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라쿤맨 비기닝]
파티장의 입구 앞에서 단정한 복장을 차려입은 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근처에는 보안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는걸로 보아 우리나라 VIP들은 다 오는것 같은 느낌이다.
"초, 초대장을 확인하겠습니다"
입구의 직원이 우리들에게 말을 건냈다. 정확히는 시온을 보고 말을 더듬었다.
이런 호텔 직원의 대응으로는 말을 더듬는다는게 서비스직 종사자로 감점 항목이지만 화장은 안했어도 단장하고 꾸민 시온 앞에서 말 더듬는 정도로 끝난다는건 칭찬해주고 싶다.
"확인했습니다. 자리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에 안내에 따라 나는 시온을 에스코트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따로 행사를 위해 마련된 호텔의 넓은 홀이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성도 아닌데 천장에는 아름다운 샹들리에로 조명을 비추고 있었고 이미 먼저온 손님들이 웃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앙에서 조금 오른쪽에 있는 테이블에 안내받았다. 테이블에는 이미 시온의 이름이 따로 적혀진 종이가 걸려있는걸로 보아 사람마다 지정석이 있는 모양이다.
"저기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 코너도 있습니다"
"이런데서 밥이 넘어가겠어? 그래서 나도 점심은 많이 먹고 왔는데"
"뭐라도 먹고 있는 편이 말을 덜 걸지 않겠습니까?"
"아, 그것도 그러네"
파티장은 넓었지만 바로 식사를 할 수 있는 뷔페같은 형태는 아니였다. 약간의 핑거 푸드와 술 같은 것들을 마실 수 있게 해두었을 뿐이지 식사는 아마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따로 주문할 수 있을것 같다.
일단 뭐라도 마시고 있는 편이 나을것 같기에 시온이랑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 코너로 이동했다.
아직 대성 그룹 회장 일가는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선과 관심은 온전히 우리들에게 집중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온에게.
파티장 안에는 대부분이 나이가 좀 있어서 젊은 사람이라도 20대는 나를 포함해 몇명 정도 밖에 없고 30대가 가장 젊은 수준이였지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시온에게 시선이 몰린다.
자고로 아름다움이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흥미를 끄는 법이다. 더군다나 시온은 마치 인형같은 조형미가 은근 느껴지니까. 나쁘게 말해야 인간미가 없이 딱딱하다는거고 좋게 말하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완벽함이란 소리다.
나이 좀 있고 부부 동반으로 온것 같은 사람들은 그나마 자제하는걸로 보이지만 아직 미혼인 사람들은 말이라도 붙여보려는건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는게 보였다.
"임자 있는데도 저러고 싶을까"
"보통 사람은 미녀의 얼굴을 보지 왼손 약지를 보지 않습니다. 아마 머릿속에는 그냥 여친이라고 생각하고 골을 넣어볼 생각이 한가득일겁니다"
"내가 같은 남자라고 일반화 하기는 싫은데. 그래도 그건 인정한다"
성욕은 인간의 3대 욕구 중에 하나다. 그리고 미녀를 좋아하는건 그런 성욕의 발로이고. 여자도 미남 좋아하잖아. 눈 앞에 원빈 뺨치는 미남이 있으면 결혼 반지 끼고 있어도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은건 여자도 같지 않나?
결국 미남미녀에게 끌리는건 사람들의 본능이다. 하지만 그게 임자 있는 사람에게 하는거랑은 다른 이야기지.
아무리 간통죄가 없어졌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형사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지 민사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너 고소! 하면 충분히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UK 전자의 이승훈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을 물어봐도 될까요?"
"아, 저는 최시온이라고 합니다."
"오늘 같은 자리에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참석하실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분은......?"
"이쪽은 저희 남편입니다"
"최악이라고 합니다"
내 사람 보는 눈은 이래서 싫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면 악의를 가지고 있건 선의를 가지고 있건 일단 표면적인 것만 보고 나름 좋은 쪽만 볼 수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악의를 확실히 볼 수 있어서 외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왜 갑자기 이런말을 하냐면 남편이라고 하자마자 나에게 날아오는 시선에 적대감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너무 노골적인 악의라서 오히려 우습다.
남자의 질투만큼 꼴보기 싫은 것도 없는데 말이야......
"UK 전자면 UK 그룹의 계열사가 아닙니까. 그쪽 회장님하고 어떤 관계 되십니까?"
"......저희 회장님을 아십니까?"
"저도 나름 UK그룹이랑 긴밀한 관계입니다. 아마 회장님 정도 되시면 저에 대해서 알고 있을겁니다"
앗, 돌려말하기 나왔다.
방금 시온이 한 말의 뜻을 풀어보자면 '회장님 정도나 알고 있는 나인데 네가 나한테 접근할 군번이 되느냐'란 뜻이다. 이런 쪽의 돌려말하기는 워낙 난해하지만 그래도 주워들은게 있다보니 나름 이해는 간다.
그 말을 들은 그는 잠깐 안색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평상심을 되찾고 사람 좋게 웃었다.
"아, 그러시군요. 실례했습니다. 남편분과 즐거운 파티 보내십시오"
간보려고 했다가 뜨거워서 혀 데인 후에 달아나는 모습이였다. 하지만 오히려 혀가 데인 정도로 끝난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듯 보인다.
"UK그룹 지분도 있어?"
"어지간한 대기업 주식은 죄다 모아놨습니다. 콜렉터 기질 있는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대기업 주식을 도감 컴플리트 하듯이 모으지는 않지"
회장이랑 알고지낸다는 소리를 했으면 개미 주주 수준의 주식은 아닐거다. 도대체 주식으로 뭘 하고 다니는거야.
내가 자신 있는건 몸 쓰는거고, 시온이 자신있는건 머리 쓰는거다. 그 중에서도 계산쪽. 그렇기 때문에 시온이 뭘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단 한가지 단언할 수 있는게 있다면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거. 그렇기에 나는 시온이 뭘 하든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맡긴다.
시온이 만약 사람 죽일 일이 있다면 바로 그건 나의 일이다.
"크흠! 잠시 괜찮겠나?"
삶은 달걀을 납작하게 썰고 그 위에 새우를 얹은 요리를 우적이고 있을 때 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막 뚱뚱한건 아니지만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살들은 내면의 욕심을 자랑하는 모습이다. 눈에는 딱 봐도 알만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시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이 사람 어디서 봤는데. 내가 정치 관심 없어도 TV틀면 종종 나오는 사람이니까 자주 봤어. 여당 실세였던가?
근데 언제 봤다고 다짜고짜 하대질이야.
"김용진 의원님 아니십니까"
"오! 날 알고 있나?"
"이래저래 전해 들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아, 저는 최시온이라고 합니다"
시온의 이름을 들은 김용진 의원은 조금 생각하더니 이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누군가 했더니 시온 사장님이였군. 하지만 전해 들은 것과는 다른 모습인데 혹시......?"
"얼마 전에 포스 유저로 각성한 덕분에 일상 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아, 이쪽은 저희 남편입니다"
"최악이라고 합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 시온이 외모만 예쁜 사람이 아니라 그쪽에 나름의 인맥이 있다는걸 알자 함부로 건들 사람이 아니란걸 파악했기 때문이다.
저런 타입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 자기가 확실히 우위라고 생각되면 온갖 못볼꼴 당할걸. 그나마 우리가 있는 쪽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결혼 하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그야 올해 결혼해서 그렇습니다. 딱히 청첩장을 돌릴 상황도 아니였으니까 모르시는것도 당연합니다. 저희도 서류만 냈지 식은 따로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혹시 나중에 늦게라도 식을 올리실 생각이시면 저에게도 청첩장 한장 부탁드립니다, 허허허!"
딴에는 호쾌한 웃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봤자 속내가 다 보인다.
아마 뭐라도 주워먹으려고 들이대는거겠지. 애초에 이쪽이 적당히 초대된 사람이라면 이래저래 시비를 걸어서 시온을 노렸을 가능성이 99퍼센트다.
괜한 트러블을 피한거 보면 사람은 역시 있어야 대우를 받는다는게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다음 시온 사장님은 정계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이쪽과 친하게 지내시는 분들 중에 저 같은 사람은 없어서 말입니다"
"......정계에 의원님 같은 분은 드물지 않습니까?"
"하하!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뭔가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이 김모를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원님 이야기는 들어서 잘 알고 있으니 걱정마시길 바랍니다"
적당히 등을 긁어주고 입에 바른 이야기 좀 해주니까 그제서야 그는 만족하고 자리를 떠나갔다.
겉치례에 불과하지만 그가 말하는건 돈 좀 찔러주면 편의를 봐주겠다는 소리다. 하지만 정부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시온에게 있어서 그건 별로 메리트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흠이 되는건 역시나 세금이다. 탈세 명목으로 잡혀가면 한도끝도 없다.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시온은 인간이 아니다. 모든 세금을 전산적으로 처리해 해치우기 때문에 단 한푼도 오차가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세금으로 장난질 쳐서 억지로 잡아간다면.......그건 조작한거니까 내가 나서야 할 안건이겠지?
"저런 사람 별론데....."
"이래서 저도 이런 파티는 별로 안좋아합니다. 그냥 집에서 백리 학생이랑 루리 학생 불러서 바베큐 파티나 하는게 낫지"
"솔직히 그래. 이래서 오기 싫었다니까"
욕망에 솔직한게 나쁜건 아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더럽기 때문에 싫은거다.
욕심 조금만 버리면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데 사람은 자기 이기심만 챙기기 때문에 추악해진다.
나도 이기적이지 않냐고?
나는 시온만 있으면 만족한다. 아무것도 없이 시온만 있다면 전부 만족하는데 그거 하나 허락하지 못하는 개자식들이 너무나 많다.
"슬슬 보스몹이 나옵니다"
"보스몹? 아......"
대성 그룹 회장 일가가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파티장으로 들어오는 도중에도 그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악수를 하거나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며 자리에 앉는데도 매한시간이 걸릴 정도다.
회장 부부가 가장 먼저, 그리고 그 뒤에 자식들이 이어서 들어온다.
뒤에 들어오는 자식들 중에서 익숙한 얼굴에 눈에 띈다.
그놈도 마찬가지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화장해서 이미지가 달라졌다고 시온 옆에 있는 나를 몰라볼리는 없다. 단숨에 나와 그놈 둘 다 인상이 구겨진다.
"드디어 왔구나 씹새끼"
솔직히 남의 마누라한테 찝쩍거리는 NTR충에게는 씹새끼란 별명도 과분하단다.
* * * *
다짜고짜 나와 그놈이 마주하지는 않았다. 그놈도 나름의 자제심은 있는지 나를 보자마자 달려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꾸 그놈 그놈 하려니까 짜증나네. 이름이 뭐였더라......일단 이씨 성은 확실한데. 이름이 성수? 상수? 뭐였더라? 솔직히 기억할만한 가치도 없어서 뭔지 모른다.
회장 일가는 중앙에 가장 좋은 테이블에 앉았지만 그놈의 시선은 한결같이 시온에게 향해 있었다. 가끔 나를 향해서 적대감이 서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전부 무시했다.
"........이런 자리 데려와서 미안합니다"
"됐어. 어차피 이런데 너 혼자 보냈으면 내 맘이 더 편치 않았을거야"
"무슨 깽판을 쳐도 제가 실드 칠테니 걱정말고 깽판 부리십시오"
"그거 든든하네"
이래저리 생일인지 생신인지 식순이 지나갔다. 사회자가 나와서 떠들고 여러가지 공연도 있었지만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식사도 호텔 요리인데도 불구하고 별 관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충 입에 우겨넣어서 에너지 보충했다 생각했을 뿐이다.
이윽고 몇가지 식순이 끝나고 하객들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상당수는 시온에게, 상당수는 회장 일가에게 사람이 몰리지만 내 목적은 오로지 하나다. 놈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슬쩍 빠져나와 파티장 구석에 서 있으니 그놈이 다가왔다.
얼굴은 나름 잘 생겼는데 내가 보기에는 왜 그렇게 뺀질거려 보이냐.
"거 오랜만이다?"
"처음부터 반말입니까?"
"댁이랑 나랑 존댓말 하고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냐?"
"그럼 나도 말을 놓지"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싸우는 일은 어느 쪽도 편을 들어주기 애매하지만 이미 임자가 있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명백하게 잘못한 쪽은 상대방이고 시온이 관련된 이상 나는 참을 생각 따위는 없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읽어내렸다.
"이름 최악, 1998년생. 양친은 대공황 시절에 잃은 후에 시설에 맡겨져서 성장. 무난한 학창시절 이후 입대. 27사단 공병대대 근무 이후 전역하여 몇달 뒤 시온씨랑 결혼......뭐, 틀린거 있나?"
"뒷조사까지 했어?"
"남자 뒷조사 하는 취미는 없지만 이번에는 필요할것 같아서"
"이 새끼 완전 사이코네"
나도 남 뒷조사 안한다고는 못하는데, 그래도 남 마누라 탐나서 남편 쪽 뒷조사 하는 매니악한 취미는 없다. 솔직히 그 정도 되면 어디 정신적으로 이상한 놈 아니냐?
내 신상 터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거다. 시온이 이제 대놓고 사회 생활을 하는 이상 눈에 띄기 마련이고 누군가 마음 먹으면 신상 파악하는건 일도 아니니까.
"그래서 뭐, 결국에는 할 말이 있어서 온거지? 어떤 개소리인지는 들어줄테니까 지껄여봐"
그는 나를 보면서 비웃었다. 명백하게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을 보는 눈. 확실히, 이 지구에서는 사회적으로 나는 무엇하나 그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잘생기지도 않지, 양친이 어디 기업 회장이기는 커녕 두분 다 돌아가셨지, 돈도 시온이 아니면 없는거나 마찬가지지. 전부 후달린다.
사회적이 아니라 무력으로 따지만 그 가치를 한참 넘기기는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나는 포스 유저도 아니다.
"너한테 그녀 같은 사람은 어울리지 않아. 헤어져라"
"풉!!"
그의 말에 나는 이놈이 존나 한심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