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대마왕 강림]
초월자는 기본적으로 감성과 시야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모르더라도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 거기서 생기는 의견 차이에서 상대방의 이질적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최악만 하더라도 사회를 보는 관념이나 시야가 달랐다. 그나마 인간다운 그 또한 그러한테 다른 대마왕들은 오죽할까.
"한번 심판을 시작한 이상 이걸 멈추는건 거의 불가능해. 대마왕 전원의 동의가 없으면 우리가 이 행성을 떠나는건 심판을 끝낸 뒤일거야"
"......그렇군요"
"더 궁금한거 없어? 그러면 슬슬 아저씨 오빠들 만나러 가야지?"
"하, 한가지만 더 괜찮겠습니까?"
"뭔데?"
"만약 저희 미국이 심판을 받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흐음~"
누리의 시선이 제이슨 요원을 꿰뚫어보았다.
그도 결국에는 미국인. 가장 우선시 하는건 역시나 조국일 수 밖에 없었다.
설령 이 지구의 모든 나라가 멸망하더라도 미국만 남는다면 어떻게든 인류는 이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필시 많은 희생이 필요할거다.
결국 중요한건 생존의 여부. 지금 이 자리에서 약간의 확신이라도 얻고 싶은게 그의 내심이다.
"일단 나는 무죄. 시엔느도 무죄를 줄거고 유토피아 오빠는 태클을 걸것 같은데 확률은 반반이고 최악 아저씨는 어지간해선 무죄를 주겠지. 팬텀 아저씨도 별 이상 없으면 무죄고"
"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다? 어떻게 될지는 나도 확신은 못해. 그것만 믿고 난리쳐도 난 안도와줄거야"
"아닙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얻은 가장 큰 이득이라고 한다면 대마왕들의 성향을 누리의 입으로 듣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정보부에서 그들에 대해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될게 분명했다.
게다가 판결은 다수결이라 했으니 세명만 무죄를 받아도 미국은 생존이 가능했다. 그런데 예상으로도 4명이 무죄를 선고한다면 조금만 조심해도 충분할 것 같다. 그의 마음 한가운데서 큰 짐이 내려졌다.
"자 가자, 기다리고 있겠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누리님. 혹시 나중에 저희 미국에 방문하실 의사가 있으시다면......."
"그건 미국의 심판이 끝난 뒤의 이야기겠지. 일 끝난 뒤면 솔직히 편하게 놀아도 되니까"
미국 대사 일행은 누리의 안내에 따라 성 중심부의 홀로 이동했다.
그곳은 처음 성에 들어설 때의 넓은 홀과는 다른, 뭔가 중요한 예식을 하기 위한 곳이였다. 그 예로서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운 느낌의 왕좌와 그 뒤에는 수정으로 이루어진 스테인드글라스가 형형색색 빛을 뿜고 있었다.
왕좌는 총 다섯개.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 않는다. 이미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 두명 정도 있었다.
"뭐야, 유토피아 오빠는 그렇다 쳐도 최악 아저씨는?"
"그 새낀 지금 설거지 하고 있어"
"와! 벌칙!"
"내기는 무승부였으니까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기로 했는데 '감각'능력이 서로 같아도 수준은 내가 위니까 수 싸움에서 지는건 당연하지"
"존나 욕하면서 설거지 하고 있겠다"
"내기 걸어놓고 진놈이 잘못이지 뭐"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 중 한명은 팬텀이였다. 얼굴만 보면 미녀지만 건장한 체격을 보면 남자라고 알 수 있을법한 외형을 가진 그는 왕좌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이 익숙하다.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직위적인 것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는 시엔느가 앉아 있었다. 누리랑 비슷한 체구에 또래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인간에게서 나오기 힘든 보라색 눈동자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누리는 가볍게 날아가서 시엔느 옆의 왕좌에 앉았다.
"웃차. 내 자리는 시엔느 바로 옆이네?"
"솔직히 이 중에서 가운데 앉을만한 사람은 울 아빠 밖에 없지?"
"그렇긴 하지"
다섯명의 대마왕 중에서 세명만 꼽으라면 역시 최강,최흉,최악 세명의 대마왕이지만 만약 한명만 뽑으라고 한다면 최강 뿐이다.
괜히 팬텀이 최강의 대마왕이란 칭호를 받은게 아니다. 나머지 대마왕 전부가 덤벼도 팬텀을 이기지 못할 정도니까 말 다했다.
중앙에는 팬텀이, 그 오른쪽에는 시엔느와 누리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반대로 왼쪽에는 최악과 유토피아의 자리였다.
"뭐야, 슬슬 시작했어요?"
"네가 제일 늦어"
"최악씨가 아직 안왔는데요?"
"걔는 설거지 시켜서 늦는거고. 아니였으면 미리 와서 기다렸겠지. 평소 행실을 보자"
"결국 제가 먼저 왔잖아요?"
"맞을래?"
"아뇨, 누리랑 달리 그런 취미는 없어서요"
"누가 들으면 내가 마조히스트 성향인줄 알겠네........오또케 알아찌!!!!"
"대놓고 말하고 다니는데 누가 몰라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의미없는 잡담이 대부분이지만 제이슨 요원을 비롯한 미국 대사 일행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문명은 고작 따위로 판단할 수준의 존재들이다.
과연 저게 가식일까 진짜일까? 만약 가식이라면 왜 그런거지? 우리를 떠보기 위해서?
정보부 소속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심하는게 버릇인 그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지만 전부 삭제했다. 어차피 저 정도의 존재들이 그들에게 뭔가 해보려고 한다면 그런 간접적인 방식보다 직접적인 방식이 훨씬 편하고 빠를 것이다.
"아, 진짜 이 새끼들 한명도 안도와주냐. 느그들 인성 알만하다"
"앗, 시엔느는 도와준다고 했는데!"
"애들은 놀면 되는거야. 너희들한테 말한거 아니니까 됐어"
"이 새끼 아까는 시집 보내란 소리 하더니 이제는 애야?"
"부모 눈에는 애들은 언제나 애지"
"아, 그건 인정"
최악까지 물기가 묻은 손을 닦으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그도 왕좌에 앉았다. 다섯명의 대마왕이 각자 앉아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래서, 왜 왔냐?"
팬텀이 그들에게 물었다.
간결한 질문에 예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그들을 아래로 보고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였다.
"저희는 미국의 대사로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들의 의중을 묻고 앞으로의 장래를 생각해보고자........"
"짧게"
".......예, 저희 미국은 여러분들의 힘이 되어 지구에서 머무르시는 동안 모든 편의를 봐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로비의 나라라고 하더니 우리한테 로비하면 넘어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찌 여러분들에게........"
제이슨 요원은 목이 꺽이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필사적으로 변론하지 않으면 목숨이 아니라 국가가 날아가도 이상할 판이다.
"뭐, 농담이예요. 좋게 대한다고 좋게 판단하지도 않지만, 나쁘게 대한다고 나쁘게 판단하지도 않으니까요. 판결에 개인적인 사감을 넣으면 몰매 맞으니까 결국 뭔짓을 해도 판결은 공정하게 주거든요"
"넌 트집 잡아서 태클 거는게 일이잖아"
"여기서도 그 소리 할래요?"
"근데 미국 정도면 무난하게 합격점 아니야?"
"시엔느도 딱히 반대 의견은 없는데. 민주주의 국가에 비교적 잘 운영하고 있고"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전부 그 이념대로 잘 운영하는건 아니지만 미국 정도의 나라면 그나마 잘 운영하는 축에 속한다.
일본 같은 예를 보자면 겉만 민주주의지 속은 고위직은 혈연과 지연이 없으면 오르지 못하는 유사 민주주의 국가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자유를 쟁취한 국가와 전범국으로서 외부 간섭에 의해 민주주의로 바뀐 국가에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그런걸로 봐주고 그랬으면 처음부터 대마왕으로 선택받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목적이 있다면 접어두는게 좋아. 순수한 호의라고 한다면 받아줄 용의는 있지만 그에 대한 혜택은 바라지 마라"
".........저희 미국의 심판은 언제 시작하실 생각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글쎄, 미국은 일본 끝내고 할 생각이였는데. 잠깐 건너 뛰고 미리 해둘까?"
별거 아닌듯 내뱉는 말에 제이슨 요원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건 어디까지나 심판이지 그 순서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오늘 중으로 모든 심판을 끝낼 수도 있고 반대로 몇달이 걸릴 수도 있다.
괜한 말로 화를 불러들인거 아닌가 자신의 입을 원망한 그가 대마왕들을 올려다 보았다.
"왜요? 순서상으로 봐도 미국은 좀 멀지 않아요? 아마 일본 끝내고 중국쪽 방향으로 잡고 심판해도 지구 한바퀴 돌아서 차례가 돌아올텐데요?"
"반대로 가면 제일 처음이란 소리잖아"
"흐음, 나는 찬성. 매도 미리 맞는게 낫다고 하잖아?"
"시엔느도 찬성!"
"나도 딱히 신경 안쓰니까 마음대로 해"
"그러면 찬성 세표로 진행할까?"
쿠웅!!!
그 순간 그들의 기색이 바뀐다. 거대한 의지가 꿈틀거리면서 수조톤의 순금으로 이루어진 성을 덜덜 떨게 만들었다.
팬텀의 모습이 변화한다. 이전과 같은 심연의 거인은 아니지만 확실히 동일한 존재라고 알 수 있을법하게 전신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가까이서 보면 정말로 이질적인 모습이다. 검은색을 반사시켜서 검은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빛을 흡수해서 반사시킬 빛이 없기에 검은색으로 보이는 듯한 완전한 검은색이다. 하지만 그것에서는 색 이상의 공포감과 혐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부터 미국에 대한 심판을 시작한다]
거대한 의지가 그들의 뜻을 알렸다.
* * * *
미국에 있던 드레이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의 수뇌부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원래 황금성으로 보낸 미국 대사 일행의 장비를 통해서 현장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기로 했지만 그들의 성에 들어가는 순간 연락이 끊겼다.
덕분에 그들이 할 수 있는건 기껏해야 위성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 정도였다. 일분이 일년처럼 긴 시간을 긴장하면서 보내고 있던 그들은 이윽고 전 인류에게 퍼지는 의지를 듣게 되었다.
[지금부터 미국에 대한 심판을 시작한다]
이전 심판 때도 들었던 같은 의지였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마음속 깊은 곳까지 그 뜻을 완전히 이해시키는 의지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초월자에 발을 들인 사람에게나 허락되는 기술을, 전 세계에 퍼트린다는 것은 그만한 힘을 가졌다는걸 의미했다.
"허억?!"
"대, 대통령 각하!!!!"
"올게 왔군........"
"결단을!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서 뭐?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북한이 흔적도 없이 망했는데 우리가 핵폭탄을 날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물론 북한이랑 미국은 군사력부터 경제력까지 천지차이지만 문제는 북한이 인간의 흔적, 인간의 몸뚱이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원래 황무지였던것 마냥 사라졌다는게 문제다.
핵폭탄을 날려도 그렇게는 안된다. 이미 드레이프 대통령 앞에는 미국의 핵 미사일 발사를 위한 핵 가방이 놓여져 있지만.......솔직히 이걸 쓴다고 한들 그들을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손가락으로 나라 하나를 지우려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는 핵폭탄은 그저 문방구에서나 팔던 콩알탄 수준에 불과했다. 아니, 그 이전에 지구랑 비교해도 그 수준인데 더 큰 팬텀에게는 오죽할까.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건 조국을 믿고 기다리는 것 뿐일세"
몇몇 의원들이 드레이프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보자.......총기 문제가 좀 걸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윤리에 어긋나는 문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무죄]
[군사력에 투자할 돈으로 의료 보험 쪽에 투자했으면 좀 좋겠는데요. 사람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게 중요하잖아요. 저는 그냥 유죄 줄래요]
[저만하면 괜찮은 문명 수준이고 여러가지 트러블은 있어도 크게 문제될 일은 없지. 나도 무죄]
[로비 받는건 좀 그래도 자유 민주주의에 걸맞은 정치 채제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시엔느도 무죄야.]
[프리덤!!!! 자유의 국가 앞에서 자유의 대마왕인 내가 편을 안들어줄리 없지! 나도 무죄!!!!]
[좀 과하게 자유롭다 싶은 것도 있지 않아? 로비라던가, 총기 규제라던가, 그런 쪽으로. 자유랑 방종은 확실하게 봐야 하는거 아냐?]
[랩처 수준만 아니면 갠차늠]
유죄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겨우 하나다. 그들로서도 판결이 다수결로 나온다는건 이미 짐작하고 있던데다가 이번에 심판자는 다섯명이다.
유죄는 다섯명 중에서 하나. 무죄는 반대로 다섯 중에서 넷. 명백하게 통과 된다.
[다섯 중에서 넷의 무죄로 미국의 심판은 넘어간다. 기억해둬라. 우리들의 허들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낮다. 너희들이 여태까지 양심적으로 국가를 잘 운영해왔다고 믿는다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다]
[우리라고 뭐 융통성이 없는줄 아나]
[게다가 현재가 엉망이여도 미래에 나아질 여지가 있다면 그걸도 합격점으로 쳐주거든]
[아무튼 이것으로 미국에 대한 심판은 종료하겠다]
완전한 종료.
그들의 선언에 드레이프 대통령은 공기가 빠져나간 풍선처럼 무너져 내렸다.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감이 사라지자 이어서 찾아오는건 행복과 기쁨이였다.
"가, 각하!!!!"
"........대국민 연설을 준비하게. 최대한 빨리. 연설문은.......아니, 준비할 필요는 없겠지. 생방송으로 진행할 생각이니 준비만 하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국민들도 같은 의견일 것이다. 나라 하나를 지워버릴 수 있는 괴물이 미국의 생존을 허락했다.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감정만큼 강렬한 감정도 드물었다.
그리고 드레이프 대통령은 주변을 둘러보며 모인 다른 의원들을 보며 말했다.
"의료 국영화 법안에 대한 소문을 흘려놓는게 좋겠소. 어차피 지금 당장은 무리일테니까 그걸로 의료계에서 반발이 일어나면 국가 의료 보험 쪽으로 틀어서 합의를 하는게 낫겠지"
"대통령 각하, 혹시 유일한 유죄였던 그걸......."
"고칠건 고쳐야지. 다음에도 혹시 모르니까"
평소 같았다면 의료계에서 로비를 받은 누군가는 거부할 그런 의견이였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거부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애초에 별을 지우는 대마왕에게서 그 안건으로 유죄를 받고 타박맞은 판국에 의료계에서도 반발이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이미 미국의 모든 국민이 의료 서비스 금액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미국의 고질병 중 하나가 나을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