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흉의 대마왕 30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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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보류 요청은 한 문명에 대한 권한이 있는 존재가 대마왕에게 올리는 상소와 같았다.
여기서 말하는 권한은 단순히 한 문명의 대표자란게 아니다. 관리자나 신 같이 인간의 문명을 보고 인도하는 존재를 말한다.
정말 올바른 신은 인간에게 자애롭다. 너무나도 자애로워서 매도 들지 못할 정도로, 보통은 그걸 대신하는게 대마왕이지만 그런 신에게도 주어지는 권한이 심판 보류 요청이였다.
"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한건지 제대로 알고서나 하는 말이냐?"
"네"
"모르는 모양이구만"
팬텀의 물음에 백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지만 팬텀은 도리어 부정으로 알아 들었다.
백리는 심판 보류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부는 모른다. 단지 대마왕들이 더 이상 지구에서 손을 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백리 너 이 새끼 이 사단 날 줄 알았지. 그래도 긴가민가 하다가 믿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형이 멕시코에서 했던 것도 보고 생각한거거든요"
"너 임마 내가 마냥 소집을 걸었다고 생각하냐? 나는......."
최악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 팬텀이 으르렁거리며 그를 제지했다.
"넌 입 다물어라"
"왜? 나도 발언권 있어"
"그게 대마왕으로서냐, 아니면 쟤랑 친한 지인으로서냐"
".........."
"감정에 휘둘려 하는 일은 한번으로 족하지 않냐? 적당히 해라"
대마왕은 한번 터지면 절제할 줄을 모른다. 최악이 백리를 걱정하는 마음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면 귀찮은 일만 늘어날 뿐이다.
단지 유토피아만큼은 그 상황에서 웃고 있었다. 그런 그를 노려보면서 팬텀이 물었다.
"뭐하자는 짓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애 하나 부추겨서 뭘 하려고?"
"어차피 이런 행성 별 의미 없잖아요? 아직 우주 개발도 못한데다가 국가도 수백개가 있는 판국에 언제 다 심판해요?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된거 여기서 손털고 더 확실한 문명이나 멸망시키러 가자고요"
"그 와중에 생기는 피해는?"
"그거 제가 알바인가요? 다른 행성이라면 몰라도 여기는 심판 보류 요청까지 했는데?"
"너 이 새끼 진짜......."
"그리고 뒷일을 생각하면 이게 편하잖아요. 물증을 확보하는 거라고요"
팬텀은 역정을 내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진정했다.
유토피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가 하려는 짓은 지금 당장은 피해가 생길지 몰라도 나중에 생길 피해를 생각하면 경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상과 실리. 두가지에서 고민을 한다면 결국 개인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실리를 추구하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걸 대마왕 전원이 알고 있다. 초월자란 단순히 강한 존재가 아니라 그만한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당장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일이야. 그런데도 할 생각이냐?"
팬텀은 백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내어주었다.
그게 팬텀에게 남은 인간으로서의 면모가 주는 최대한의 기회다. 하지만 백리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간답게 살겠습니다. 인간답게 살다가 죽더라도 그건 자기 몫이죠"
"............그러냐"
이후의 일을 엿볼 수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백리의 행동을 타박하고 멋모르는 사람이나 할 소리란 것이란걸 알고 있었다.
사람은 결국 들이닥쳐야 후회를 하는 법이다. 진작에 말을 듣는 성격이였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다.
"관리자도 뭔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군"
"장모님이잖아. 아마 편애는 하지 않겠다는 뜻 같은데"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는거 아닐까?"
"이건 나도 정색했다. 아무리 그래도 보류 요청은 처음 아니야? 막 고리타분하던 시절에 있던것 같은데"
"제가 한창 활동할 적에 그랬으니까요"
"할아부지! 옛날 이야기 해주세요!"
"그 시절 이야기 하면 누군가한테는 좀 껄끄러운 이야기가 나올것 같은데 괜찮아요?"
슬쩍 유토피아가 팬텀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팬텀도 아, 하고 내심 깨닫는 것이 있었다. 오래전, 그가 본격적으로 대마왕이라 불리던 때의 사건이다.
팬텀은 그 시절 대마왕으로 불리던 한 초월자를 쓰러트렸다. 물론 당시의 그 초월자도 약해진 상태라고 하지만 어중간한 초월자가 이길만한 상대가 아니였다.
"그놈 가지고 이래저래 트러블이 많아. 주로 그놈 딸내미라던가"
".........거참 고생이 많네. 근데 내가 뭐라 길게 말해줄 수가 없는 부분인데"
"양심 찔리지 새꺄?"
"걔는 우리 사천왕 중에서 뒤에서 두번째......."
"사천왕 좋아하시네. 제일 처음 찔리는게 너냐 그러면? 사천왕 최약체 같은 새끼"
"왜 시비질이야?"
"그러면 너네 대가리부터 쳐 튀어나오라고 해봐. 시발, 저번처럼 차원 저편에서도 분 단위로 탐색해서 쫒아올 수 있는데 그거 다 예측하고 튀어서 짜증난다고"
"말은 전해줄께"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사지 뽑아서 죽일거 팔 하나쯤 봐준다고 하고"
"참 잘도 그러겠다 새꺄"
옛날 이야기에서 파벌 이야기로 넘어갔다가 다시금 현재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백리가 한 관리자의 심판 보류 요청은 지금 이 시간부로 효과를 발휘된다. 대마왕들은 관리자의 의지에 따라 이 지구에서 손을 뗄 생각이다.
"차라리 장모님이 처음부터 이야기 해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텐데"
"그러면 저쪽은 어쩌게?"
"내가 있는데 뭔 걱정이야? 애초에 처음부터 확인하고 처벌하려고 했었다고"
"물증 만들어드려서 고맙죠?"
"애미 염병 터진 개소리를 그런식으로 할 수 있다니 참으로 감탄스럽다. 문과로서 칭찬해주마"
"와!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주제에 이과 무시하는거 대단해요!"
"내가 널 비꼬는거지 네가 날 비꼬면 어쩌자는거냐"
백리는 아직 그 행동이 불러올 여파를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 하다못해 그걸 알기라도 했으면 본인이 아픈 것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인과는 얽히고 얽혀서 여기까지 왔다. 바꿀 수는 없다.
설령 팬텀이라 하더라도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다면 두고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남은건 파멸 뿐.
"지들이 처 망하겠다는데 별 의미 없겠지. 그리고 결국은 제 책임이니까 거기에 짓눌려 뒤지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정곡이라서 나도 태클 걸 말이 없다"
"저도 동의요"
"루리가 말렸는데도 저러는거 보면 나도 딱히 할말 없어. 지 여동생 말도 안듣는데 같은 단말이라고 내 말 들을리 없겠지?"
"나도 아빠 생각에는 동의야"
쿠구구구구!!!!
황금성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 성은 지구에서 대마왕들이 체류하기 위해 만든 성이기 때문에 체류할 이유가 없다면 거두어 가는게 옳다.
금은 일정 수준 이하의 문명이라도 충분히 재화의 가치가 있는 금속이다. 두고 가면 그대로 지구의 경제가 박살나기 딱 좋은 분쟁거리였다.
경제적인 문제도 보는데 대마왕이 나서서 그걸 부추길 수는 없었다. 거대한 황금성은 녹아 없어지면서 다시금 우주의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바이바이 내 예쁜 황금성아!"
"아니, 드립을 쳐도 꼭 왜 그런 드립을 치냐?"
"섹드립이잖아! 섹드립은 모든걸 포용하는 법이야!"
"미친소리 그만해라"
난데없이 성이 사라지자 태평양 한가운데의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것과 다를바가 없지만 백리는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다. 본인의 능력도 있지만 대마왕들이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팬텀이 차원을 갈랐다. 쩌적! 하고 갈라지면서 저편에 거대한 검은색 성이 보인다.
팬텀과 시엔느의 집이라 불리우리는 다크로드 캐슬이다. 갈라진 차원의 틈 앞에 두사람이 서고 넘어가기 전에 팬텀이 그들에게 경고했다.
"좀 오래 있긴 했으니까 얼른 돌아가서 나는 마누라들이나 달래줘야겠다. 그리고 내가 한가지 경고 하겠는데........더 이상 이 지구에 손대지 마라. 알겠냐?"
"그래, 그래"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예요"
"나도 볼일 없음. 어차피 어지간해서 상황이 씹창난거 아니면 우리 단말들은 죽을일 없을거고"
이제 대마왕은 더 이상 지구에 손대지 못한다. 심판도 못하고 유토피아처럼 개인적인 방송 하나 하지 못한다.
설령 이 지구에서 나고 자란 최악도 대마왕 최악이 아니라 인간 최악으로도 간섭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마냥 좋은 의미는 아니였다.
"백리야, 넌 나중에 보자. 그때가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아닐테니까......한번 신명나게 털리고 나면 정신 좀 차리겠지"
최악은 차원을 가르면서 호라이즌으로 떠났다. 이제 '최흉의 대마왕'은 지구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누리도 백리에게 한마디 했다.
"최악 아저씨 뒷모습이 마치 아들한테 쓴소리 듣고 허탈해서 깡소주 까는 아버지의 모습 같지 않아?"
"어........"
"자식들 잘되라고 매를 드는건데 그것도 이해 못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없지. 우리 자존심에 스크래치 내놓고 더 이상 도움을 바랄 생각은 하지마"
누리도 이번 일에 확실히 화가 났다. 단지 그걸 표출하지 않을 뿐.
지구에서 손을 뗀 이상 막나가는 누리라도 백리에게 손을 댈 권한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누리마저 모습을 감추자 남은건 유토피아였다. 그는 여전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백리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차원의 균열은 제가 열어드릴께요.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줄 수 있어요. 그 뭐라더라......개평? 그런거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웃겨요?"
"의견이 일치되긴 했지만 바라는대로 해줬으니까요. 잠깐이지만 동업자였는데 호의를 가지고 있는게 당연하죠"
하지만 유토피아가 바라는건 단순히 이 행성에서 대마왕들이 물러나는게 아니였다.
오히려 아직 발전도 덜되고 수준도 낮은 지구보다 더 확실하게 멸망시켜야 할 문명이 있다. 그리고 그 문명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아, 그런데 그거 알아요? 대마왕은 심판만 하는게 아니란거"
"그게 왜......."
"저희가 말했잖아요. 모든 '분쟁'을 금지한다고. 그런데 저희가 강림한 뒤로 적성종이란게 이 지구에 나타난 적이 있었어요?"
"...................어?"
그제서야 백리는 현실을 깨달았다.
대마왕이 강림한 이후 적성종은 출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왕에게 밀려 그 존재감이 없어졌다. 워낙 눈앞에 들이닥친 상황이 급박하니 적성종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 대마왕이 적성종의 출현을 막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들의 능력이라면 한명만 나서도 적성종 따위는 상대도 안될 것이다. 애초에 차원 좌표를 혼란시켜서 아무것도 없는 우주 한가운데에 떨어트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앞으로 지구에는 적성종이 출현할 거예요"
"그건 여태까지 그랬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막을거고요. 지구는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20년동안 적성종을 잘 격퇴 해왔으니까요"
"그거야 애초에 목적이 그게 아니였으니까요"
차원 너머의 적성종을 보내 침략시키러 보내는 문명의 목적은 알리언 박사의 말대로 사념의 수집을 통한 그들의 신, 티브를 깨우기 위함이다.
요컨데 지구에서 벌이는 일은 사육이다.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목을 치지 않는 것처럼 장기적인 이득을 보고 적당히 키우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최악으로 인해서 높은 수준의 적성종도 피해 없이 격퇴한 것이 그 시작이였으며 차원진을 사전에 막아 두었던 것이 폭발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저쪽 시점에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기르던 닭이 알은 낳지 않고 난데없이 주인을 공격한 격인데"
"그, 건........"
"여태까지의 적성종 침공이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거예요"
알리언 박사는 저쪽 차원에는 다섯명의 초월자가 있다고 했다. 다섯 사도라 불리는 그들은 겁쟁이라서 차원을 넘어서 오지 않을거라고 했지만.......글쎄?
한치 앞도 볼 수 없는게 사람의 일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확신할 수 있을까? 못해도 20년은 그곳에서 떠나온 사람의 말을?
적어도 알리언 박사는 최악이 대마왕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의 무력도 다섯 사도들과 비견될 수준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국 필멸자의 평가다. 최악 한명만 있었어도 상황이 개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최악은 지구에 손댈 수 없다. 심판도 할 수 없지만......반대로 지구가 적성종에 의해 멸망하더라도 손댈 수 없다.
"그, 그런걸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요?! 대체 왜!!!!"
"물증이요. 확실한 물증. 저나 팬텀씨라면 몰라도 최악씨는 정보수집능력이 떨어져서 확실한 물증이 없으면 심판하는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런것 때문에 지구가.......!!!"
"그리고 적성종 침공을 받고 있는 행성이 겨우 지구만 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죠? 양계장에서 닭을 한마리만 키우는거 봤어요?"
".........!!"
"지구는 제물이 될거예요. 지구가 침공 받아서 멸망하면 우리들은 확실히 움직일 건수와 증거가 생기는거니까 다른 침공 받는 행성에도 차원진 발생을 사전에 막아두겠죠"
지구의 인구는 고작해야 수십억.
다른 행성의 인류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는 얼마가 될까. 현재 적성종의 침공을 받아 고통받는 행성 인류의 숫자만 하더라도 지구의 인구수의 족히 몇배는 된다.
더군다나 개중에는 지구처럼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서 더 고통받는 문명도 있다. 가이아 포스 이전의 이능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의 화력 지원 없이 오로지 포스 유저의 힘만으로 상대해야 한다.
"그들의 목숨에 비하면 필요한 손해잖아요? 축하해요, 지구를 포기하는 대신에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네요! 바라던대로 인간적인 죽음을 추구하세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백리는 유토피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를 반겨주는건 서울의 전경이 보이는 차원의 균열이였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서울 한복판에 떨어진 백리는 다시금 닫히는 차원의 균열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건 비웃음 뿐이였다.
"그러면 어디 한번 좋은대로 해보세요, 영웅 나부랭이씨"
그것으로 유토피아도 지구를 떠났다.
이제 지구를 지켜주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 작품 후기 ==========
심판 보류 - 본격적인 적성종 침략 - 지구 멸망 - 어? 이 새끼들 침략 했네?
대충 루트를 따지면 이렇게 됩니다. 침략 행위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멸망이니까요.
그리고 다른 문명이면 침략 즉시 대처하겠는데 심판 보류 요청은 '우리들끼리 알아서 할테니까 ㄲㅈ'같은 느낌이라서 사후 대처를 할 수 밖에 없어요.
바로 넘어가서 물증 확보하고 즉결 심판해도 그 시점에서 지구는 멸망하고요.
크으으으으! 멘탈 바사삭! 그리고 고작 이 정도로 굴리려고 내가 작정하진 않았지!
자고로 영웅의 시련은 이런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몸은 재생하면 그만이지만 멘탈은 쉽게 회복할 수 없으니까요.
이거시 유-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