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중국 최후의 날]
청문회의 날짜가 일주일 뒤로 잡혔다.
솔직히 여기서 밥도 잘 나오기는 하지만 핸드폰만 만지고 일주일만 뻐기는건 생각보다 지루하다.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핸드폰 하고, 시온이랑 연락은 하지만 솔직히 좀.......아, 섹스를 안해서 그런가.
그러다가 백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 백리냐. 어쩐 일이냐?"
[유치장 안은 살만 해요, 형?]
"지루해 죽겠다"
[살만하단 소리네요]
"야, 교도소면 최소한의 인권 어쩌구 하면서 운동 시간은 주지. 여기는 내보내주지도 않아. 밥은 하루 세끼 꼬박꼬박 나오는데 하루 죙일 핸드폰만 만지고 있으면 솔직히 지루한데 당연하지"
[내 세금!!!]
"그런 타령해봤자 의미 없다"
하지만 백리도 백리 나름의 사정이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전화를 한걸 생각하면 뭔가 일이 있던 모양이다.
"그래서 뭔일이냐? 나한테 전화한거 보면 내가 해줄수 있는 일이란게 분명한데"
[.......눈치 깠어요?]
"너 내가 등신으로 보이니? 이런 일에는 한눈치 한단데. 그니까 말해봐, 귀찮은거 아니면 들어줄께"
[음......제가 일본 외무성에서 나온 사람이랑 만나봤는데요]
백리가 하는 이야기는 요컨데 그거였다. 일본쪽에 제염 기술, 못해도 제염 장비를 대여해달라고.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나는 백리가 귀엽게 보였다. 마치 사회의 쓴맛을 덜봐서 멋모르고 움직이는 사회 초년생을 보는것 같다.
솔직히 그렇기도 하다. 백리는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치킨집에 취직했다. 가게에서 일한걸 사회 생활로 치더라도 결국에는 몇달에 불과하다.
나야 전생의 경험이 있지만 백리는 그런거 없는 순짜 20대 청년이다. 그런데 거기서 인생의 지혜 같은걸 바라면 안되겠지.
사회 초년생에게 전문 사기꾼이 와서 말로 구슬리는데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특히나 백리처럼 착한 애면 더욱 그렇겠지. 동정심을 자극하는 방법도 있고 말이야.
"걔네가 너한테 뭐 줬냐?"
[.......딱히 받은건 없는데요]
"받은거 없으면 해줄 필요도 없어. 받는다 할지라도 해줘야 할 의무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너는 널 대신 봐줄 사람부터 찾는게 좋겠다. 우리 집 김 변호사님 이제 일이 없어질테니까 그분한테 상담해봐"
[김 변호사님이라면 형 가게 그만 둘 때 소개 시켜줬었잖아요]
"아, 그랬나? 아무튼 너는 사회 경험이나 사람 보는 눈이나 둘 다 부족해.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능력있는 사람을 믿는게 제일 좋아"
[흐음.......]
나도 내가 능력이 없는건 제일 잘 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머리쓰는 능력은 전혀 없지. 머리 쓰는건 내가 아니라 시온의 몫인데다가 초월자에 이른 지금도 천재들의 머리와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건 믿을만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다.
머리 쓰는 능력이 없다면 머리 쓰는게 특기인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된다. 거기에서 중요한건 신뢰도인데 나는 사람 관상 파악하는게 특기라 그게 가능하다.
내 감이랑 여태까지 많은 사람들을 보고 살아온 빅 데이터 같은게 합쳐져서 내는 결론이기는 한데......그래도 이게 확률이 상당히 높다. 이 관상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몇 없으니까.
"아무튼 일본 그 새끼들 발등에 불똥이라도 튄 모양인데?"
[왜요?]
"여태까지 조용하던 그놈들이 직접 찾아와서 그 지랄 할 정도면 안봐도 각 나오지 않니?"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건은 분명 일어났지만 정작 일본 정부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안하고 있다는게 더 가까운 표현이겠지.
그 시절의 체르노빌 사건 당시 소련은 말 그대로 사람을 갈아넣어서 막았는데 불구하고 일본은 꼬라지가 그렇다.
러시아에 빌려준 제염 장비는 우리가 말을 해둬서 대여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소극적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적극적으로 나온다?
거 시발 안봐도 드라마 재방송이네.
"아마 일본 쪽에서 널 이용해서 나한테 뭔가 뜯어낼 생각이넫.......아무리 생각해도 너 하나로 끝날것 같진 않단 말이지. 여러가지 의미로"
[무슨 뜻이예요?]
"히어로가 정체를 숨기는 이유 모르니? 얼굴 까발린 이상 네 소중한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거야. 나는 그나마 내 손에 닿는 사람들을 지킬 자신이 있지만, 너는?"
[.........]
"그러니까 네가 아직 어리다는거야. 몇년 정도 더 지나면 나름 쓸만해질텐데, 너무 이른 타이밍에 너무 난이도 높은 일을 겪고 있어"
물론 난이도가 높은 이유 중 태반이 나 때문이지만.
조금만 더 많은 일을 겪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좋을텐데, 그러면 지금처럼 사람들 구하겠다고 나대지는 않고 적당히 좋은 영웅이 됐을테니까.
"그리고 이야기의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제염 장비 대여해줄 생각 없다"
[왜요? 러시아에는 빌려주지 않았어요?]
"그거야 그건 우리들이 저질러서 생긴 일이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를 내가 터트렸니? 결국 관리를 좆같이 한 걔네들 잘못이잖아?"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문명에 대해서는 방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변덕으로 사람을 구하고 죽여도 결국 문명은 번성한다. 내가 빡쳐서 문명 하나 지워버리는 일은 직업상 업무 외에는 정말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지구에서 아틀라스의 일이 끝난다면 저어기 차원 너머의 프로메테우스의 차원.......그러니까 티브인지 뭔지의 문명으로 넘어가서 그놈들을 박멸하고 지구 침략 위기에서 구해줄 생각이지만 지구 문명 스스로 멸망하는 일은 손대지 않을거다.
"내가 제염 장비를 빌려주거나 제염 기술을 알려주면, 걔네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냐? 방사능 같은거 정화하면 되지! 처리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핵폭탄 펑펑 쏴댈거라고 생각이 안들어?"
[어......그렇기도 하네요]
"그니까 내가 손을 대지 않는거야. 인류 문명은 자기 힘으로 커야 하는 법이지. 넘어진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는건 쉽지만 그래서 아이는 평생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울 수 없을테니까"
[............]
"이번건 비유가 쉬우니까 이해가 됐지?"
[네, 알았어요 형. 일본에는 그렇게 이야기 해둘께요. 어차피 약간 내키지 않는 느낌도 있었어요]
"그래, 잘 해봐라. 루리한테는 안부 전해주고. 이쪽도 슬슬 손님이 온것 같아서 말이야"
[손님이요?]
나는 슬쩍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서 껐다. 그리고 강화 유리창 바깥으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익숙한 얼굴, 한쪽은 제이슨 요원이라서 그리 특이할게 없었지만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문제다.
"거 귀하신 분이 왔네. 여긴 어쩐 일이야?"
"재회하는게 상당히 나쁜 상황이라서 좀 그렇지요?"
"별로 나쁜건 아닌데 들고온 소식은 좋은거였으면 좋겠네"
"충분히 좋을겁니다"
LA리언......아니, 알리언 박사가 내가 갇혀 있는 유치장에 방문했다.
* * * *
알리언 박사와의 만남은 미국에 갔을 때 한번 만난거라 이번이 2번째다.
좋은 손님이냐 나쁜 손님이냐를 묻는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할 정도로 사이는 나쁘지 않다. 그 수다스러운 점만 어떻게 해결한다면 말이지.
"무슨 이야기를 들고 왔길래 그러시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제이슨 요원?"
"박사님, 박사님은 VIP 다음 가는 중요 인물로서......."
"제가 하는 행동이나 이야기에 대해서 전부 감시해야 하는거 압니다. 제발 부탁이니 이 자리만큼은 피해주십시오, 미국에 이득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는 일입니다"
".........."
제이슨 요원은 알리언 박사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를 힐끔 보더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10분 밖에 드리지 못할겁니다. 도청장치는 없으니 걱정말고 이야기 나누십시오"
"고맙습니다, 제이슨 요원"
알리언 박사는 미국의 중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비켜준다는건 딱히 그의 의견 때문이 아니라 내 눈치가 보여서 그랬을 것이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면 절대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겠지. 미국이란 자유의 나라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 이면에는 자유라는 명목 하에 억압을 묵인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물론 그게 나쁜게 아니다. 만약 정말 자유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온갖 범죄도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돌아다니게 될테니까. 아, 갑자기 바이오 쇼크 시리즈가 생각나네.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온거야? 댁은 보통 미국에만 있는거 아니였나?"
"저라고 미국에만 박혀 있는건 아닙니다. 연구를 위해서 해외로 나가기도 하죠. 마스터 유저 같은 경우는 대부분 국내 수도에 대기 중이라서 그들을 만나려면 제가 움직이는 편이 더 낫거든요. 지금은 망해가지만 중국이라던가, 영국이나 러시아, 뭐, 이번처럼 한국도 종종 오갔고요"
"아, 그러긴 하지. 그러면 이번 일은 백리 때문에 온건가?"
"명목상 말이죠"
"흐음"
알리언 박사가 가지고 온 소식은 아무래도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에 관련된 것 같다.
예를 들어서.......아틀라스와 관련 됐다거나.
"제가 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 하십니까?"
"그 새끼들 꼬리를 잡았어?"
"꼬리까지는 모르겠지만 실마리는 잡은것 같습니다"
"와, 유능!"
"하지만 자세한건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와, 무능!"
"........."
순식간에 바뀌는 내 태도에 알리언 박사가 조금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다시 본제로 돌아왔다.
예전에 알리언 박사는 자신이 몰래 교류하던 조직의 존재를 내게 알려주었다. 아무리 아틀라스라 하더라도 알리언 박사는 미국의 감시 아닌 관심을 받고 있기에 쉽사리 끌어들이기 어렵다.
애초에 미국 같은 나라가 아틀라스랑 동조하면 그 순간부터 현실이 폭망하니 그냥 처음부터 리셋하는 편이 낫다. 다른 의미는 없고 영향력적인 문제 때문에 말이다.
아무튼 알리언 박사는 몰래 교류하던 그들과 아직도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전에 듣기로 적성종 박멸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인체실험을 하는걸 몰랐을 때의 기준이라서 알리언 박사는 나름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
"아무래도 저쪽도 상당한 타격을 받은데다 당신 덕분에 내부가 소란스러운 모양입니다. 그쪽에게 보낸 데이터에 몰래 바이러스를 심어서 보냈더니 이번에는 약간이지만 그들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정말? 쉽진 않았을텐데?"
상대는 영자 컴퓨터를 사용하는 조직이다. 알리언 박사랑 교류하던 곳이라면 분명히 놈들의 본거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메인 실험실일텐데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고?
"들킬 염려가 있어서 바이러스의 용량은 최소한으로, 그리고 일회용으로 만들어서 자동 삭제하는 기능까지 첨부해서 겨우 알아낸겁니다. 그나마도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을것 같고요"
"얻은 정보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했습니다"
"어딘데?"
"호주입니다"
"신빙성이 있군"
여태까지 아틀라스의 실험실들은 마스터 유저 때문인지 마스터 유저 보유국에 존재했다. 천검이 있는 한국, 권룡여제가 있는 중국, 눈의 여왕이 있는 러시아, 그리고 나이트 가웨인이 있는 영국까지.
만약 똑같은 조건이라면 나머지 선택지는 슈텐도지의 일본, 썬더볼트의 미국, 살라딘의 터키, 호주의 소닉으로 나뉜다.
자그마치 4개나 되는 선택지라서 고르기도 힘들다. 하지만 미심쩍은 곳이 그 범위에 있다면 선택은 쉬운 법이다.
"그래서? 이걸 나한테 일부러 말해주러 온 이유는?"
"당신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말고도 이제 쌘놈 많......아, 근데 권룡여제나 백리를 생각해도 힘들긴 하겠네"
놈들의 본거지에는 뭐가 있을지 모른다. 프로메테우스의 복제품이 아닌 본체가 당연히 있을거고 한국, 러시아, 영국, 중국 등에서 얻은 실험 데이터를 통해 총망라한 실험 결과물들이 있을 것이다.
권룡여제라면 무림에서 구른 경험이 있으니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놈들을 박멸할 수 있을지는 애매하다, 그리고 백리는.......솔직히 이런 일은 내가 시작하고 내가 했는데 마무리도 내가 지어야지.
"게다가 호주는 넓습니다. 괜히 호주의 마스터 유저인 소닉이 유일하게 음속으로 이동 가능한 마스터 유저가 아니니까요. 그 넓은 곳을 혼자서 커버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보통 마스터 유저는 수도권 방위만 하지 않나?"
"그거야 적성종이 상대일 때의 이야기고요"
".........?"
"호주는 원종들의 마굴입니다"
간만에 나온 단어지만 원종은 지구 내 생명체가 포스 유저로 각성한걸 말한다.
백리에게서 들은 말에 의하면 관리자가 짜둔 시스템에 의해 일률적으로 각성하게 두는거라서 종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데......댕댕이의 어미도 여우 원종이였고 백리가 한강에서 조진 것도 개구리인지 두꺼비 원종이였다.
하기사, 호주는 자연 환경이 비교적 유지되고 있는 곳이니까. 브라질이야 예전에 아마존이 확 타버려서 호주보다는 덜할거다.
"알았어, 내가 가지. 대충 청문회 전까진 다녀올거니까 일주일 내에 떡을 쳐야겠군"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아는 사람이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전령으로 쓸 정도면 드레이프 대통령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드레이프 대통령은 아니고 직접 만나본 적도 없을테지만......당신도 아는 사람입니다"
누구지? 미국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바깥에 있을 제이슨 요원과 썬더볼트인 제이콥 정도인데. 둘 다 안면이 있으니까 아니다.
이름만 알고 만난적 없는 사람. 혹시.......
"앨리사 니어 양이 조만간 만나자고 하더군요"
미국의 예지계 포스 유저, 하지만 실상은 이 차원의 우주의 관리자의 단말. 그녀가 만나자고 한다.
제 발로 찾아오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