만한 사람으로 불러줌"
"누구? 이경진 아저씨? 예진이?"
"오빤 모르는 딴사람"
백리가 생각하기로 좁은 그의 인간 관계를 떠올렸을 때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 있어도 최악처럼 자리에 없거나 그럴 뿐.
그러면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란 소리인데.......그런 사람 중에 백리에게 뭐라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이제 화성에 땅 투기 하러 가야징~"
루리는 그렇게 흥얼거리면서 외출했다. 정말로 그러려고 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이 온다는건 사실인것 같았다.
이미 집에 찾아온 손님은 많았지만 백리는 한명도 만나지 않았다. 죄책감은 쉽사리 그의 몸을 움직이게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딩동!
얼마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게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루리가 부탁하긴 했지만 자기한테 온 손님이라면 만날 생각이 없다. 백리는 고개 숙여 침묵했다.
딩동! 딩동! 딩동!
"........."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대응할 생각이 없는 백리였다. 그러자 상대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리가 나오지 않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세지다가 이윽고 끊겼다.
겨우 포기했나 싶어 생각하던 백리였지만 문득 아직도 현관문 앞에 있는 사람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다.
"........어?"
콰드드드득!!!!
거칠게 힘으로 금속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위치로 봐서는 현관문을 그대로 뜯어낸 모양이다.
황급히 백리는 방에서 뛰쳐나와서 현관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뜯어낸 현관문을 들고 옆에다가 내려놓고 있었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백리는 그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종종 TV에 나오기도 하니까.
이미 심판 이후 멸망한 나라의 사람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중에서는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이였다.
"집에 있었으면 좀 나와봐야지. 문전박대냐?"
일본의 마스터 유저, 히에이 히비키가 백리네 집을 방문했다.
*
*
*
*
백리가 생각할건 많았지만 가장 먼저 뭐부터 따져야 할지 떠올린다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 있었다.
"우리집 현관문이이이이이?!"
"집에 있었는데도 무시했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소리겠지?"
"연락도 안했잖아요?!"
"네가 받질 않아서 네 여동생한테 했다. 전해듣지 못했냐?"
"아........"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해서 잠깐 잊었지만 루리가 손님이 온다고 했었다. 다만 그게 전 일본의 마스터 유저였던 히비키였을 줄은 몰랐다.
익숙한 한국어와 더불어서 한국으로 귀화한 그는 한국의 포스 유저로 활동하게 되었다. 여러 국가에서 영입하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국가였던 한국으로 가는게 나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어기 먼 유럽 쪽이나 미국 같은 곳보다 같은 동양권인 한국이 낫다. 중국은 내전중이라 선택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말이다.
"잠깐 시간 내서 왔다. 한창 움직여야 할 타이밍에 정작 움직이지를 않아서 뭔일 났나 싶었지"
"그게......."
"아, 만나는건 처음인가? 편하게 대해. 어차피 나이 차이도 있고. 내가 일찍 결혼했으면 너 같은 아들내미가 있었을거다"
"......한국어 잘하시네요"
"배웠지. 그나마 꽤 오래 걸렸어"
포스 유저는 전체적인 스펙이 보통 인간보다 뛰어나다. 하물며 마스터 유저는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오성이 뛰어나기에 언어 하나 배우는건 그리 큰일은 아니다.
"이야기나 좀 하자. 아, 집에 술 좀 있냐?"
"술이요? 찾아보면 소주나 맥주 정도는 있을텐데......."
"남자끼리 이야기 하는데 술이 좀 들어가야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는 법이지"
"취하지도 않는데요"
"분위기가 그런 법이야, 분위기가. 아, 마침 저런 것도 있네"
백리네 집 부엌에 있는 유리 찬장에 어디선가 선물 받아서 장식용으로 둔 양주와 중국 술이 놓여져 있었다.
워낙 옛날부터 장식처런 놓여져 있어서 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히비키는 찬장을 열어서 양주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따서 냄새를 맡았다.
"흠, 오래되고 실온에다 둬서 좀 냄새가 나는데. 그래도 못마실건 아니구만"
"그거 마시게요?!"
"이 정도 도수는 되어야 우리로서는 마시는 맛이 있지. 그러지 않냐?"
보통 손님이 오면 커피라도 하나 타기 마련이지만 커피보다는 큼직한 잔에다가 양주를 전부 털어냈다.
장식용으로 둔거라서 보관 상태가 영 아니였기 때문에 약간 신내가 좀 난다. 그렇지만 못마실건 아니여 보인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그런데 그 짓 하고 있는거 보면 좀 아니지"
".......루리한테 들으셨어요?"
"그래, 여동생이 꽤 똘똘하더만. 어딜 가도 잘 살것 같은 야무진 애더라"
예전부터 그랬다. 한결같은 마이페이스에 재능도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루리만큼은 잘 됐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것도 지구라는 사회가 남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백리는 그녀에게서도 그 배경을 빼앗아 버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는 지금 존나게 한심한 등신 새끼다"
".........."
"그리고 그건 네 선택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야"
"네?"
백리는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욕먹을 것은 각오했지만 자기 선택 때문에 그런건 아니라는 소리에 도리어 의문을 표했다.
"네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아서 등신 새끼라고 한거다. 네가 이 꼴을 만들었는데 넌 지금 뭘 하고 앉았냐?"
"그게........"
"이대로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울면서 자살이라도 하려고? 그건 단순히 도피에 지나지 않아"
흔히 물의를 일으킨 고위직 인사가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그걸 마냥 책임을 진다고 할 수 없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수습조차 하지 않고 물러난다는건 그냥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책임을 지려고 한다면 최대한 수습하려고 노력하는게 당연하다.
"너를 이용해먹은 유토피아 놈도 나쁘지만 선택을 해놓고 책임지지 않고 도망치려는 너도 나빠"
"하지만 제 선택 때문에 지구가 위험해 졌어요. 본격적으로 침략이 시작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거예요"
"그래서? 어차피 대마왕이 심판하는 것도 사람이 죽는건 매한가지 아니냐? 죽는 숫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렇게 쉽게 생각할게 아니잖아요!"
"결국 너는 그때 뭘 선택해도 후회 했을거다. 그렇다면 적어도 선택 후에는 후회하지 않도록 발버둥 쳐야겠지. 그게 선택한 사람의 의무와 책임이란거다"
백리는 심판 보류 요청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건 일본과 마찬가지였다. 일본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우민화 정책을 펼치고 국민을 기만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일단 움직여라. 할 수 있는걸 최대한 해보고 이를 악물어서 부딪혀보고, 그래도 안되면 그때서 후회해도 되는 법이야"
후회는 뭘 해도 생기고 언제 해도 늦는 법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은 움직여보자. 일어나서 해야할 일을 하자.
루리도 그걸 알기에 백리를 타박한거고 히비키까지 불러 준 것이다. 교류는 몰라도 인생으로서는 선배일테니까 말이다.
"우선 나랑 같이 중국으로 가자. 거기서 차원진에서 나온 적성종 생산 기지부터 박살내야 해"
"중국이요?! 갑자기?!"
"거긴 그놈이 깽판 쳐놔서 그나마 지금 처리할 수 있을것 같으니까"
현재 3곳에서 출현한 적성종의 거점 중에서 그나마 베이징에 위치한 것이 제일 적성종의 수도 적고 상황이 나았다. 이미 최악이 베이징 인구를 반쯤 쓸어버린데다 도망친 사람이 많아서 적성종 생산에 재료로 쓸 인간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용 누님도 고향인지 뭔지로 돌아가서 중국에는 마스터 유저가 없어. 우리라도 안가면 놈들이 세를 불리고, 가까운 한국도 위험해지는게 당연하지"
".........."
지금 중요한건 우울해 하면서 질질 짜는게 아니다.
어떻게든 현 상황을 최대한 견뎌내야 하는 것이지.
그걸 깨달은 백리는 다시금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권부터 챙길께요"
"여권은 됐고 여친한테 전화부터 해라 짜샤. 남자가 되서 그게 뭐냐?"
"루리가 예진이 이야기도 했어요?!"
"너 썸타는 이야기는 이미 인터넷에 쫙 돌아 있더라"
"?!?!?!"
아직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희망은 보이니까.
그나마 그것도 시간 문제가 될 것이다.
========== 작품 후기 ==========
아, 백리새끼 왜 이렇게 편 들어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텐데.
바닥에 떨어진 이쑤시개를 밟아봤자 구르며 더러워지기만 할 뿐이지만 세운 후에 밟으면 부러지는 법입니다.
희망 고문이란 말 들어보셨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편들어줘도 지가 한 짓에 대한 상황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잠깐 주인공 시점으로 넘어가서 파트 나눠서 쓰겠습니다.
백리 굴리는 소재가 몇개 더 생각나서요. 플롯 짜는데 시간이 필요해요.
돈까스는 만들기 전에 고기를 두들겨준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