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중국 최후의 날]
차를 타고 내가 끌려간 곳은 생각보다 좋은 시설이 있는 곳이였다. 그 왜 어디 유치장에라도 던져넣나 싶었는데 의외로 사람이 살법한 그런 곳이다.
다만 내부의 시설이 튼튼해서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할것 같았다. 그래봤자 나한테는 의미 없지만.
"이야, 콘크리트로 떡칠하고 철창도 두터운 티타늄 함금에 유리벽도 특수 강화 유리네. 어지간한 포스 유저는 나갈 생각 못하겠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포스 유저만 하더라도 수십명이고. 이 정도면 아저씨가 갇혀도 나가기 힘든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특별히 만든 포스 유저 전용 특수 감옥이니까. 꽤 예산을 들여서 만든걸로 알고 있다"
"근데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높으신 분들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안에는 거의 넓은 원룸 수준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밥만 꼬박꼬박 잘 넣어주면 히키코모리는 문제없이 살 것 같은 느낌의 적당한 공간이다.
"앞으로 자세한 일정이 정해질 때까지는 거기서 지내게. 거기에 있는건 불안해 하는 국민들로부터 안심시키는 역할도 되면서 정부의 신뢰도를 높이는 일이니까"
"재판 날짜는 언제쯤 잡힐까?"
"흐음.......며칠 내로 정해지겠지만 아마 재판보다는 재판 같은 형식의 청문회가 될 소지가 높네. 적어도 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야"
"알만하네"
아마 상당수의 높으신 분들은 현실 자각 못하는 놈들이 있을거다. 내가 잡힌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이 말이다.
내가 잡혀준건 어디까지나 이경진 아저씨랑 약속 때문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도 다 죽여버리고 끝냈을 것이다.
"일단은 쉬게. 아마 지인들의 면회는 못오겠지만........정치 관련 문제로 다른 사람들은 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시설 내의 전화로 따로 연락이 올걸세"
"걱정해줘서 땡큐. 나도 어지간하면 중국처럼 지랄하지 않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
살인자를 넘어 학살자를 눈 앞에 둔 정직한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그게 지인이라고 한다면.
나름 그의 마음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해와 협조의 별개의 문제다.
"여긴 따로 인터넷은 안되나봐?"
"애초에 전파도 차단하고 있으니까. 내부에 비치된 전화기 외에는 연락할 수 없네. 그나마도 한정된 곳으로면 연락이 가능한거지. 군용 전화기 비슷한거니까"
"그럼 시간 때울겸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어야지"
"........여기서는 전파를 차단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게 통할거 같아? 울 마누라가 나한테 주려고 따로 개조한 핸드폰인데?"
".........."
지금 와서 압수하기는 늦었다. 그러니 당분간 나는 핸드폰이나 가지고 놀면서 쉬기로 했다.
충전기도 없는데 충전은 어떻게 하냐고?
내가 아무리 문과라도 여태까지 시온한테 주워들은게 있지 학교에서도 과학 시간에 기본적으로 배우는게 전류와 전압인데? 방에 전기만 통하면 대충 끌어다가 충전할 수 있다. 미세하게 조절해야 해서 좀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충전기 없이 충전이 된다는 소리다.
중국에서 얼굴을 까발린 뒤로 전화기에서 불이 나는것 같아서 일부러 꺼두었지만 슬슬 켜보았다.
부재중 전화가 수백통이나 와 있었다. 이야, 내가 이렇게 인망 높은 사람인줄 꿈에도 몰랐는데.
"형식이한테서 온 것도 있고, 형식이네 아저씨 것도 있고, 상철이, 종수.......뭐야,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누구지"
나는 인간관계가 좁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귈 수 있는데도 그냥 내버리고 믿을만한 몇명만 사귀는 쪽이다. 친구 많아봤자 개중에 정말로 불알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괜히 그러다가 귀찮은 일 생기느니 그냥 몇명만 사귀고 만다.
온 부재중 전화만 수백통, 문자는 그 이상, 카톡도 그 비슷하게 와 있었다. 죄다 안부를 비롯한 여러가지 의문들을 물어보고 있는데.......뭐여, 초등학교 시절에 같은반이던 애들까지 왜 아는척 질이지?
이 나라가 학연, 혈연, 지연의 나라라고 하지만 기억도 잘 안나는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수준의 인연은 좀 아니지 않냐. 나는 그 시절에도 그런대로 조용한 성격이라 이야기 안한 애들은 그렇게 지냈는데 말이야.
우선 나는 형식이에게는 전화를 하기로 했다. 친구인데다 백리도 까발려진만큼 상황이 혼란스러운만큼 이야기가 필요할것 같아서였다.
내가 전화를 거니까 통화음 하나 이어지지 않고 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야!!!]
"아오! 씨! 깜짝이야! 귀청떨어지겠다! 시끄러워 얌마!"
[너 임마 뭔 짓을 한거야!!!!]
내 친구들은 내가 라쿤맨이라는 것도 몰랐고 애초에 특별하다고 생각해본적 없는 그냥 평범한 녀석들이다.
마치 평범하거나 착했던 옆집 아저씨가 사실은 연쇄살인범이였습니다, 하는 이야기하고 조금은 통하는 면이 있기에 형식이가 느낀 충격은 나름 이해가 갔다.
"뭐긴, 할만한 짓을 했지"
[너 임마, 나한테까지 그런거 비밀로 하고. 백리 이 녀석은 가게 문 닫아서 일단 어떻게든 운영해보려고 해도 기자들이 너무 몰려서 지금 상황 장난 아냐! 아오 진짜! 그렇게 쌔면 좀 적당히 하던가 왜 그런짓을 해서는!!!!]
"형식이 많이 컸네. 내 걱정도 다 해주고"
[아무튼 지금 상황 장난 아냐. 지금 너 잡혔다고 뉴스 나오기는 하는데, 고문당하고 그러는건 아니지?]
"내가 고문당했을 수준이면 중국에서 그러지도 않았거든?"
[하긴, 그러네. 어디 잡혀서 고문당했을 정도면 애초에 거기서 죽었겠지.......]
"근데 괜찮아? 이거 도청 당할지 모르고 나중에 어디 국정원에서 마티즈 타고 코렁탕 먹이러 올지도 모르는데"
[시발! 국정원이 뭐 어때서! 올거면 오라고 해! 아빠도 지금 니 걱정 하고 있어! 상철이랑 종수도 통화 해봤는데 똑같이 걱정하고 있고........아무튼 전화 한통씩 돌려. 상황 여의치 않으면 문자라도 슬쩍 남기고]
"핸드폰은 쓸 수 있으니까 전화 할께. 그나저나 난데없이 휴가 받아서 좋겠다 짜샤? 치킨집은 무사하지?"
[아까 말했잖아. 기자들 몰려서 장난 아니라고. 백리도 지금 라쿤맨 2호로 소문 났던데.......아, 그러면 너네 제수씨는 라쿤걸인거지? 그치? 이 새끼 어쩐지 제수씨가 존나 예쁘더라니!!!!]
"형수님"
[뭐 이 새끼야. 제수씨라고 부를거야]
"형수님"
[싫어]
"형수님"
[아무튼 지금 뉴스 뜬거 보면 청문회가 열릴거래. 국민들 앞에서 너에 대한거 샅샅이 파해치고 그 뒤에 재판을 연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그러면 청문회에서라도 잘 보여야 판결도 좋게 날테니까 성격 좀 죽여. 알겠지?]
"형수님"
[아오! 이 중립국 같은 새끼! 알았어! 알았다고! 형수님이라고 할께! 됐지? 아무튼 잘 해!!!! 재판 잘 받아야 어떻게든 살지!!!!]
"너 내가 대한민국 멸망 못시킬줄 알고 그러는거 아니지?"
[.............]
지구에 이능력이 생긴지는 겨우 20년. 초월자 한명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짐작하는 사람은 있어도 실감하는 사람은 없다.
대충 아무 차원 들어가서 무림이 있는 곳의 초절정 고수 한명의 수준이 어떤지를 물어본다 하더라도 문명의 수준 차이는 무림이 뒤떨어지지만 그런 쪽의 수준은 오히려 무림이 위인 법이다.
"형식아, 형식아, 지금 와서 너한테 말하는거지만. 나는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가끔 너 애늙은이 같은건 대충 알고 있었어]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이 고조선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다 길다면 믿을래?"
[........고이다 못해 썩은 수준인데 그거]
"그래서 존나 쌘거야. 동네 태권도장 가서 배우고 5000년만 지나도 리뉴얼 태권도를 창안하다 못해 최강을 찍을 지경인데 난 오죽하겠니?"
[그러고 보니 너 예전에 너보고 패드립 치던 일찐 새끼들 있었는데........]
"응, 그 새끼들 내가 조졌어. 오토바이 타다가 급브레이크 밟게 해서 그대로 식물인간에 반신불수 만들어줬지"
[이 새끼........]
"뭐, 만약 그때 내가 보조 안해줬으면 그 새끼들 전부 뒤졌어. 헬멧도 안쓰고 달리는데 사고 나서 안죽은데 다행이지 짜샤"
[솔직히 그놈들은 그 짓 당해서 싼 놈들이긴 했어]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그래도 사람 막 죽이는건 좀 아니지]
"사람 목숨은 세상마다 다르단다"
[여긴 귀중한 법이야]
형식이도 나름의 철학은 있는것 같았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면 나도 그랑 친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사귄 친구들은 나름의 성격이나 인성, 취향이 맞기 때문에 친구가 되었다. 이 상황이 되어도 절교할만한 녀석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형식아, 나는 존나 강해. 얼마나 강하냐면. 지금 당장 감옥에 갇힌 이 상황에서도 이 별 전체의 모든 생명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수준이야"
[........마치 '이 버튼을 누르면 누구누구가 죽습니다'같은 버튼이네]
"그냥 이 문명 수준으로는 도라에몽이라고 생각해. 아, 물론 도라에몽에 가까운건 내가 아니라 우리 마누라지만"
[그러고 보니 어디서 형수님이 외계인이라고 하던데. 그건 솔직히 구라지?]
"진짜임. 엠창 찍고"
[너 엄마 없잖아]
"아니, 이 새끼가 다짜고짜 친청 패드립을 치네. 감옥에서 탈옥하고 너 조지러 가주랴?"
[야, 솔직히 그건 무섭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그래]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야. 내가 수천년의 시간을 보내고 사귄 친구인 만큼 특출나진 않아도 나름의 기준은 있는 법이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글쎄........."
일단 한국 정부가 하는데까진 가볼 생각이다. 선 넘고 지랄을 한다면 다 찢여죽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법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다 죽여버리고 아포칼립스 세상을 걷는 것보단 그 편이 더 재미있잖아?
내가 종종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좋아한다 말해도 그건 약간의 생존자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 내가 하면 남김없이 싹다 뒤진다고.
"근데 백리는 어때?"
나는 슬쩍 백리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 * * *
백리가 라쿤맨 2호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 되었다.
애초에 최악이 라쿤맨이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는 그 주변인을 조사하면 얻을 수 있는 별거 아닌 정보에 불과하다. 한때 TV방송에도 나온 치킨집은 그 덕분에 불타오르며 손님들도 붐볐다. 단지 장사를 안할 뿐이지만.
이 상황에 최악을 대신해 사장이 된 백리라고 장사를 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저 집안에서 조용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있을 수 밖에.
"울 오빠가 다시금 니트 백수가 되다니. 쩌는구만(오시노 시노부 풍)!!!!"
"너무 좋아하는거 아니야?!"
"난 며칠 뒤에 있을 수능에 오빠 여동생이란 이유로 이 관심을 받고 나가야 한단 말이야!!!! 그 사이에 진정될리 없는 사건이니까 분명히 소란스러울거야! 소란스러울거라고!!!!!"
"못난 오빠라서 존나 미안하다아아아아아!!!!"
"미안하면 용돈줘! 용돈 달라고!!! 가게 어차피 영업 못하니 팔아서 용돈줘!!!!"
"나도 받은건데 파는건 좀......."
"아니?! 이럴때 난데없는 정직함이?! 땅 값 올랐으면 파는게 정상인데! 으아아아아아!!!!!!!"
루리의 수능은 대충 4일 정도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태가 진정 되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세상에 라쿤맨, 최악의 존재가 알려지고 잡혀가면서 백리의 정체도 슬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눈치 챘는데 가족이라고 눈치 못챌리 없다.
하필이면 라쿤맨과 2호가 싸울 당시 알리바이를 증명 못하고 쉰답시고 자리를 비운 백리의 정체를 숨기기에는 사람들을 너무 바보 취급하는 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바보가 아닌 사람들 중에 백리의 부모님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백리야, 잠깐 여기 좀 앉아봐라"
"........."
"갸아아아악!!! 오빠가 지빠귀-보관함3-독수리-기타등등2-개똥지빠귀-까치-개쩌는거 모음 파일 들켰을 때의 반응이다!!!!"
"아니?! 너는 왜 그걸 다 알고 있어? 파일 아이콘 숨겨놓으면서 존나 복잡하게 숨겨놨는데!!!!"
"아, 나도 가끔 오빠 야동 보고 딸침"
"너 여자잖아!!!!"
"여자는 뭐 자위 안하는줄 알아?! 오빠 거유 취향 다 알거든? 솔직히 존나 꼴리더라!!!"
"야아아아아아아아!!!!"
".........너희들 성 취향은 뭐라 안할테니 잠깐 좀 앉아보렴"
"난 도망가야지!!!!"
"루리도 앉고"
"푸헹!!!"
부모의 영향에서 도망갈 수 있는 자식이 없을리 없다. 그럴 수 있을 때는 오직 부모가 죽을 때 뿐이다.
두사람의 부모인 하정욱과 그의 아내인 김유정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백리는 정좌 상태로 앉아서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앉아 있을 뿐이다.
"이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
".........루리 넌 예전부터 이상한 애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떻게 내가 알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화 대사를 알고 있는거니?"
"음.........대충?"
"루리도 평범한 애는 아니라고 형한테 들었어요"
"아!!! 오빠 배신 때리기 있기 없기야!!!! 존나 비겁하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는........"
백리와 루리의 아버지, 하정욱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부모로서 자식이 특출난 것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슬퍼해야할지 의문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쪽이라면 기뻐해야 맞지만 아니라면 슬퍼해야 맞다.
"일단 설명을 해보렴"
하정욱은 백리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그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백리는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오로지 진실 뿐이다.
천천히, 백리는 중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형이......."
백리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였다. 하정욱과 김유정이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 시작했다.
짧지만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