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중국 최후의 날]
내가 루시안에게 들은 사실은 어디까지나 하논의 사후에 대해서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죽은 후에는 관리자 할지, 그냥 윤회할지 선택하는거라고.
하논은 개체수가 적다. 그렇다는 말은 결국은 어딜 가도 친척이라는 소리다.
한국에서도 세 다리 건너서 친척 아닌 집안이 없다고 하듯이 숫자가 적다면 애초에 전부 가족이나 다름없다. 물론 피가 섞이기 이전에 피라는 개념이 없는 종족이지만.
그래서 나도 시온도 그냥 친척으로 생각했다. 전 하논이기는 해도 유토피아를 빼면 처음 만나는 하논이였기 때문에 그냥 얼굴 모르는 집안 친척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뭐? 장모님?
아니, 여기서 장모님이 왜 나와.......
내가 알기로 시온에게는 가족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있기는 있지만 태어난 후로 자신을 자각한 뒤로는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저는 하논이였지요. 어머니로서의 감정보다는 효율을 중시했습니다. 아무리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하논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지식과 에테르에 충만한 에너지가 있으니 그걸로 충분할거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떴습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책임한 짓이지만요"
"........."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편하게 대했던 사람이 알고보니까 장모님이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의 반응이 정상적일리 없으니.
내가 초월자라도 감정변화는 똑같다. 아니,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도 않는데 전혀 생각도 못한 사실을 깨닫고 놀란거라 이 감정을 처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진짜? 진짜로 장모님이라고? 이제와서? 신혼이기는 해도 볼장 다 보고 있는 판에?
"이제와서 그 아이의 어머니 행세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키워준 적도 없고 만난적도 없는데 부모라기 보다는 남에 가까우니까요"
"........."
그건 시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 괜히 낳아준 부모와 키워준 부모 사이에서 고민하는게 아니다. 만약 혈연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면 낳아준 부모를 선택했을테니까.
한번도 본적없는데다 키워준 적도 없는 부모를 부모로 여길 수 있을까? 글쎄, 나는 환생때마다 부모 운이 별로 없어서 잘해야 애정을 별로 안주는 부모를 만나고 운이 나쁘면 지금처럼 어릴때 죽는게 대부분이다.
이건 내가 판단할만한 문제가 아니다. 시온이 판단할만한 문제지.
"그냥 친척인줄 알았는데. 장모님이였다니........유토피아 이 새끼도 놀라 자빠지겠네. 아니, 아닌가?"
그녀를 용서하고 안하고를 결정하는건 시온의 몫이다.
나는 말투를 좀 정중하게 바꾸었다. 아무리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사이라도 상대는 장모님이다. 모녀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반말 찍찍 뱉기에는 내 어중간한 양심조차도 꺼려진다.
얼굴도 모르는 친척이라면 몰라도 부모면 무게가 다른 법이지.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시온이랑 만나보시죠"
내가 슬쩍 권유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가 지구에서 지내는 동안, 행복해 보이더군요. 그런 아이 앞에 나서기에는 지금의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하논은 감정이 희박한 종족이다. 그래서 시온과 유토피아가 돌연변이라 그런거고 보통은 그녀의 말처럼 갓 태어난 자식조차도 두고 떠날 정도로 무덤덤하고 담백하다 못해 밍밍한 종족이다.
들어서는 알고 있었는데 그 비극을 눈앞에서 보게되니까 상당히 느낌이 그렇다.
마치 자신의 과거의 흑역사 때문에 고통받는듯한......나도 전생에 '왜 그랬지?' 하고 생각할법한 일들이 수두룩하게 있으니까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과거에 저지른 일이라도 용서 받을 수 있는 일과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 있다는것 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만날 수 없어요"
"그 용서를 빌어야 하는 대상을 한번쯤 직접 만나보기는 해야하지 않아요? 그리고 얼마나 컸는지 한번 보는 것도 좋을것 같은데"
".........."
자식의 성장은 어느 부모든 대견해하는 법이다. 아무리 그녀라도 영상으로 봤을 뿐이지 시온을 직접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런 가정사는 당사자들이 만나서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시온의 의견에 달려있으니 결과는 거기서 나오겠지.
".......알겠습니다. 다음에 시간을 내보도록 하죠"
"슬슬 청문회 시간이 다 됐네......일단 일 끝나고 정리한 뒤에 다시 이야기 해요, 장모님"
"그런 호칭으로 불러주시는겁니까?"
"일단은요"
시온이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고 손절하면 나도 그녀를 손절할 것이다. 조금 양심이 찔리긴 하겠지만 나는 시온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화해 무드 정도는 만들어주겠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면 나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장모님이라 부르는건 아직 확실하게 결정나지 않아서다.
그녀는 고개숙여서 인사하며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놈의 구치소 특수 강화 플라스틱이 사이에 있어서 좀 분위기가 칙칙하지만 그 정도는 넘기기로 했다. 애초에 비정상적인 일로 이렇게 만난거 다 아니까.
"아, 그나저나 장모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제 이름 말입니까?"
"네, 앨리사 니어란 이름은 단말 이름이잖아요. 아무리 하논이라도 시온이 태어날 때부터 자기 이름 자각하고 있는거 생각하면 있는게 당연하잖아요"
자기 이름도 없는 사람이 남의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리 없다. 유토피아도 마음이 없던 그 옛날 옛적에도 이름은 있었다.
아니, 그 시절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였지만.
"그 아이에게 준 이름은 시온입니다. 이제 하논도 아닌 저에게 남은 이름이 있다면.......엘리라고 불러주세요"
"엘리?"
단말의 이름도 엘리사인걸 보면 원래 이름에서 따서 쓰는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름이 간단한데?
아니, 이름을 지어준것도 아니라 일부러 줬다고 말한거라면 원래 이름은 엘리에 시온을 더해서 엘리,시온. 즉 엘리시온이다.
조금 생소할수도 있지만 엘리시온은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천국 같은 곳이다. 막 그냥 행복한 것보다 그냥 북유럽 신화의 발할라 같은 곳이다.
문득 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자신의 희생시켜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논은, 그 세상이 낙원이 되기를 바라면서 낙원의 이름을 쓰는것 아닌가 싶다.
유토피아, 시온, 그리고 엘리시온.
문명과 종교가 달라도 전부 낙원이나 이상향을 뜻하는 단어다. 시온에서는 그러려니 했고 유토피아에서는 혹시나 싶었지만 세번째도 그러니까 확신이 들었다.
아마 다른 하논들도 내가 아는 이름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설령 모르는 이름이라도 그 이름은 어딘가의 문명의 천국이나 낙원을 뜻하는 단어겠지.
"그러면 다음에 뵈요, 장모님"
생각할게 좀 많다.
* * * *
나는 시온에게 바로 연락을 걸었다. 청문회도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이동하고 뭐하고 빼앗길 시간을 생각하면 얼마 이야기하지 못한다.
[곧 청문회도 할텐데 왜 연락하셨습니까?]
"아니, 앨리사 니어를 만났는데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유토피아처럼 뭐 사촌이라고 합니까?]
"너네 엄마래"
[..............]
시온의 침묵이 길다. 무뚝뚝한 인상이여도 말은 많은 우리 마누라가 침묵하는건 상당히 간만으로 보인다. 그것도 이런 무거운 침묵은 더더욱.
[아무리 당신이라도 난데없이 패드립을 박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저한테 박는건 하나로 족합니다]
"아니, 욕구불만적인 이야기는 두고. 진짜 너네 엄마래. 장모님"
[........장모님?]
"응, 진짜 장모님"
아까 말한 말이 느금마에 가까운 뉘앙스였던걸까? 처음부터 말을 자세히 했어야 했군. 아니면 애초에 시온이 현실부정을 하던가.
한동안 생각을 하는건지 시온이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이윽고 말했다.
[그러면 저는 이제 친정드립 면역입니까?]
"아니, 여기서 드립 욕심이?!"
[가끔 당신이 그 소리할 때마다 때려주고 싶긴 했습니다만. 이제 친정 드립 면역입니다! 아자!]
"친정 드립은 면역이긴 할텐데 대신에 패드립에는 데미지가 두배로 들어가잖아"
[아, 그건 괜찮습니다. 어차피 정도 안든 부모라서]
".......좀 너무한거 아니냐"
시온이 결정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단호하게 미련 털어버리는건 좀.
물론 나도 환생하다 보면 부모같지 않은 부모도 자주 만났다. 바빠서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부모는 그나마 약과고 자식을 도구로 이용해먹으려는 부모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적어도 내가 노후는 봐줬지만 후자의 경우는 패륜이다. 리치킹이 되어서라도 해야하는 법이지......
아무튼 나도 부모에 대한 정은 있는데 시온은 아예 그런것도 없는 모양이다. 하기사 태어나고 자신을 자각했을 때부터 혼자였다면 애초에 그런 감정이 있을리가 없지.
[제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부모 찾는 그런 애겠습니까?]
"맞잖아"
[......애 취급하면 싫습니다]
"그래서 아예 감정이 없다는거지?"
[만난적도 없고, 생각해본적도 없습니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고아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엄마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저는 그녀한테 딱히 원망도 없지만 미련도 없습니다]
"그게 더 안좋은건데"
자고로 사랑의 반댓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했다.
증오도 결국에는 사랑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지금의 시온이 그렇다. 평생 부모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적 없으니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거다. 차라리 뺨따구라도 광속으로 후려치면 나았을텐데.
[뭐, 나중에 만나는 보겠습니다만 큰걸 바라지는 마십시오. 감정도 없는 마당에 만나봤자 어색해집니다]
"차라리 그게 낫지......아, 이제 진짜 시간 됐다. 청문회 끝나고 보자"
[끝나는건 청문회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또, 또 그 소리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들어와 내가 명목상 갇혀 있는 구치소의 문을 열어주었다.
"사회의 공기는 맛있었나? 주로 호주나 미국이나 중국 같은곳 말이지"
"음, 존맛탱"
천검 이경진 아저씨가 나를 손수 연행하러 왔다.
명목이란건 중요한 것이지. 아무리 싸움이 안되더라도 그냥 포스 유저들로 나를 연행하기에는 국민도 그렇고 높으신 분들도 불안할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경진 아저씨 한명으로 충분할리 없으니까 분명 다른 사람도 초청해서 쓸거다.
"아저씨 한명만?"
"아, 그건 아니네. 백리 학생도 청문회의 참고인 자격으로 초청했지. 아무래도 내가 못미더운 모양이군"
"사실이잖아. 아저씨가 권룡여제보다 쌔?"
"........체면이 있는데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좀 그렇지 않나?"
"사실을 알면서도 치켜세워주는게 오히려 더 나쁜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기만 아니야?"
이경진 아저씨는 나에게 수갑을 채웠다. 포스 유저 전용으로 두텁고 튼튼한 수갑을 몇개씩이나 채우고도 모자라 어디서 가져온건지 모를 질긴 포박용 밧줄까지 둘둘 말아서 묶었다.
이거 좀 심한거 아니야? 어차피 이런거 한다 한들 별 의미 없는데.
"보여주기 용이지. 수천만 단위로 사람을 죽인 괴물이 눈앞에 있는데 아무런 구속도 되어있지 않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나?"
"호랑이를 실로 묶어놓고 잡았다고 생각하는거야?"
"뭐, 최소한 없느니만 못한건 아니니까"
"아저씨도 참 고생이겠네......."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그런거지"
이윽고 이동할 준비가 끝난 나는 그를 따라서 구치소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이미 바깥에서는 몰려든 기자들이 수두룩하다.
분명히 내 집 앞에서도 기자들이 몰려와서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라고 몇놈 조져주기도 했는데 그걸 알고도 저러는걸 보면 특종을 취재하려고 목숨을 거는건지, 아니면 그냥 목숨 아까운줄 모르는 등신 새끼들인건지 구분이 안간다. 대부분은 후자겠지만.
특수 이동 차량으로 가는 와중에서 플래시 세례가 쏟아진다. 자세히 보니까 한국인 외에도 외국에서 온듯한 기자들도 있다. 조금은 발음이 이상한 한국어로 질문을 하는데 그건 노력이 가
상해 보인다.
나에게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진다.
"최악씨! 이제 곧 청문회가 열리는데 심정이 어떠십니까!!!"
"청문회의 방향성이 어떻게 진행될거라고 보시는지요?"
"최악씨! 답변 하나만 해주십쇼! 최악씨!!!"
아등바등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부질없다. 그럴 시간에 다른 사건이나 캐보는게 훨씬 이득일텐데 말이야.
나는 전부 무시하고 이동 차량에 탑승했다. 안에 탄 사람들은 이경진 아저씨를 포함해서 전부 포스 유저. 하지만 전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걸을수만 있을 뿐 온몸을 구속당한 상태라도 내가 한 일이 있고 내 무력을 아니까 이게 쓸모없다는걸 알고 혹시나의 일을 대비하는건 상당히 고역이다. 이거 완전 감정노동 아니야.
"슬슬 가자고. 청문회 후딱 끝내고 할일을 해야하니까"
"......그 할일이 부디 사람 죽는 일만 아니였으면 좋겠군"
"인간의 생사는 부질없는 법이야"
"섬뜩한 소리 하지 말게"
나는 이경진 아저씨와 가볍게 농담을 하면서 낄낄거렸다.
슬슬 차가 출발한다. 이 차가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청문회가 시작되는걸 의미할거다.
이번 청문회는 아주 재미있을거다.
그 뒤에는 청문회 같은거 열 겨를도 없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