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중국 최후의 날]
백리가 하이뎬 구의 참상을 보고 생존자들을 돕고 있을 때 최악은 잠시 쉬고 있었다.
물론 힘들거나 피곤해서 그런건 아니였다. 초월자의 육체와 정신은 고작 도시 한두개 파괴하는 정도로 지칠리가 없었으니까.
단지 중국 정부에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군대가 집결하고 병력을 모아 지휘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걸 하게 두는것 뿐이다. 그래야지 공포가 무르익게된다.
그걸 기다리는 동안 손님이 찾아왔다. 어디선가 날아온 헬기에 격추시킬까 했지만 군용 헬기가 아니라서 넘기기로 했는데 임시로 설치한 로프를 통해서 타고 누군가가 내려왔다.
"......라쿤맨?"
"뭐야, 제이슨 요원 아뇨?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수?"
익숙한 얼굴이였다. 미국에서도 보았고 러시아에서도 본 얼굴이다. CIA 소속의 제이슨 브라이드였다.
그는 전과 다르게 훨씬 조심스런운 모습이다. 그도 그럴것이 주변에 시체가 드문드문 눈에 띄고 파괴된 도심의 잔해가 널린 곳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던 사람을 곱게 볼 수 있을리 없으니까.
표정을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최악의 눈에는 그의 공포가 엿보인다. 폭격도 아니고 혼자서 도시를 갈아버린 괴물을 상대로 겁을 먹지 않으면 그건 만용이거나 생각이 없거나 둘중 하나다.
"러시아 이후로 간만에 뵈는군요. 잘 지내셨냐고 물어보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만......."
"아무리 잘난 CIA 소속이라도 맨손으로 수천만을 쳐죽인 살인마하고 대화하려는 좀 쫄리지?"
"아니라고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보통 그런 말 하는건 다 그렇다는 뜻이더라고"
적대적이지는 않다. 그 모습에 제이슨 요원은 내심 안심했다.
최소한 단숨에 쳐죽임당할 일은 없을테니까. 애초에 그가 여기에 온 것도 최악이 적대하는건 어디까지나 중국이지 미국이 아닌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하실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중국이란 나라가 없어질 때까지"
"흐음......"
단순히 나라가 없어진다는 소리를 한다면 터무니 없고 허황된 망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벌써부터 베이징의 행정구역 두개를 파괴하고 인명피해만 수천만명을 일으킨데다 베이징에서 필리핀까지 이어지는 흔적을 남긴 괴물같은 남자의 말이다.
실현 가능한 시점에서 그건 경고와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타협점은 없습니까?"
"남의 마누라 납치해다가 마약까지 주사하고 강간하려고 들었는데 그걸 참으면 예수님이지. 미안한데 난 그분처럼 네 이웃을 사랑할 정도의 위인은 못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는 무고한 중국인들은 천안문에서 다 죽었는데?"
"크흠......"
"그 놈이 내 마누라에게 개수작을 한건 이 나라가 부패하고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됐기 때문이고. 그건 그들을 방관한 국민의 책임이 있는거다. 그러니 동조한 것과 다름없으니 전부 죽인 후에 나라를 박살낼거다"
"여러가지 피해가 생길겁니다. 단순히 중국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 같은게 말이죠"
"인간은 살아만 있으면 적응해서 살아가는 법이야. 중국이란 나라 하나 없다고 세계가 망했으면 진작에 망했겠지.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은 없는편이 좋을텐데?"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런 말은 대부분 그렇다는 뜻이라고 했었잖아"
"정말 그것 밖에 방법이 없는겁니까?"
최악은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없어. 나는 중국. 그러니까 이 중화인민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움직일거다. 이 나라의 국민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죽여버리고 재산은 불태우고 파괴할거다. 특히나 공산당 수뇌부들은 사지를 뽑고 비틀어서 내던지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 둔 후에 죽기 직전에 목을 쳐주겠지. 이건 아무도 못막아"
".......결국 타협점은 없는거군요"
"만약 드레이프 대통령이 중동쪽 애들의 테러 때문에 피살당하면 미국은 가만히 있을거냐? 아니지? 나한테는 그거랑 똑같은 일일 뿐이야. 나한테는 내 마누라가 최우선이다. 그러니 개수작부린 중국을 때려부술 뿐이지"
문득 제이슨 요원은 최악 자체가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도 군대도 없이 일개 개인이지만, 무력만큼은 그 어떤 나라도 비교되지 않는다.
탄도미사일 수준의 사정거리를 가진 괴물같은 무력의 소유자인데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을까. 이미 최강의 마스터 유저인 권룡여제도 일격에 필리핀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힘이다.
조용히 그는 중국인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적어도 그것 밖에 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부에는 설득에 실패했다고 보고할겁니다"
"까일 확률이 반반이구만. 애초에 보낸 쪽도 확신 하나 없이 보냈을테니까"
"애초에 저희가 제시할 수 있는 패가 없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못할 협상이였습니다"
그 무엇도 최악에게는 메리트가 되지 못한다. 시온을 건드린 이상 최악의 마음을 되돌릴 것은 조금도 없었다.
"한가지 좋은거 알려줄까? 지금 권룡여제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필리핀에서 정신을 차린 후에 다시 싸우기 위해서인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만.......따로 들으신겁니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구를 통째로 감지 범위 안에 넣을 수 있는데 고작 수천킬로미터 하나 감지 못할까봐? 보아하니 터키랑 한국에서도 손님이 오고 있는데"
"터키라면 [살라딘]일겁니다 그쪽에서는 마스터 유저가 파견될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터키 마스터 유저 이름이 참 살벌하네. 이름만큼 쌘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은 이경진 아저씨가 아니라 딴 사람이야. 게다가 개인적으로 오는것 같고"
"아는 분입니까?"
"2호"
"네?"
되묻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누군지 떠올랐다. 세상에는 라쿤맨 2호로 알려져 있으며 정보부에서도 마스터 유저로 거의 확실시 되는 인물이다.
아직 검증을 받지는 않았지만 권룡여제가 한국에 방문했을 당시 방송으로 인증했으니 쓸데없는 절차 수준이다.
".......그렇다면 마스터 유저만 셋이군요"
"마스터 유저는 두명이지"
"네? 하지만 살라딘, 권룡여제, 라쿤맨 2호까지 세명 아닙니까?"
"전에 러시아에서 했던 이야기. 기억해?"
"러시아에서라면.......아!!!"
제이슨 요원은 외교대사로서 러시아에 위장 잠입했을 때의 일을 기억했다. 당시 최악이랑 이야기 하면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마스터 유저를 넘어선 경지. 아직까지로는 도달할 사람이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권룡여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척이 남달라. 생각외로 고생 좀 하겠네"
"알겠습니다"
지금 중요한건 보고다. 앞으로 수십년 내로 오를 사람은 없을거라고 생각하던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포스 유저가 나타났으니 그에 대한 정보를 관측해야 한다.
중국 당국조차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최악은 그걸 알아차렸다. 도대체 그의 감지 능력의 범위가 얼마나 되는건지......
최악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3명이 동시에 오고 있기에 도착하는건 비슷한 시간대.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누가 먼저 도착하려나"
그렇다고 한들 변하는건 없을테니까.
* * * *
최악의 기대에 먼저 응한건 권룡여제, 아니 마룡후였다.
기억이 하나가 되었지만 아무리 환생을 했어도 자신의 최초의 삶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같은 환생자인 최악조차도 성격과 사상은 기본적으로 환생 1회차 때에서 변한 수준이지 크게 다르진 않다.
지금의 그녀라면 권룡여제 용화정보다는 마룡후 용하연이라 불러야 반응할 정도로 그쪽에 더욱 익숙해져 있었다.
"5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하지만 중간에 격추당할지도 몰라서......."
"이거면 괜찮다. 수고했다"
최악에게 접근하는 비행물체는 대부분 전투기 아니면 헬기였지만 개중에는 방송 촬영을 위한 헬기도 있다. 하지만 따로 구별해서 촬영을 위한 것은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군과 관계된 것만 철저하게 박살을 내고 있었다.
전차던 전투기던 뭐던 수리 하는것보다 차라리 새로 하나 구입하는게 나을 정도로 부쉈다. 덕분에 군대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막지 않으면 도시 하나를 파괴하는데 그 넓은 중국이라도 하루 이틀 정도 밖에 걸리지 않으며 국민들의 여론도 극렬하게 들고 일어난다.
아무리 중국이 일당독재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 여론까지 돌아서면 최악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이때를 노려 티벳과 대만 같은 곳은 독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리겠다. 너희는 돌아가라"
"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고 헬기의 문을 열고 그대로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이 정도로 가까히 왔다면 차라리 그녀가 직접 움직이는 편이 더 빠르기도 하다.
건물들은 무너져서 지반이 불안정하고 제대로 달리지도 못할것 같지만 그녀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파괴된 건물더미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최악을 만나게 되었다.
"눈빛이 많이 달라졌네? 옛날 생각나네. 지금은 용화정이 아니라 용하연이라 불러줘야 하나?"
"역시 나를 알고 있었군"
"거 어떻게 보면 남 이야기는 아니니까"
용화정, 아니 용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을 기억 못하던 때라면 몰라도 전생이 확실하게 떠올라 자아를 각성한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최악은 기술은 아류에 가깝지만 일부분은 그녀가 익숙한 무공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 사제와는 무슨 관계지?"
"그 사람 제자의 제자. 아, 정식 제자는 아니고 지나가다가 대충 몇수 얻어 배운 정도지"
"청출어람이군"
무림인이였던 마룡후 용하연에게는 사제가 두명 있었다. 한명은 천살제(天殺帝) 진영한, 다른 한명은 만병왕(萬兵王) 모용황이다.
당시 무림에서는 천하삼절이라 불리우며 존경과 경외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스승이 바로 그레이다.
"재능 없는데 그냥 나이랑 경험빨로 밀어붙인거야. 같은 시간이 주어졌으면 댁도 비슷하지 않을까"
"재능 있는 놈들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살아남는거지"
"마인드가 꽤 달라졌구만. 지금이 더 보기 좋은데?"
권룡여제일 때는 조금 고압적인 느낌이 있었다면 지금은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말투는 비슷하지만 태도나 분위기에서 다르다.
전에 싸울 때와는 가이아 포스량이 몇배는 가볍게 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포스를 전부 갈무리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포스 유저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흡사 무공의 경지인 반박귀진과 같았다.
"모용 사제는 어떻게 됐나?"
"지금 가슴 빵빵한 용족 출신 선녀 아가씨랑 결혼해서 신혼생활 보내고 있으니까 시간 있으면 만나봐"
"좋은 소식이군. 나 처럼 다 죽었을줄 알았는데"
"댁이 죽어있는 동안 남들은 뭐 노는줄 알아? 지금 당신 수준으로는 못이길껄?"
"하긴, 그럴만도 하지. 어차피 나도 지금 상태가 만전은 아니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했으나 무력은 별개의 문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몸은 무공보다 가이아 포스에 적합한 육체였다.
내공이 아니기 때문에 다루는데 익숙하지 않다. 더군다나 내공이랑 성질이 달라서 알고 있는 방식대로 운용해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때도 있다.
필리핀에서 베이징까지 오는 동안 어느 정도 파악은 끝냈지만 완벽하지 않다. 지금의 용하연은 오히려 전생보다 약한 상태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긴 어쩐일로 왔냐. 또 날 막으러 왔어?"
"뭐, 그건 됐다. 이제와서 나라 하나에 얽매일 생각 같은건 없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거다"
"그런 성격이였다고 듣긴 했는데 직접 보니까 기분이 묘한데.....그래서? 어쩌게?"
"당한게 있으면 갚아주는 성격이라서 말이다"
"그레이가 그렇게 가르치데?"
"......양심적으로 스승님은 들먹이지 말도록 하지"
"내가 니네 스승님한테 한번 뒤진적이 있어서 그 새끼 욕질은 할 권리가 있거든?"
"그렇게 말하는거 보니까 스승님도 잘 지내시나보군"
최악은 싸우기 전에 상대의 멘탈을 부수기 위해 '느그 스승 정신연령 10살짜리 거유 늑대 수인 꼬셔서 잘먹고 잘 살고 있음!'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분위기 망치는것 같아서 냅두기로 했다.
키이이잉!!!!
용하연의 손에 가이아 포스가 응집되고, 거기에 무공의 묘리가 더해져서 특성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공간이 울리면서 위협스럽게 진동이 퍼져나간다.
"싸우기로 했으니 그 얼굴에 칼자국 하나는 새겨줘야겠지!!!"
"내 스승인 천살제도 이제는 나한테는 못이기는데 같은 제자뻘 주제에 건방지네 개년아!!!!!"
카가가가가각!!!
한순간의 충돌로 두사람의 사이에 공간이 갈라졌다.
두명의 초월자가 격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