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중국 최후의 날]
울 마누라가 나한테 뭐 숨기는게 있는것 같지만 캐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숨기는거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나도 생각해보면 시온에게 알려주지 않은거 한두개쯤은 있으니까. 음, 뭐였더라......첫사랑 이야기?
뭐, 그런거 이야기 하는것보다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하는게 좋다. 그게 더 유익하잖아.
".......갑자기 당신 첫사랑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왜?! 나는 안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시절 이야기 들은지 꽤 오래됐는데 그때 이야기는 잘 안해주지 않습니까?"
"듣고 싶어?"
"하기 싫으면 안해줘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해줘야 할것 같잖아"
엄밀하게 말하면 시온도 내 첫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단지 얼마나 알고 있냐의 차이일 뿐이지.
시온이랑은 환생 초창기부터 지내와서 어지간한건 알고 있지만 내 첫사랑 이야기 하려면 1회차까지 올라가야 하니까. 초창기랑 완전 첫번째인 1회차는 다르다. 후자가 훨씬 옛날이다.
"뭐라고 해야하나.......나한테 금발, 빈유, 안대 취향을 가지게 해준 여자? 좋은 사람이였어"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저랑 정반대라서 조금 그렇지만"
"넌 은발이라도 가슴은 빈유나 마찬가지 아니야? 성장을 거의 안하니까 가슴이 작으면 로리가 아니라 빈유지"
"앞으로 안대 하고 다닙니까?"
"좀 꼴리긴 하는데 됐어. 이상형 골라서 결혼했으면 세상에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난 널 좋아하는거지 이상형을 좋아하는게 아니라고"
"흠터레스팅"
"지금 생각해도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는 하는데.......첫만남부터 이야기하면 참 액션영화 두편 정도는 나올것 같아서 이야기가 길어져"
"밀러, 팝콘 부탁합니다"
"아니, 그런식으로도 들어보고 싶은거냐"
어떻게 만났더라.......아, 내가 1회차 청부업자였던 시절에 호위 목적으로 이탈리아로 갔을 때 처음 만났다. 나는 경호원이고 그녀는 경호 대상이였지.
......음, 막 경호원과 경호 대상과의 로멘스라. 나 이거 어느 영화에서 본 레파토리 같은데.
그런데 상대가 하필이면 다른 경쟁 마피아 조직이라서......둘이서 손발 맞춰가면서 죄다 털어버리다가 겨우 살아남아서 그게 인연이 되서 결혼했다.
내 취향도 그때 그녀에게 맞춰진거라 금발, 안대, 빈유 속성을 좋아하게 됐지.
"그 이야기는 예전에도 듣긴 했는데 이렇게 자세히 듣는건 처음입니다. 액션은 쩌는데 스토리는 2류 러브 스토리를 짜맞춘 느낌이라......"
"현실은 픽션보다 더할 때도 있는 법이잖아.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1회차 시절 지구도 평범한 곳은 아니였어. 시벌, 어떻게 살인이랑 범죄가 밥먹듯이 일어나냐?"
그 세계의 지구에서는 지금의 지구보다 사고율과 범죄율이 몇퍼센트 가량 높았다. 사고율은 왜 그러냐 하면 죽인 뒤에 사고로 위장한거라서 그렇거든.
마치 존윅의 살인청부업자들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는 세계관 비슷하다고 할까.......훨씬 질척이지만 말이다.
나는 사람은 죽여도 의뢰는 가려서 받았다. 사람 죽여놓고 생색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양심이 꺼려질만한 의뢰는 안받았다.
"그렇게 해서 결혼하고. 애도 낳고.......아, 근데 그때 낳은 애들이 참 범상치 않았는데. 나 닮아서 몸 쓰는 재주 있던 애들도 있고 엄마 닮아서 머리 쓰는 재주도 있는 애들도 있고 막 그랬어"
"흠........"
"왜? 아이 낳고 싶어서?"
"솔직히 저는 안에 싸도 임신을 못해서 거의 불임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임신하려면 따로 과정을 거쳐야지 안그랬으면 진작에 애들로 학교 하나 만들었습니다"
"야, 그 정도는 아니지"
"1,2년에 한명쯤은 분명 낳을텐데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말하니 또 그러네"
시온이랑 지내온 시간이 수천년인데 그 와중에 애를 낳았으면 못해도 몇백명은 나왔을거다. 피임 안해서 편하긴 한데 이럴때 보면 아쉽긴 했다.
시온은 하논이란 종족이다. 원래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에테르로 이루어진 에너지체에 가깝다. 지금의 인간형 몸뚱이는 단지 의태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임신을 하려면 특수한 방법이 필요했다.
예전에는 내가 약해 빠져서 못했는데 초월자에 이른 지금은 가능하다. 만들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임신시킬 수 있다.
다만 타이밍이 나빠서......나중을 기약하자. 나중에.
"근데 자꾸 그렇게 캐물을거야? 그러면 나도 뭐 숨기고 있는지 물어본다?"
".......당신 깜짝 생일 파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 생일 지난지가 언젠데?"
내 생일은 10월이다. 아, 이 몸뚱이 생일로 치면 그렇다.
그런데 어차피 내 생일 같은거는 챙길 필요도 없다. 죽으면 생일도 바뀌는데 생일같은거 계속 따지면 1년 중에 생일 아닌 날이 얼마나 있겠냐?
오늘만 하더라도 앗, 36회차 생일! 같은 식으로 따지면 한도끝도 없는데.
시온도 그걸 알아서 내 생일 안챙긴다. 기껏해야 선물 같은거 좀 챙기지, 그래서 나도 시온 생일은 안챙기고 결혼 기념일만 챙길 뿐이다.
"레이즈 녀석도 뭔가 숨기는거 있고......예진이도 잔다고 그러는데 그거랑 관련있는거지?"
"그 일은 해결 됐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거 보면 뭐가 있긴 있었나보구나. 알았어, 네가 그렇게 알려주기 싫으면 내가 더 이상 캐묻진 않을께"
이야기를 다른 소재로 넘기려고 뭔가 생각하다가 생각난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갓-루리루리가 해줬던 이야기 있잖아. 블러디어 온다는거 말고"
"아, 제 종족에 대해서 잘 알아보라고 한거 말입니까?"
"그래, 그거"
임신 소재 때문에 잠깐 하논에 대해 생각난 김에 지금 찾아보기로 했다.
하논은 블러디어와 같은 4대 초월종 중에 한명이지만 그 생태는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모른다. 시온 본인도 하논이지만 자기가 인간이라고 인간의 상태를 전부 아는건 아니지 않은가?
호라이즌의 데이터 베이스에도 딱히 하논에 대한 정보는 깊게 다룬게 없으니까 지금은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어디보자.......그 새끼 단말 주소가 여기 어디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
"그냥 호라이즌보고 전화 걸라고 하면 됩니다"
"아, 그러네. 밀러, 루시안한테 전화좀 걸어봐"
[알겠습니다]
운명의 절대자가 내 상사라고 한다면 지금 연락하는 놈은 그 중간쯤에 있는.......뭐라고 할까, 바로 위의 상사? 대충 내가 신입사원이고 그놈은 대리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아, 그러면 운명의 절대자는 사장님쯤 되겠네.
아무튼 밀러에게 말하자 자동으로 연락이 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차원중계기를 통해서 수신해야 하기 때문에 좀 걸리지만 이 호라이즌에는 그런거 필요없이 차원 너머에도 송수신이 가능해서 금방 된다.
이윽고 빈약해보이는 체구의 남성이 얼굴을 비춘다. 바깥보다는 어디 안에서 일하는 듯한 여리여리한 모습, 잘생기긴 했지만 성격은 그걸 쌈싸먹을만큼 병신이다.
[오, 간만이네? 어쩐일로 네가 먼저 연락을 해?]
"새꺄 느그 어머니는 안녕하시니?"
[이 새끼가 다짜고짜 처음부터 패드립이네]
"거 시발 멀쩡히 살아 있다는거 아는 판에 물어보면 그냥 안부인사지"
[어떤 새끼가 안부 인사를 그따위로 물어보냐? 야만인도 그런 식으로는 안물어볼텐데?]
"그야 야만인은 무례한 말을 하면 뚝배기가 깨지니까 그런거고"
[아무튼 우리 콩나물 어머니는 멀쩡해. 그런데 진짜 무슨 일로 연락했어?]
그의 이름은 루시안 스토리텔러.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루시안 스토리텔러 더 위즈덤 로드.
나의 최씨 가문과 비견되는 스토리텔러 가문의 현 가주이자 위즈덤 로드라는 초월자다. 경지만 따지면 나보다 상위의 초월자다.
단순히 그것만 따지면 모르겠지만 그는 외견과 다르게 나이가 아주 많다. 로드에 이르면 노화라는 개념을 탈피해서 늙지 않는데다가 로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된 존재라 수명이란 개념도 없다.
자살 아니면 타살, 두가지 방법으로 밖에 죽지 않는 존재가 방구석에 콕 하고 박혀서 살아왔다면 과연 얼마나 되는 시간을 살 수 있을까?
"물어볼거 좀 있어서 연락했어. 시간 괜찮냐?"
[나야 언제나 시간이 넘쳐나지]
"새꺄, 그럴 시간 있으면 운동을 해 운동을. 아주 그냥 멸치 새끼가 따로 없어요. 나도 막 비리비리한 사람 무시하고 그러는 성격이 아닌데 초월자가 육체능력이 그따위면 나가 뒤져야지"
[응 그래도 너보다 쌔~]
"아오, 빡치네"
나보다 상위 초월자지만 몸 쓰는 기술만큼은 내가 더 위다. 저쪽은 전공이 자기 몸쓰는게 아니라서 그런거긴 해도 초월자로서 경지가 있는데 그 최소치마저도 나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소리다.
아니, 생각할수록 빡치네. 나도 머리 쓰라는거 못하긴 하지만 최소한 싸울 때 머리 돌아가는건 잘한다. 특화된 부분이 다르기는 한데.......루시안 저놈 새끼는 정말.
"아무튼 하논에 대해서 좀 아가리 털어봐"
[옆에 제수씨 있잖아. 물어보면 되는거 왜 그래? 아, 인사가 늦었네요, 제수씨. 안녕하세요?]
"간만입니다, 루시안씨"
[나도 막 제수씨 같은 참한 히로인 있었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추가적인 조건으로 적발 트윈테일 츤데레 로리였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고!!!]
"그니까 그 나이 처먹고 솔로지 새꺄!!!!"
루시안 특 ) 변태새끼임.
저 새끼는 나이도 존나 처먹은 초월자인 주제에 변태 새끼다. 나도 합법로리 마누라가 있는 마당에 변태가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건 시온이라서 그런거지 초등학생인 어린애 보고 꼴려하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다.
분명 로드 정도 되는 초월자가 된다면 충분한 정신수양을 했을텐데도 그러는거 보면 일부러 그러는건지 아니면 천성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저 변태적인 취향에 잘 맞는 몇몇은 정말 잘 지내지만.
편하게 대해도 내 상사인 것도 있고 워낙 상식을 초월한 변태새끼라 어지간하면 상종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 이 새끼가 얼마나 강한 괴물 새끼인지도 대충 보이니까 그런 것도 있고.
[근데 하논이라.......따로 내가 쓴 책 있는데 그거 보내줄까?]
"거 시발 쓴 작자가 눈 앞에 있는데 왜 책을 읽어야 해?"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아니, 이 새끼 언제적 소재를?!"
[아무튼 직접 이야기 해주려고 해도 내용이 꽤나 방대해서 설명하기가 까다로운데. 내가 쓴 책만 하더라도 1000페이지 넘어가는 두꺼운 책이란 말이야]
"거 시발 엄마 집에서 얹혀 사는 새끼가 시간 널널하면 아가리 좀 털어볼 것이지"
[야! 말은 똑바로 해! 난 엄마 집에서 얹혀 사는게 아니라 엄마 가게에서 일하는거라고!!!]
"그 나이 먹고도 독립 안하면 얹혀사는거지 뭐"
[내가 독립하면 울 엄마는 누가 챙겨주는데? 천년 단위로 햇볕 한번 볼까말까한 우리 콩나물 엄마를 내가 안챙기면 아마 만년이 지나도 밥 한끼 안먹을껄?]
"어차피 절대자라서 밥 안먹어도 되잖아"
그의 어머니는 절대자다. 책으로 이루어진 지식의 성 '아카식 레코드'의 주인이자 모르는게 없다고 일컬어지는 지식의 절대자가 그의 어머니다.
몸 쓰는게 특기도 하니고 절대자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평가 받기는 하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싸우면 쪽도 못쓴다. 루시안 새끼한테 덤비면 내가 이길 확률이 1퍼센트라도 있지만 지식의 절대자는 그 1퍼센트를 수만개로 쪼갠 확률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전에 로드 이겼다고 하긴 했는데. 그 새끼는 비교적 약한 놈이었고. 같은 수준이라도 차이는 있다.
"좀 특징적인거라도 이야기 해봐. 알아볼게 있어서 그래"
[딱히 큰건 없는데......일단 기본적으로 니가 알고 있는게 거의 대부분이야. 제수씨가 아무리 돌연변이 수준으로 하논이랑 동떨어져 있어도 결국은 종특을 벗어날 수는 없어. 그건 천성이니까]
"뭐 울 마누라가 이상하단 소리 하고 싶은거냐?"
[그게 아니라 결국에는 운명이 정해준 법칙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거지. 제수씨 막 덕질하는거 좋아하긴 해도 다른 문명의 문화들을 싫어하는건 아니잖아? 좀 더 덜 좋아할 뿐이지. 문화를 좋아하는건 하논의 특성이야]
"유토피아는 빼고?"
[그 사이코패스 새끼는 좀 접어두지?]
"시벌, 안그래도 처남인데 신경 안쓰는게 가능하겠냐? 게다가 처남이 장인 역할도 맡고 있으면 리얼 씹창이지"
[님 고운말 쓰세요]
"응, 느금마~"
[아오, 이 새끼 예전부터 만난거 길을 잘못들였어. 진짜로 울 엄마한테 말한다?]
".........아니, 그건 조금"
[역시 협박이 제일 잘 듣는군]
지식의 절대자가 오면 행성 한두개 레벨이 아니라 우주가 날아간다. 절대자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다.
아주 그냥 마마보이구만. 수틀리면 엄마 부른다니까. 누구는 그런 엄마도 없는데.
"가슴 만지시겠습니까?"
"아니, 이 나이 먹고 테에엥, 시온 마마 하는건 조금"
"그 드립은 별로 안좋아합니다"
"앞으로 안쓸게"
아는건 많은 놈에게 물어봐도 실질적으로 얻는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연락한게 별로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끊으려고 했던 찰나.
[아, 그래도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있는데]
"뭔데?"
[하논의 사후에 대해서야]
".........?"
사후?
죽은 뒤의 이야기가 왜 거기서 나와?
뭐지? 이모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