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중국 최후의 날]
예진이는 느닷없이 눈을 뜨며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렀다.
"내가 입찰한거에 상회입찰 하지 마!!!!"
"머임?! 대체 머임?! 왜 갑자기 용개형이 빙의 됐습니까?"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예진이를 놀란듯이 눈을 꿈뻑이며 보는 시온은 다른 사람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놀란 기색이 보이는 표정이였다. 솔직히 멀쩡하게 잘 자던 사람이 그러면 솔직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정작 예진이는 잠깐 멍 때리다가 잠이 깨나 싶더니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어.....제가 방금 무슨 말 했어요?"
"스트레스가 많은건 이해합니다. 그러니 일단 선내의 진료 시설에 들러서 한번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보는게 어떻겠습니까? 최소한 메뉴얼만큼은 잘 하기 때문에 괜찮을겁니다"
"정신병 있는 사람 대하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주실래요?!"
시온과 예진이, 두사람이 있는 곳은 집아 아니였다. 이미 시온과 최악의 신혼집은 내부에 있는 오버테크놀러지 관련 시설은 전부 해체한 후에 부동산에 올렸다.
최악이 거짓말을 안하듯, 시온도 허언은 안하는 성격이다. 재산을 처분한다고 했으니 전부 처분할 생각이다. 단, 지구에서 벌어들인 재산만.
애초에 최악이 죽으면 시온은 망설임 없이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다음 환생의 최악을 찾아 떠난다. 그게 좀 더 이르다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시온의 차원항행함 호라이즌의 선내였다.
"......언제 봐도 여기는 적응이 안될것 같아요"
"익숙해지면 여기만큼 살기 편한 곳도 없습니다. 그이가 환생 할 때마다 필요한 물건이나 설비는 다 구비해두기 때문에 구경하는데만도 며칠이 걸릴겁니다. 아, 심지어 선내에 놀이동산도 있습니다"
"진짜요?!?!"
차원항행함 호라이즌은 길이만 30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장을 자랑한다. 덕분에 서울 전역에서도 볼 수 있고 서울이 아니더라도 날씨만 맑다면 인근의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있을법한 거대한 크기였다.
함내에 놀이공원 같은 시설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거라도 없으면 지극히 공간 낭비니까.
"뭐, 일단 이 함선은 딱히 전투용이라던가 그런게 아니라 개인휴향용입니다. 말하자면 크루즈 선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으음......그러고 보니까 크루즈 선은 엄청 크긴 했긴 한데요. 그래도 너무 크지 않아요?"
"저는 성능충이라 원하는 기능은 다 때려박아넣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이거 하나 만드는데 들어간 돈을 따지면 미국의 국가예산 천년치도 어림없습니다"
"그 돈은 어디서 났어요?"
"기술 몇개 팔고 사업도 조금 하다가 기업을 팔아서 돈 좀 만지고. 뭐, 그러고 100년쯤 하니까 대충 벌게 되었습니다"
"우와......."
"아, 그리고 예술품 보관소에는 고흐 작품 몇점이랑 유명 화가들 작품도 상당수 있으니 한번 둘러보십시오. 오다가다 수집한게 꽤 많습니다"
"......더 이상 놀랄 힘도 없네요"
시온은 인류가 만든 모든 문명과 예술품을 사랑한다. 단지 거기서 애니와 만화 같은걸 좋아하는건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이고 실제로는 미술품도 자주 수집한다.
단지 평범하게 존속하고 있는 문명의 미술품은 그대로 사회에 환원하고 당사자를 만나서 직접 거래한 예술품이나 이미 멸망해서 미술품의 가치가 없는 세계의 것을 수집하는게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양은 상당해서 미술관을 하나 차려도 될 수준이다. 1년에 작품 하나만 수집해도 수천개에 달하는데, 괜히 수 천년동안 살아온게 아니다.
"게임이나 서적도 마찬가지고. 이 함선 안에서 문명을 이룩해도 될 정도로 설비는 완벽합니다. 거주구역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꾹꾹 우겨넣으면 수십만명은 태울 수 있을 정도입니다.
장기간 거주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말입니다"
"정말로 사람 모아다가 이주해도 될것 같네요"
"저희끼리 가면 솔직히 좀 외롭지 않겠습니까? 저나 그이라면 그냥 알콩달콩 살아가도 나쁘진 않겠지만 기왕 화성에 테라포밍 하는김에 그냥 사람들 데려다가 화성 개발이나 해보려고 합니다"
"오......"
두사람은 차원항행함 호라이즌의 내부, 정확하게 말하면 선장실에 있었다.
전방에는 탁 트인 투명한 창이 있어서 바깥의 경치가 전부 보였고 시야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창 옆에 작은 홀로그램 화면이 떠 있었다. 어딘가의 뉴스, 정보, 그 외 기타 유튜브 영상들 등등. 상당히 난잡하다.
"지구의 일이 마무리 되기 전까지는 여기서 머무십시오. 모든 생활에 필요한건 선내 인공지능이 전부 챙겨줄겁니다"
"인공지능도 있어요?"
"호라이즌의 메인 인공지능의 이름은 '밀러'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진양]
허공에서 들려온는 듯한 목소리다. 포스 유저인 예진이도 어디서 들리는건지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목소리가 좀 익숙하다는 점이다. 물론 아는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고 어디서 들어본 수준의 목소리인데......
"이 걸걸한 남자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본것 같은데요.......매트릭스의 모피어스 아저씨?"
"뭐, 맞긴 합니다"
시온이 이 차원항행함에 호라이즌이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유명한 SF 호러 영화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주인공격으로 매트릭스의 모피어스 역을 맡은 배우가 밀러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호라이즌의 메인 인공지능도 성격은 몰라도 목소리만큼은 똑같다.
"보통 배 같은데는 여자 이름 붙이지 않아요? 어디서 그런다고 들어본 것 같은데"
"선장인 제가 여자인데 여자 이름 붙여서 뭐합니까. 흐음, 가끔 레즈 보빔 섹스도 안하는건 아닙니다만"
"엑?!"
"뭘 그렇게 보시는겁니까? 물론 우리 남편이랑 하는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저씨도 여자로 환생했을 때가 있었다고......."
"이 배에도 이미 그 시절 몸뚱이를 보관 중입니다"
아무리 초월적인 기술력이라도 인간의 육체인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최악의 몸이라도 언젠가는 필멸, 그렇기에 죽음을 맞이해서 수백, 수천년을 보관하면 결국 썩는다.
하지만 시온은 그 때 까지는 보관할 생각이다. 조금 이상한 취향이지만 마치 벽에 키 자란 것을 그어놓은 것 같은 느낌처럼 지나간 성장의 흔적을 보는것 같아서 그렇다.
".......아저씨가 그렇게 자랑하던데 어떻게 생겼어요?"
"보고싶습니까?"
"조금요"
시온이 손짓하자 구석에 있던 홀로그램 화면 하나가 커져서 그들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거기에는 호라이즌의 한 구역에 있는 액체가 가득 든 원통 시설 안에 알몸으로 둥둥 떠 있는 여성의 모습이 있었다.
통 안은 밝아서 안에 있는 여성의 몸 구석구석까지 다 보인다. 하지만 외모보다도 더 압도적으로 눈에 들어오는건 흉부에 달려있는 흉기였다.
"아저씨는 왜 머리를 세개나 달고 다녀요?! 무슨 케르베로스예요?!"
"울 남편 찌찌 지구 최고 찌찌!!!"
"저런 수준이면 자랑할만은 하지만 어께 작살나겠는데요!!!"
예진이도 포스 유저라서 나름 몸매가 좋기에 어디가서 가슴이 작다고 할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하나 전생의 여성인 최악의 가슴을 보자 패배 선언이 나올만큼 압도적인 크기 차이를 실감했다.
축구공 대신 떼어다가 드리블을 해도 될 레벨이다. 괜히 최악이 여자인 자기는 쭉쭉빵빵하다고 자랑하는게 아니였다.
가슴에 비해 외모는 순수 동양인은 아닌 약간 서구적인 느낌이 있는 흑발인데, 특출난 외모는 아니지만 눈매가 스모키 화장을 한듯한 나름 매력있는 미인이였다.
"아저씨는 요리 잘했고......청소도 잘하고 성격도 화만 안내면 좋고. 거의 무슨 현모양처네요"
"저도 가끔 그런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 가슴에서 나오는 모성애가 어떨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치 이 세상 모두를 자식으로 품을 수 있는 그런 모성애가 느껴지는 법입니다"
".......아주머니, 아저씨 여자 몸 왜 보관하신건지 솔직하게 말해봐요"
"울 남편 찌찌 지구 최고 찌찌!!!"
"차라리 묵비권을 행사해요!!!"
단순히 가슴이 괴물같이 큰 사람이라면 지구를 뒤져도 얼마든지 나온다. 최악보다도 더 커서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수준인 사람도 분명 있다.
하지만 시온이 지구 최고 찌찌라고 찬양하는건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 큰 크기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결코 형태는 무너지지 않으며 탄력마저도 완벽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물론이고 같은 여자 조차도 보면 한번만 만져봐도 될까요? 하고 물어볼 정도의 마성의 가슴이였다!!!!
"어차피 죽은 것도 사인이 쇼크사라서 몸뚱이가 멀쩡했습니다. 울 남편은 죽을 때는 대부분 곱게 늙어서 죽던가 아니면 존나게 싸우다가 이기고 죽던가 둘 중 하나였는데 상대가 나빠서 진데다 몸뚱이도 멀쩡합니다"
"좋은거예요 나쁜거예요?"
"아무튼 몸은 멀쩡해서 잘하면 나중에 쓸 수 있으니 문제 없습니다"
"아주머니는 좋은거라고 생각하시는거 같은데!!!"
시온은 다시금 홀로그램을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위쪽에 있던 뉴스 채널을 끌고와 확대했다.
뉴스에서는 최악에 대한 청문회가 열릴 것이 확정되었고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뒤로 잡혀 있었다.
"7일이면 짧네요"
"7일은 충분히 긴 시간입니다. 막 102보충대에 입대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이라면 3일조차도 3주만큼 긴 시간이 될 수 있는데 그 두배보다 긴 시간 아닙니까? 물론 그 뒤의 한달간의 훈련소가 더 길긴 하지만......"
"아앗, 군필 유부녀......"
PTSD마냥 시온의 기억 속에서 전생의 기억이 모락모락 솟는다.
최악이 남자로 태어났지만 환생을 거듭해 남녀간의 성별 구분이 없다면 시온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환생 후에 여성이 되어서 거의 여성의 성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남자의 군대 시절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온은 군대 다시 가느니 2년 동안 덕질을 포기할 정도로 단호하고 진지하다.
"아무튼 일주일 뒤에 그이가 청문회 하는거 보고 화성으로 갈지 안갈지 결정할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에서 안보낼것 같지 않아요? 한국에서 깽판친 것도 아닌데다가 아저씨가 깽판치면 망할거 아니까 적당히 구슬려서 협조해달라고 할것 같은데"
"물론 정치인이라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조금 다른 비유지만 여포와 제갈공명을 함께 영입할 수 있는 기회와 같다.
인성 문제만 빼면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여포, 반박할 사람이 없는 제갈공명.......물론 시온은 전략 전술이 특기가 아니라 기술 개발이 특기지만 아무튼.
두명을 영입한다면 천하도 노려볼법한 수준이다. 지금은 천하가 아니라 지구 제국으로 만들 수 있을 수준이다.
"으음......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탈지구 해야할것 같은 소식이 있습니다"
"뭔데요?"
"이걸 보십시오"
거기에는 일본 자국 내에서도 철저한 통제를 통해서 찍히지 않았고 찍은 사람도 없었던 후쿠시마 발전소 폭발 당시의 모습을 고화질 홀로그램으로 나오고 있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입니다"
"폭발했다고 듣긴 했는데 이 정도 폭발은 아니였는데요?!"
"9년 전에 그거 아닙니다. 그저께 일어난 일입니다"
"어.......?"
예진이도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사건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인데다가 발전소 자체가 통째로 날아갈 정도의 파괴력인데 그나마 겉으로 보기엔 문제없던 예전과 같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방사능의 무서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정말 고농도의 방사능이 아니면 즉사하지 않는데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은 마치 독과 같았다.
"계산해보기로 현재 후쿠시마의 폭발 사건으로 인해서 방사능은 빠르게 일본 전역으로 퍼질겁니다. 다만 당장 즉사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몇달만에 갑상선암 발병자가 수배에 달할 정도로 증가할 것이며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도 폭증할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 일본 국민의 수명이 못해도 3,40년은 줄어들겁니다. 전 국토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서 뭘 마시고 먹어도 피폭될 것이며 그건 단지 일본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방사능이 퍼져 나갈겁니다"
"........전 세계요?"
"물론 일본 정도는 아니겠지만 가까운 한국이라도 국민 평균 수명이 10년은 줄어들겁니다"
"..........."
문득 예진이는 시온이 러시아에 대여해주었던 제염 장비를 떠올렸다.
대여 기간이 얼마가 되었던 일단 시온에게는 제염 기술 자체가 있다. 그러면 일본에서 일어난 이번 사태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 제염 장비를 빌려주면요? 그러면 안되는거예요?"
"저게 저희 때문입니까?"
"어......그래도 할 수 있잖아요. 아주머니는 엄청 쩌는 기술도 가지고 있고. 저러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볼거 아니예요?"
"저도 저런걸 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납니다"
시온은 어릴 적에. 아니, 어릴적이라고 해봐야 몇백살이였던 때지만 아무튼 그때 처음 접촉하는 문명을 만나 그들에게 기술을 전해주었다.
지금과 같은 제염 기술을 비롯해 그 외 여러가지 오버테크놀러지 기술들.......고효율 태양열 발전, 반중력 기술, 상온 핵융합 기술 등등. 입이 떡 벌어질만한 기술들을 전부 전해주었다.
하지만 노력 없이 얻어낸 기술에는 신념 따위는 없고 문명과 정신마저 썩어버리는 것이다.
"저는 그때 이후로 어느 정도 수준에 맞는 기술이 아니면 풀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한두세대 발전한 수준의 기술이라면 몰라도 명백하게 수준이 차이나는 기술을 풀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만약 제가 저걸 도와주었다가 사람들이 '방사능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번에도 해결해줄거야!'하고 생각하면서 핵폭탄이나 핵폐기물을 막 다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그렇기도 하겠네요"
방사능은 핵폭탄을 사용하는데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하면 결국 상처뿐인 승리밖에 남지 않게 되는 무기다.
하지만 방사능만 어떻게든 해결된다면 그것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다. 만약 냉전 시대에 제염 기술이 있었다면 방사능 따위 정화하면 그만이지! 하고 마구 쏴대다가 인류는 진작에 멸망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저건 그들 스스로의 오만과 외면의 대가입니다. 그들은 저것 때문에 수천년에 걸쳐서 후회하고 고통받으며 결국에는 다시금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할겁니다. 인류 문명은 그렇게 반성하고 발전하는 겁니다"
".............."
그건 시온이 겪어온 인생관이자 인류 문명에 대한 방관적 태도를 취하는 이유였다.
자그마치 수천년을 살아오면서 결정한 것이기에 예진이가 설득한다고 한들 쉽사리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동물도 불에 데여봐야 불이 뜨겁다는걸 알게됩니다. 이로서 인류는 핵에 대한 무서움을 깨닫게 될겁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냅두십시오"
".......화성 가는데 사람 많이 필요하죠? 친구들이랑 걔네 가족들 불러와도 될까요?"
"새로운 이주민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예진이는 백리와 비슷했지만 예진이 쪽이 더 현실주의자였다.
그녀는 빠르게 더 나은 현실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