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라쿤맨 비기닝]
직원 휴게실에서 나온 나는 그대로 시설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간간히 사람을 마주치기는 하지만 내가 감기에 걸린듯 크게 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지나가자 그들도 인사를 하면서 넘어갔다.
생각외로 들킬 가능성이 낮아졌다. 아무래도 이 시설의 크기가 넓은만큼 일하는 사람도 많아서 대놓고 돌아다니지 않는 이상 낮선 사람도 수상쩍게 보지 않는것 같다.
대신 포스 유저는 금물. 기본적으로 포스 유저는 가이아 포스 때문에 오성이 뛰어나다. 물론 지혜와 지능은 다른 법이지만 연구소에서 일하는 직원 얼굴 기억하는 것 정도는 지혜가 아니라 지능 범주다.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나름 익숙하거나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있다는 감각 정도는 있을터. 함부로 나섰다가 얼굴 보이면 좆되는거 한순간이다.
"으음, 잠입 액션은 언제 들킬지 몰라서 쫄리는 맛으로 하는거지......"
[당신이 이동하는 범위대로 일단 미니맵을 갱신중이기는 합니다만. 마스크를 벗은 상태라서 바로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뭐, 여차하면 마스크 쓰면 되니까 괜찮아"
나는 지금 라쿤 마스크에서 따로 이어폰 부분만 떼어 한쪽 뒤에 달고 있는 상태다. 시온에게 송수신은 가능하지만 화면이나 영상 지원은 못본다.
하지만 이 상태라도 딱히 크게 지장은 없다. 우선 이대로 보안실을 가는게 급선무다.
"여기는 지하 3층인가......생각보다 깊진 않은데"
나는 슬쩍 돌아다니면서 각 시설을 뒤져보았다. 그러다가 벽면에 지하 3층이라고 적혀있는걸 발견했다.
하기사, 소각로로 들어와서 층을 이동하지 않았으니 대충 그쯤 됐을 것이다. 기껏해야 거기서 1,2층 정도의 오차가 생겼겠지.
얕은 층인거 보면 여기보다 더 아래에 중요시설이 있어 보인다. 아까 직원 휴게실도 있는거 보면 이 위로는 직원들 숙소나 휴게실 등의 편의시설이 주된 것 같다.
"여기서 더 내려가려면......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 쪽으로 내려가야 할것 같은데"
[엘리베이터를 탈겁니까?]
"중간에 누가 탈줄 알고? CCTV가 있어도 계단 쪽이 훨씬 나을거야"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중간에 보안을 맡는 포스 유저라도 탔다간 빼도박도 못한다. 특히나 이 시설에는 상당한 숫자의 포스 유저들이 있으며 개중에는 준 마스터 유저급이라고 할 수 있는 기척도 수십이나 있었다.
마스터 유저 수준은 아니더라도 5명 정도만 있으면 제이콥이나 윌 같은 평범한 마스터 유저들은 처리할 수 있을것 같다. 물론 단순히 포스량을 비교한 것이라서 변동 사항이 있다.
아무튼 이 정도 되는 포스 유저를 보유했는데 조용했다는 뜻은 이놈들이 비교적 최근에 이렇게 됐다는 소리다. 용주방이던 아틀라스던 이런 포스 유저를 양산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리 없지.
나는 계단을 찾아 내려갔다. 바쁜게 아니라면 계단을 쓰지 않는건지 주로 연구원들은 엘리베이터를 쓰기에 내 선택에 옳았다. 조우하는 사람 없이 한적한 계단을 내려가 지하 10층까지 다이렉트로 내려갔다.
여기 시설은 대충 15층 정도.....10층 쯤 된다면 어느정도 중요한 시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일단 한번 둘러본 뒤에 아니다 싶으면 더 내려가거나 하면 된다.
계단의 방화문을 열고 들어다니까 흰색의 복도가 맞이한다. 마치 병원 같은 느낌의......이런 느낌 어디서 느껴봤는데.
복도를 거닐면서 돌아다니자 이윽고 여기가 어딘지 눈치 챘다.
"실험용 포스 유저 감금실......!"
한국 지부에서는 예진이가 갇혀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보니까 방의 갯수만 수십개이며 대부분의 방에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다.
특수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벽은 안의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하지 못하게 투명하게 다 들여다 보였으며 그걸 통해서 실험 경과도 편하게 관찰할 수 있게 만든듯 하다. 문 옆에는 따로 투약 시간 같은걸 표기한 표도 적혀 있는데 중국어에 전문용어라서 나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기이한 것은 점차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실험체들이 인간 형태에서 멀어진다. 마치 예전에 보았던 한국의 실험체 출신 포스 유저들처럼. 개중에는 댕댕이를 데려왔던 산에서 보았던 육괴 수준의 괴이한 것도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눈뜨고 못볼 광경이다. B급 호러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괴물들의 모습은 절로 혐오감을 자극한다.
[으,어어어.....]
한때 인간이였던 것이 신음성을 내뱉는다. 지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저 정도라면 짐승이라도 안락사가 나을 정도의 상태다.
이 연구소의 놈들은 전부 이걸 알면서도 입을 다문 놈들이다. 인간의 윤리를 버리고 존엄성을 무시한다.
인간이란 동물일지 몰라도 짐승이 아니다. 죄를 저질러도 반성할줄 알며 자기보다 약하고 부족한 자에게 연민과 동정을 품을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존재다.
[........괜찮습니까?]
"빨리 보안실이나 찾자"
위에는 연구원들 휴게실 겸 숙소. 아래에는 인체 실험실. 아무래도 보안실은 그 중간에 있을것 같다.
나는 다시금 계단을 통해서 올라갔다. 시온은 내 감정을 알아차렸는지 말을 걸지 않았다.
7층 쯤에 올라간 나는 거기서 드디어 보안실로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여기는 들어가는데는 따로 출입증이 필요했다. 나는 겉보기 용도로 목걸이 양식만 있지 실제 출입증은 없다. 저런식의 보안 설비는 중앙과 연결되어 있을테니 함부로 해킹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회는 온다. 슬쩍 주변에 볼일이 있는척 하면서 돌아다닌다. 잠깐 귀를 기울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것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 857번 실험체는 연구 상황이 어때?"
"나쁘진 않아. 적성종 코어를 정제해서 만든 혈청의 순도가 올라가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은 좋아. 자괴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것 같아"
"의외로 적성종 코어의 순도가 높을수록 혈청을 만드는데 긍정적인 효과가 나는건가? 하긴, 그들이 썼던 혈청도 옥타곤 코어니까....."
"마음같아서는 노나곤 코어를 사용하고 싶은데 그건 우리가 가지고 있으지 않으니까 힘들겠지"
"뭐, 기회가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연구원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이윽고 CCTV실로 향하는 기척이 있기에 다시금 돌아와 그 직원의 뒤를 밟았다.
그가 도어락에 출입증을 대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닫이기 직전의 문에 손을 집어넣어 문을 붙잡았다.
누군가 뒤이어 들어오는 모습에 한순간 나에게 시선이 쏠린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안녕?"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전자 도어락이라 자동적으로 문이 잠긴다.
보안실에는 CCTV를 비롯한 여러가지 설비들이 가득 있었다. 연구소 전체를 비추고 또한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한 설비도 여기서 운용할 수 있는듯 보인다.
전부 때려부술 생각 아니면 여기부터 장악하는게 정답이기는 하지만.....지금은 그런거 신경쓸 생각 없다.
"니들은 내 화풀이 상대좀 되어줘야겠다"
스티블 시갈이라도 들어봤니?
마침 요리사인 것도 얼추 닮았네.
* * * *
보안실 직원은 대충 열댓명 정도 되었고 포스 유저도 있었지만 죄다 반격할 시간도 없이 목이 꺽어 죽었다.
고통없이 보내는걸 다행으로 알아라. 심연에 처넣기에는 내가 거기 주인이 아니라서 맨날 넣을 수는 없다고.
옆자리 친구가 쓰는 전용 쓰레기통이 있으면 친분이 있으니까 가끔 써도 상관은 없는데 자기것처럼 쓰면 안되는 것 처럼 말이야.
[지금 그렇게 다 죽일 필요 있었습니까? 나중에 들키기라도 하면......]
"이미 보안실 점거 끝난 시점에서 볼장 다 봤어"
경보를 울리고 침입자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 보안실을 장악한 이상 내가 깽판을 부려도 그게 퍼지는데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여기에 모든 정보가 있지는 않아도 상당한 수준의 정보는 있을게 불보듯 뻔한 일. 내가 다음에 할 일은 빠르게 중앙 컴퓨터실을 찾아 해킹툴만 꽂아넣으면 끝나는 일이다.
나는 우선 눈에 띄는 USB 단자에 해킹 툴을 꽂아서 이곳 보안실의 설비들을 장악했다. 시온이 빠르게 정보들을 열람하고 분석하고 나에게 결과만 알려준다.
[흠, 일단 가장 먼저 이 시설 지도부터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여러가지 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필요한건 그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중앙 컴퓨터실만 알려줘. 거기부터 조지면 그만이니까"
[연구 데이터는 대부분 거기에 있을겁니다......그런데 명색의 보안실이니까 다른 시설에 대한 정보나 시설 내의 대화 기록 같은것도 있는데. 상당 부분이 삭제된 상태입니다]
"삭제됐다고?"
[반입된 실험 설비나 실험체에 대한 정보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알맹이만 삭제되어 있습니다. 복원해보려고 해도 애초에 저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하드웨어가 물리적으로 파괴당한듯 보입니다]
"흠......"
아무래도 프로메테우스가 내가 올걸 미리 알고 있으니 꼬리 잡힐 일을 잘라놓은 것 같다. 영자 컴퓨터가 있는 메인 실험실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가?
이래서야 더 추적할 수는 없지만......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법이다.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건 편협한 자신의 시야뿐.
아무리 데이터를 삭제해도 어딘가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연구소라서 모든 데이터를 삭제할 수는 없으니 남아 있는 데이터를 분석하다보면 얼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일단 중앙 컴퓨터실부터 조져볼께. 이제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 아마 오늘 중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야"
[오늘 밤은 어제 못한 것까지 합쳐서 광란의 섹스 파티입니까?]
"고작 둘인데 파티 까지는 아니지"
[기대하고 있......]
시온이 말하는 말 너머로 희미하게 벨 소리가 울린다.
그 벨 소리는 호텔의 초인종 소리였다. 누군가가 그녀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찾아왔다는 소리다.
"룸 서비스라도 시켰어?"
[......딱히 시킨건 없습니다만]
"그래?"
짜증나는 예감이 강해졌다. 선자불래 내자불선이라고. 대충 좋은 사람은 쉽게 찾아오지 않고, 찾아온 사람은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룸 서비스도 아닌데 아무런 연고 없는 우리들을 찾아온다고? 제일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어제 그 공안이 생각난다.
[잠깐 좀 보겠습니다]
"알았어"
나는 천천히 시온의 응답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 아틀라스 조지는 것도 급하지만 시온의 일이 더 중요하다.
누군가 나한테 내 팔 하나 자를래, 아니면 시온 손가락 하나 자를래? 하고 물으면 당당하게 웃으면서 양팔을 잘라줄 용의가 있다. 나에게 있어 그 정도로 시온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선권을 지닌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온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공안에서 찾아왔습니다]
".......그놈들이 왜? 좋은 의도는 아닌걸로 보이는데"
[오늘 아침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용의자는 포스 유저로 추정되는데 그것 때문에 인근 포스 유저들은 전부 용의대상에 올라서 저에 대해서도 약간의 심문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구라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포스 유저 범죄라면 인근 포스 유저는 모두 용의선상에 오르는게 당연하지만 겨우 하루만에 외국인 포스 유저인 시온을 찾아온다? 일부러 작정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어제 만났던 공안의 행동과 분명히 연관이 있다. 어디에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구린 냄새가 풍긴다.
[그래서 일단 조사를 위해 공안부에 출석해달라고 합니다. 짐 좀 챙긴다고 하고 잠깐 들어온 상태에서 연락하는건데 어떻게 합니까?]
"얼마나 걸린데?"
[길어도 오늘 중으로는 보내준다고 합니다. 포스 유저라서 형식상으로 하는거고, 외국인이라 크게 손댈 생각은 없는듯 합니다]
"그랬으면 참 좋겠네"
마음같아서는 좆까라 그러고 보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상대는 일반적인 경찰보다 권력이 강한 악명 높은 중국 공안들이다. 같은 중국인들도 공안들이라면 인생 쫑난다 생각하고 섣불리 연관되고 싶지 않아한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시비 걸렸을 때 공안에 가자고 하면 어지간한 진상들은 떨어져나간다는 말이 있겠는가?
시온도 중국에는 인맥이 별로 없는듯하니 뭔가 권력을 앞세워 해결하는 것도 못한다. 다른 인맥이야 차고 넘치지만 중국 땅에서 효과적으로 쓰일법한 인맥이라고 한다면 좀 아니다.
[그러면 일단은 다녀오겠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최악의 경우라도 제가 당하는 일은 결코 없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 모르니까 역장 걸어줄께. 핵폭탄이 떨어져도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을거야"
[가끔 태양 옆에서 일광욕도 하는데 핵폭탄이 대수입니까]
불길한 예감은 모락모락 올라오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다. 시온이 다치는게 아니라 무슨 일을 당하느냐가 문제지.
되도록이면 내 성격만 건들지 마라.
내가 진심으로 빡돌면 사람 한둘 죽는걸로 안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