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중국 최후의 날]
태극이란 공간이나 시간처럼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최상위 개념 중 하나다. 하나였던 혼돈을 둘로 나누어 음양(陰陽)을 만들어내고 거기서 또 천,지,인을 뜻하는 삼재(三才)가 만들어졌다.
그 뒤로 순차적으로 사방(四方), 오행(五行), 육합(六合), 칠성(七星), 팔괘(八卦), 구궁(九宮)까지 만들어져서 세상이 탄생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 외에도 다른 개념은 많으며 태극 하나만 존재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태극의 이치는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원이 다른 묘리를 담고 있었다.
파스스스스스!!!
바닥을 굴러다니던 돌맹이가 단숨에 부서져서 모래가 되었다. 거기에 금속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파장은 조용하지만 위협적이게 주변 사물들을 부수기 시작했고 점차 그 여파를 키우고 있었다.
"태극나선경의 경지도 높군. 거의 나랑 비슷한 수준인가.......!"
"난 재능이 없지만 경험과 시간은 많거든. 그러면 대충 어지간한 경지는 이르는 법이지!"
단순히 태극과 태극의 충돌만이 아니였다. 그 와중에서 간간히 오가는 검과 권각의 공방은 치열하기 그지없어서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건 별거 아닌 수준이다.
그냥 스치는 것만으로도 방어하지 않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걸 넘어서 분해되어 이 세상에 피 한방울 흔적을 남기지 않고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용하연은 검 끝을 비틀었다. 회전하면서 나선을 그리는 검기는 최악의 명치를 노려 찔러들어갔다.
하지만 최악은 피하지 않고 대검을 손등으로 받아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타이밍을 맞추어 검면에 대고 그대로 밀어서 최소한의 힘으로 흘려냈다.
"너무 조급해 하는거 아니냐? 어차피 나한테 유효타는 못먹여"
그녀는 혀를 차면서 물러났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였는데 그마저도 비껴냈다.
단순한 스펙 이전에 기술과 반응이 너무 빠르다. 몇번의 기습에도 조금의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덤덤하게 받아치는걸 보면 눈 앞이 아득해진다.
마치 그녀가 기억하는 그녀의 스승인 그레이를 보는듯한 느낌이였다.
"난 뭐 최흉의 대마왕이란 명함은 어둠의 듀얼로 얻은건 아니거든? 전생 기억 다 까먹고 애매하게 살던 사람하고 수천년동안 뭐 빠지게 고생해서 있는 재능 없는 재능 다 털어가면서 올라온 사람하고 같으면 그건 좀 너무하잖아?"
다른 요소를 뺀다면, 최악이라는 개인의 재능은 길 가던 사람들 중에서도 볼 수 있을법한 흔하고 보통에 가까운 재능이였다.
단지 수많은 환생과 시간,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싸워 살아남고 결국에는 승리해서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본기부터 남다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저게 전력을 낸 것도 아니라니 상대하는 시점에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까 당신이 한 말이 맞아. 재능 있는 놈들은 많았는데 그것만 믿다가 나댄 놈들은 내가 다 죽였거든. 살아남는게 중요한거지.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고"
근데 최악은 환생자라 죽어도 살아난다.
밸런스 패치를 요청해야 할 판인데 운영자 중에서 한명이 그의 편을 들어준다. 아니, 사실은 두명이다.
"그래서? 이제 끝났어? 다 끝났으면 대충 마무리 하고 난 다시 중국 쳐부술 생각인데?"
"그럼 이거 하나만 받아보시지?"
키이이잉!!!
그녀의 대검에 가이아 포스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걸 넘어서 결정을 이룰 정도의 짙은 농도의 가이아 포스는 넘실거리면서 남는 힘이 바깥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새어 나오는 힘은 그것만으로도 땅을 울리고 모래를 진동시켰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듯 검의 떨림에 그 일대의 지반이 같이 공명하면서 걷던 사람도 휘청일 정도로 떨렸다.
"오, 필살기?"
"지금 몸으로 쓸 수 있는 기술 중에서는 말이다"
"그런 기술 피하면 예의가 아니겠지. 필살기는 맞아줘야 매너지 아무렴"
병신같은 논리였지만 덕분에 용하연도 한결 편해졌으니 따지지 않기로 했다.
최악은 그녀의 앞에 당당하게 서서 손을 까딱거리며 도발했다.
"어디한번 날려봐!"
양손으로 쥐고 힘차게 휘두르는 대검은 가이아 포스를 매개로 공간을 공명시켜서 공간을 베어내는 참격을 날린다.
그 크기는 단숨에 고층 빌딩조차 반으로 쪼갤만큼 압도적인 크기!! 크기 뿐만이 아니라 위력과 힘의 밀도도 크기에 걸맞을 정도다!
힘을 남기지 않고 지금 쓸 수 있는 일격을 전부 담은 그녀의 필살기는 최악의 몸뚱이에 수천배에 달해서 해일에 맞서는 인간과 같았다.
"파천마룡섬(破天魔龍殲)!!!"
콰콰콰콰콰콰!!!
직접 닿지 않아도 그 여파는 그들이 있는 창평구의 절반을 갈아버릴 정도다. 만약 그대로 날아간다면 대륙을 동서로 갈라 나누어 러시아에게 분단국가의 슬픔을 느끼게 만들어줄 수준이였다!
"이건 좀 힘 쓸만 하겠네!!!!"
최악은 날아오는 파천마룡섬을 향해 물러나지 않고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폼 안살게 피할 생각은 없고 중국이 날아가는건 상관없어도 몽골이나 러시아까지 저게 날아가는건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최악은 여기서 받아쳐서 상쇄시킬 생각이다.
살의충천(殺意衝天).
살기만천(殺氣滿天).
살신합천(殺身合天).
살의를 끌어올려 살기로 재련하고, 살기를 전신에 풀어 하나로 만들어서 오로지 죽이겠다는 뜻을 품는다.
그리고 그 의지를 정제하여 압축하고 주먹에 담는다. 짙은 살기는 실체가 없는 것에도 닿기에 설령 신이라 하더라도 죽일 수 있다.
"파호시월(破湖弑月)!!!"
쩌어어어엉!!!
허공에서 공간과 살기가 충돌하면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사방으로 스파크가 튀면서 일대의 지반이 무너진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반경 십수킬로미터의 지반이 폭삭 내려앉아 마치 싱크홀이 생긴듯한 여파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싱크홀 주변의 지반도 불안정하게 뒤흔들어 피난 준비를 하고 있던 인근 주민들도 날벼락을 맞는다.
"크윽?!"
"날 이기고 싶으면 공명검보다는 유색공명기를 배워왔어야지! 유색공명기랑 공명검이랑 파괴력은 비슷해도 유색공명기 쪽이 위인게 뭐 때문인데!!!"
천검 이경진이 쓰는 유색공명기와 용하연이 사용하는 공간참, 즉 공명검은 효율만 따지만 솔직히 후자가 위다.
적은 소모로 비슷한 위력의 기술을 몇번이고 날릴 수 있는데 반해서 유색공명기는 얼마 쓰지 못하기 때문에 효율만 따지만 압도적으로 공명검이 우위에 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비슷한 수준일 때의 이야기다.
자기보다 경지가 높은 초월자라면 얼마든지 공간 간섭을 통해서 공격에 혼란을 줄 수 있다. 경지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잠깐의 차이가 승패를 가루는 초월자들의 대결 사이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된다.
"어딜 수천년전 무공으로 날 이기려고 들어? 그동안 기술이랑 무공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콰콰콰콰!!!
최악의 파호시월은 용하연의 파천마룡섬을 착실하게 깍아내고 있었다. 마치 굴삭기처럼 조금은 느릴지 몰라도 큼직하게.
두사람이 격돌은 길면서도 짧게 마무리가 될것 같았다.
별 다른 변수만 없다면.
"그럼 대충 마무.......응?"
무너지는 지반의 흙먼지를 가르면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쥔 묵직한 워해머를 최악의 뒤통수를 노려 휘둘렀다.
통짜 금속으로 이루어지고 끝에 달린 머리 부분만 하더라도 성인 남성의 머리통 서너개는 합친것 같은 외견이기에 그걸 양손으로 쥐어 휘두른다면 사람 죽이고도 거스름돈이 10인분은 남을 만큼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콰아아앙!!!!!
격렬한 충격이 최악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리고 이어서 용하연의 파천마룡섬이 그를 뒤덮었다.
* * * *
용하연은 한동안 뭐가 어떻게 된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둘이서 싸우다가 제 3자가 난입해서 최악을 기습했다. 최악 본인은 그 기습을 감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몰랐다. 눈 앞의 강적 하나만 두더라도 심열을 기울여서 상대해야 하는 판인데 자기를 노리는 것도 아닌 습격자를 알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전력으로 날린 기술의 여파 때문에 기감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 더욱 그렇다.
"너는......."
"간만에 뵙습니다. 권룡여제"
"......터키의 마스터 유저인 [살라딘]이군. 이게 무슨 짓이지?"
"수세에 밀린것 같아서 약간 도와드렸습니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런 짓을 한거냐"
"저는 중국 정부의 공식 요청에 따라 파견된겁니다"
그의 이름은 파티흐 에르도안. 터키의 마스터 유저이자 [살라딘]이란 이명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유럽계와 아랍계가 섞인 듯한 잘생긴 외모. 나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이경진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인다. 들고 있는 묵직한 워해머는 상대가 누구던 맞으면 골로보낼 수 있을만큼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벌써 수천만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저 녀석을 그대로 둘 생각은 없습니다. 딱 좋을 때 기습을 할 타이밍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우......"
용하연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래서 초월자에 뭣도 모르는 놈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멋모르고 난입한 살라딘도 살라딘이지만, 중국 정부의 행동도 그렇다. 차라리 방해나 하지 말았으면 최악도 스트레스 해소를 해서 못해도 대화의 장이라도 마련했을텐데......!!
"난 모르는 일이다"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중국 정부가 뭘 하던, 저놈이 뭘 하던 간에 손 떼겠다는 소리다. 나는 놈한테 한방 먹이러 온거지 죽이려고 하진 않았단 말이다. 애초에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고"
"뭐가 다른겁니까? 그리고 어차피 죽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야"
우득, 하고 두사람의 목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를 걷어내면서 마스크에 금 간 곳 하나 없이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는 색이 들어간 아이가드 부분으로도 알 수 있는 분노의 눈으로 살라딘을 노려보았다.
진득한 살기가, 사방을 가득채운다.
사람은 공포 앞에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살기는 그런 인간의 생존본능을 건드려 몸을 위축시키거나 상대를 죽인다. 하지만 그건 의기상인(意氣傷人)을 넘어선 심즉살(心卽殺)의 경지다.
초월자의 살기도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위다.
대면하는 순간 공포에 의한 쇼크사로 죽거나 살기에 짓눌려 심장 근육까지 위축되어 심장마비로 죽을 뿐. 물론 살라딘은 후자였다.
하지만 애매하게 정신력을 갖추고 있어 쇼크사로 죽지도 않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이 굳었지만 심장이 멈추지는 않았다.
과연 그걸 행운이라고 해야할까, 불행이라고 해야할까.
"간만에 흥 좀 돋나 했더니 어떤 개자식이 초를 쳐?"
용하연과의 전투로 풀렸던 스트레스가 다시금, 아니 몇배로 돌아와 다시 쌓였다.
전부 잘해도 마무리가 어설프면 못쓰는 법이다. 사람이 결과가 전부는 아니지만 결과를 똥통에 처박아 잘게 으깨는 정도로 망쳤는데 과정이 빛날리가 없다.
차라리 정면에서 상대했어야 했다.
최악은 인간의 나쁜 면모도 알고 있는만큼 선한 면모도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부족해도 최선을 다해서 싸우는 인간찬가적인 면모를 좋아하기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조금은 화가 풀렸을지도 모른다.
성적이 나빠도 태도가 좋고 성실한 학생은 선생님도 좋고 봐주지만, 성적도 나쁘고 태도도 불량한 학생을 좋게봐줄 선생님은 없었다.
"방금 그걸 맞고도 어떻게 멀쩡한거야.......!"
"썩은 개똥만도 못한 새끼가 뭘 자기 상식으로 날 판단하고 있어? 어디서 함부로 깝치냐 너?"
살라딘은 아무것도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름높은 위인의 이름을 이명으로 받은것도 그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초월자와 필멸자 사이의 간극은 인간의 평생으로 뛰어넘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네가 살라딘인지 후시딘인지 뭔지하는 놈이였구나? 근데 난 기습이나 하는 놈을 존중해줄 생각 없는데"
"그게 뭐......"
"그리고 내가 분명히 경고 했던걸 못들은 모양이지?"
최악은 분명히 지금과 같은 학살을 시작하기 전에 지구 전역의 모든 생명체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지금부터 중국 조질거니까 관계없는 놈들은 아가리 싸물고 있어라' 라고했을텐데?"
"그, 그건......."
"반대로 말하면 '끼어드는 놈은 중국이랑 관련있는 놈이니까 같이 조져주세요'라는 뜻이겠지?"
"어? 어어어?"
최악은 허공을 걷어찼다. 허공이 갈라지면서 파편이 휘날리며, 그 너머에는 어딘가의 상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에서 오로지 살라딘만 잘 알고 있는 도심의 모습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상시 대기하면서 지키는 도시의 모습은 수십년을 지켜왔으니 모를리가 없었다.
어디에 어느 건물이 있는지. 어디에 시장이 있는지도 알고 있는데 알아보지 못하면 눈이 보이지 않는거나 다름없다.
"자아"
최악이 주먹을 쥐었다.
그의 주먹에 강렬한 의지의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가이아 포스는 아니지만 마스터 유저로서의 감각은 심상치 않다는 사실 정도는 깨달을 정도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 그만둬!"
"싫은데?"
갈라진 차원의 틈새로 무자비한 염동력의 폭격이 떨어졌다.
목표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