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9화 〉[라쿤맨 비기닝] (186/507)



〈 189화 〉[라쿤맨 비기닝]

신문을 펼쳐드니 제일 첫면에 대문짝만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재벌 2세 살인 미수 사건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잘 끓인 커피랑 같이 신문을 읽고 있자니 속이 편안해진다. 마시는건 분명 뜨끈한 커피인데 왜 얼음 넣은 사이다 같은 시원한 느낌이 드는걸까.

김 변호사님이 일 처리는 잘 하는 모양이다. 대성 그룹 쪽에서도 변호사는 내세웠지만 그래봐야 받을 형량을 줄이는 것 정도고 징역을 피할 수 없다. 이미 세간에 알려진 이상 징역을 피한다면 기업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현대 사회가 좋은게 몇가지 있다면 인권이 보장받고 살인이 중범죄에 속한다는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길에서 누구 하나 죽여도 쓱 묻어버리고 끝나는 일을 요즘 세상에서는 사람 죽이려고 시도 했다는 것도 중범죄가 되니까.

포스 유저 범죄는 마찬가지로 중범죄에 특별법이 따로 있어서 형량이 가중된다. 결국 대성 그룹의 변호사들이 해야할 일은 징역 몇년 살지를 정하는 것 뿐이지 징역 자체를 피할 수 없다.


"만약 제가 전에  일이 없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겁니다"

"왜?"

"이미 지금 회장인 이진수 회장은 저에게 한번 크게 데인 사람입니다. 화상을 입은 사람은 불이 무서운 줄 아는 법이기에 애초부터 불 근처에도 다가가지 않습니다"


"흐음"


시온에게서 듣기를 전 대성 그룹 회장이 로열티 후려치려고 했다가 빡친 시온에게서 된통 당해 경질 당하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시온에게 당한게 있다면 함부로 덤비지 않겠지.

하기사,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못나도 자기 자식이면 편 들어줄테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치열한 법적 공방에 증거 인멸이나 증인 매수 같은 더러운 수작질이 일어나도 진작에 일어났을 것이다.

"언론에 이렇게 뿌려졌다면 숨길 수도 없겠지. 깜빵 가서 한동안 잘 살다 나오고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할거야. 보통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기업 회장 아들이면 치명적일테니까 복수는 잘 했네"

인생은 그냥 산다고 사는게 아니다. 나름의 목적 의식과 야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이다.


하지만 장래의 대부분의 가능성이 막혀버린 그는 더 이상 사업가로서 성장할  없다. 기껏해야 포스 유저로서 국가 소속으로 들어가서......아니, 전과자면 들어가는거 조금 빡세지 않을까. 결국 그쪽의 직업도 물건너 갔다.

인생 종치는거 한방이다. 그러니까 누가 임자 있는 남의 여자 노리래? 세상에는 참 등신같은 새끼들이 많아요.


"이야......대기업 회장 아들도 감옥가고 굉장하네요. 보통 이런거 보면 쉬쉬하다가 어영부영 넘어갈줄 알았는데"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 말은 아저씨한테도 통하는거 알아요?"

"누가 뭐래? 내도 나중에 벌 받긴 할거야. 대신 그걸 좀 미루는 것 뿐이지"


나도 언제까지고 우스꽝스런 라쿤 가면 쓰고 돌아다닐 거라고 생각 안한다. 분명 언젠가 파국을 맞이해 내가 가면을 벗던가 벗겨지던가 하겠지.


"아, 그리고 우리 내일 중국 갈거니까 그동안 집 잘보고 있으렴. 딱히 친구들 데려와도 상관은 없는데 우리 방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에이, 저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고요. 그리고 여고생이 뭐 때문에 두분 방에 들어가요?"

"나도 여고생인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거든?"


아마도 그 시절에는 지상최강의 여고생이였겠지. 특수 부대원 2명분의 전력이 아니라 어지간한 문명권의 행성 2개분의 전력을 넘어섰을거다.

"난 여고생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단다 예진아. 교실 쓰레기통에 생리대가 굴러다니는 시점에서 여고생도 남자랑 별반 다를바 없다고 생각해"


"........아저씨가 아니고 아주머니만 둘이네"

"여자 마음도 이해해주는 아저씨가 있는게 차라리 낫지 않니?"

보통 아버지와 딸 사이의 트러블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찾아온다.

무슨 데드스페이스도 아니고 합일을 이룰것도 아니니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성별에서 오는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차이가 반은 줄어드는 법이다.


"선물 사올건데 뭐 생각나는거 있어?"


"글쎄요. 중국은  모르겠는데. 그냥 아무거나 적당한거 사와주세요"


"기념품점에 있는거 봐서 괜찮은거 있으면 사올께. 솔직히 중국은 먹을거 보고 가는거라"

"중국 요리가 종류도 많고 맛있다고 하기는 하는데......"

"대신 어지간한 각오로는 가지마. 거기 더러워"


"사람이요?"

"아니, 전체적으로 더러워"

우리가 갈 곳은 그래봐야 주도인 북경이다. 마스터 유저인 권룡여제가 상시 대기하는 곳이니 치안이나 환경도 나름 깨끗할지 몰라도 중국은 땅 자체만으로도 더럽다.


물도 더러워서 괜히 차를 마시는 습관이 있는게 아니다. 황하가  황하강인데. 황자가 누를 황(黃)자다. 과장 좀 보태서 반이 진흙이야.

게다가 예전이면 몰라도 요즘은 공장 때문에 환경도 씹창나서 오래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 먹을게 많아도 기본적인게 안되어 있는데 갈 마음이 안들지......인도보단 낫지만.

"중국 다녀오면 일은 얼추 마무리 되니까 다음에는 가족끼리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 너랑 같이 해외 여행 가본적은 없으니까. 가보고 싶은 나라라도 있어?"


"음......미국이요"

"왠 미국?"

"자유의 여신상 한번 보고 싶어서요"

"그거 하나 보려고 미국 갈거야? 음......뭐, 나쁘진 않겠다"


결국 관광이란건 즐거우려고 가는거다. 별로 볼게 없어도 당사자가 즐거워하면 그만이다.

그래, 이번일 끝내면 예진이랑 같이 미국 여행이나 한번 가보자.


*  * *   *

8시. 칼기상!


"오징어 덮밥!"

"도대체 언제적 드립을 치고 있는겁니까?"


"나한테는 아직도 현역인데!"

그러니 오늘 아침밥은 오징어 덮밥이여!

오징어 덮밥 만들 생각으로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오징어가 없었다. 아, 맞다. 오징어 안사놨는데.

할  없이 나는 눈물을 훔치며 오징어 덮밥 대신에 제육 덮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래 아침에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별로 좋지 않지만 날씨도 쌀쌀한거 매운거 먹은 뒤에 열 날 때 외출하면 좋을것 같아서 그렇다.


사실 매운 요리보다 뭔가 든든하게 뜨끈한 국물 먹고 나가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아 몰라 오늘은 생각난김에 제육덮밥 먹을래.


"매콤하게요"

"매운거 좋아하니?"


"자고로 여고생의 피는 맵다고 할 정도로 매운거 잘 먹어요"

"하기사 요즘 애들 떡볶이 먹는거 보면 무섭더라. 째면 피 대신에 떡볶이 국물 나올것 같아"

"제 배는 가르면 순대가 나오고요?"

"그 순대가 내가 생각하는 순대가 아니겠지?"

".......? 그 순대 말고 뭐요?"


순대(의미심장).


여고생 입에서 나오는 순대하고 나 같은 사람 입에서 나오는 순대하고 의미가 틀릴 법이다. 솔직히 모르는 편이 낫다.

슬쩍 냉장고에 있던 고기랑 여러가지 양념을 꺼내서 버무리고......즉석해서 만드는거라 양념이 배어들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지만 솔직히 양념이 맛있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야채랑 같이 뚝딱 볶아서 만드니 단숨에 제육 덮밥 완성. 자고로 제육은 그냥 먹어도 좋지만 밥이랑 비벼먹으면 개꿀맛이다.


"캥!"

"댕댕이 너도 밥 먹고 싶다고? 사료나 먹어 얌마!"


"캥! 캥!"

"자기도 간식 달라고 시위하고 있는데요?"


"그걸 알아들어?"

"대충요. 댕댕아 사람 먹는건 안되니까 사료 먹자, 사료. 밥  먹으면 간식 줄께"

"아옳옳!!!"

예진이가 댕댕이랑 잠깐 놀아주었다. 장난감 같은걸로 말고 손으로 배를 긁어주면서 이리저리 쓰다듬어준다.

그러다가 예진이가 댕댕이의 앞발을 손으로 잡고 들어올려 이쪽으로 내밀어 보인다.

"초코초코 빔 발사!"


"뭐하니?"

"댕댕이 육구가 초코렛같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긴 하네"

새카만 색에 말랑말랑해 보이니까 그렇긴 하다. 개과는 대부분 육구를 가지고 있지만 일부 여우 종에는 육구가 없는데 댕댕이는 있는 쪽 종류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저 젤리 같은 육구 만지고 누워 있으면 어느새 자고 있더라. 마성의 젤리 같으니라고.....!


동물을 기르지 않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동물 발바닥의 육구는 어쩐지 조금 꿉꿉한 느낌의 냄새가 난다. 고약하다거나 그렇진 않지만 생각하는 그런 느낌은 아닌듯한.....직접 맡아봐야 알 수 있는 냄새다.

아무튼 아침밥 완성. 매콤한 냄새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제육 덮밥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마침 시온도 씻고 내려와서 아침 먹을 준비가 됐다.


"으음, 이거 먹으면  흘려서 다시 씻어야 할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씻으면 되는거지 뭐"

"짐 챙겨야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옷가지 같은건 다 챙겼잖아?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께"

이미 큼직한 캐리어로 하나 짐을 챙겨두었다. 전에 일본 갔을 때와 비슷하게 예정을 잡고 있으니 이 정도 짐은 필요할것 같다 싶어서 챙긴 것이다.

필요한게 있다면 거기서 사면 그만이다. 나도 시온도 나름 중국어는 할줄 아니까 가서 소통 문제로 큰일 날 일은 없다.

"근데  당신처럼 사투리까지는 못합니다. 디폴트가 표준어라"

"어차피 수도권 내에서 관광할건데 무슨"

중국은 괜히 프리 티벳! 하는 다민족 국가가 아니다. 수도권에서 좀만 더 넘어가면 사투리가 남발해서 표준어로 통하지 않는 지역도 있다. 애초에 땅덩이가 너무 크다.

괜히 욕심 부려서  많은 민족들을 포용하려고 드니까 그 사단이 나는거지만......솔직히 어지간한 지역 하나만 해도 작은 나라에 비견되는 수준인데 좀 나눠졌으면 좋겠다.


"대국이라 하기에는 속이 너무 좁고, 소국이라 하기에는 땅이 너무 크니 중국이라고 하겠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거 참 맞는 말이네"

아침을 먹고 시원하게 씻고, 짐을 챙겨서 슬슬 떠날 준비를 끝마친다.

중국에 가서 아틀라스 지부 조지고 권룡여제 만나고 돌아오면 끝이다. 이번이 거의 막바지란 생각이 드니까 새삼 즐겁다. 마치 전역 일주일 전에 진지 공사 나가는 말년병장 같은 느낌이다.

전역 일주일 전인데 말년 병장이  부대에 있냐고? 부조리로 찔린 놈은 휴가가 짤려서 있더라. 꽤나 등신 새끼였다.

"나 혼자 출국 하는 것도 아닌데  끌고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버스나 타고가자"

"공항버스 말하는겁니까?"

"응, 그거. 요 앞에 잠깐 나가면 정류장 있더라"

어차피 비행기 시간은 넉넉하게 잡고 일어난거라 시간은 충분했다. 원래 나나 시온이나 이런쪽 준비는 철저한 법이라서. 어지간해서는 물건 빼놓고 가는 일은 없다.


시온과 내가 다 챙긴 후에 신발을 신으며 집을 나설 무렵, 예진이와 댕댕이가 배웅하러 나와주었다.


"두분 다 잘 다녀오세요"


"오냐,  잘보고 있어. 댕댕이랑도  놀아주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아까 친구 데려와도 된다고는 했는데 루리는 되도 백리는 안된다?"


"......알았어요"

"왜 방금 반응이 한박자 늦었는지 말해보실까!"


"벼, 별로 아무 생각도 안했거든요?!"

"그 별 생각 아닌게 뭔지 한번 말해봐!"

"프라이버시 침해예요!"


"백리랑 관련된게 왜 프라이버시인데?!"

내가 말했지! 청춘남녀의 연애 사정에는 크게 손댈 생각은 없지만 미성년자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딸 가진 아버지들을 위한 샷건이 필요하다......존나게 큰 샷건이!!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예진이를 노려보다가 이윽고 집을 나섰다.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한두번도 아니고 잘 지낼겁니다"


"예진이가  지내는건 문제가 없지"


캐리어를 챙겨서 조금 걸어 공항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미 해외 여행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윽고 정차 시간이 되자 관광버스 같은 큼직한 공항 버스가 정류장 앞에 섰다. 사람들이 짐을 싣고 버스에 올라탄다. 근데 무료 운행도 아니고 돈 내더라. 어우 씨 공항 직행이라도 비싸.


"지하철을 탈껄 그랬나"

"걷는거 귀찮은데 됐습니다"


조용히 바깥 경치나 구경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날이 추워지면 밤이 더 길어지지만 그래도 시간이 시간인지라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기왕 가는거 신혼 분위기 내서 재미있게 즐기다 오자"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먼저 맞는게 낫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그냥 재미있게 놀면서 하는게 제일 좋다.

그냥 신혼여행 또 간다 생각하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일단 도착하면 제일 먼저 북경 오리부터 먹어보자. 그거 존맛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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