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5화 〉[라쿤맨 비기닝] (182/507)



〈 185화 〉[라쿤맨 비기닝]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아니, 이러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아무튼 제일 귀찮은 날이 결국에는 찾아왔다.

"마치 입대하는 날 같구만"

"왜 하필 비유를 들어도 그런 비유입니까"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고 결국에는 닥쳐오는 시련이랑 똑같으니까"

"듣고보니 맞는 말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한국에서 태어나서 군대만 몇번을 갔는지......1화차 때는 사정이 있어서 훈련병 한달이랑 자대배치 한달 하다가 전역했는데 그 뒤로 한국에서 환생하면 군대도 자주 갔다.


........군대 이야기 꺼내려면 오래 걸릴테니까 말을 줄이자. 원래 군대 이야기 나오면 말이 길어지는게 대한민국 남자다.


나는 우리집 주소로 온 초대장을 꺼내 살펴보았다. 꽤나 삐까뻔쩍하게 금박을 입힌 초대장이다.

이런건 상당히 드문데......그나마 예전에 북한 도발 때 상황 터져서 장병들 고생했다고 휴가  해서 대통령이 준거 받았을 때나 봤다.

아, 참고로 닭대가리 말고 지금 대통령. 어딜 생활관 하나에 약과 몇개랑 멸치 과자 한봉지 주던 사람이랑 비교해?


그나마 그것도 금박은 커녕 색만 그런 편지였다. 실제로 금박 입힌 편지는 상당히 오랜만이다.


"돈이 썩어 남아도나"

"실제로 그러지 않습니까"

"으으으음"


"아무튼 얼른 씻고 옷부터 입으십시오. 당신 화장 하고 그러려면 시간 모자랍니다"


"아니! 너도 화장 안하면서 나는 왜?!"

"저야 화장 안해도 예쁘지만 당신은 화장을 해야 그나마 인상이 순해보이지 않습니까? 어디 조직의 넘버 투에서 그냥 인상 좀 나쁜 청년으로 바뀔 때입니다"

"반박을 할 수가 없네"


나는 워낙 인상이 나쁘니 그나마 좋아지려면 화장을 해야한다. 물론 나나 시온이나 둘 다 화장하는 법 쯤은 알고 있다. 시온도 워낙 남자처럼 굴어도 여자고 나도 남자라도 여자로 환생해 화장한 적이 있으니까.

"묵혀둔 화장품을  때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꺼내는거라 뚜껑에 먼지가 쌓여 있는게 흠이지만 말입니다"


"얼마나 짱박아둔거야"

일단 먼저 씻은 후에 화장대에 앉아서 시온이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잡아보았다.


"당신은 눈매만 어떻게 하면 평범한 인상이니까 눈만 집중적으로 하면 됩니다. 피부도 어디 흉터나 여드름 하나 없이 깨끗하니까 이럴때는 좋습니다"


"마음대로 해. 솔직히 나도 눈매 부분은 공감하니까"

여자일 때는 스모키 화장한 듯한 평범한 미인인데.....왜 남자일 때는 더러운 눈매가 되는걸까? 그거 참 의문이다.

화장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30분쯤. 여자가 화장하는거 생각하면 그리 오래걸린건 아니지만 나는 눈만 집중적으로 했는데도  정도였다.

"흠,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얗게 불태웠습니다......"

시온이 화장대 옆에 잇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영혼이 빠져나간듯 추욱 늘어졌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그럭저럭 말끔한 인상의 청년으로 보고 놀랐다. 시온의 화장 능력이 전보다 늘어난것 같다.

"너는 화장 안해?"

"저는 화장 안해도 예쁘......"


"알긴 아는데. 화장하면  예쁘잖아"

"더 예뻐서 문제입니다. 화장을 안해도 태양 레벨인데 화장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초신성 대폭발이지. 아주 그냥 파티의 주인공이 바뀌는게 눈에 선하다"

"저에게 있어서 화장은 최종병기입니다. 어지간한 일 없으면 안할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녀는  해도 예쁘다는데 소파 위에서 과자 부스러기 흘리면서 엉덩이나 벅벅 긁는 우리 마누라도 남이 봐도 예쁠판인데 화장을 하면 오죽할까.

이 모습 그대로라도 눈독 들이는 사람이 넘쳐날텐데 화장한 시온이라면 온갖 남자란 남자는 다 홀릴 수 있을거다.


"그래봤자 웃는 너보단 못하지만"

"그건 당신도 보기 힘든 천연기념물 아닙니까"


"거의 멸종 위기종이지"


시온은 종족 특성상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나조차도 아주 가끔이라고 부를 정도로 웃을 때가 있는데 그때만큼은 내가 만난  어떤 미녀들도 압살한다. 심지어 전부가 미남미녀인 절대자 클래스도 웃는 시온한테는 못따라올껄.

......콩깍지 씌인거 아니다.


"저는 옷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괜찮아. 어디 주름 진 곳도 없고. 옷도 잘 어울리고. 예쁘네"


"저는 문과적인 감상을 물어본겁니다"


"마치 들판 한 가운데서 피아난 회색빛 꽃을 보는 듯한 상반되면서도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모습이 정말 잘 어울려, 특히나 옷이랑 머리카락이 대조되어서 회색과 은발이 어울리기도 하니까 더 그러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

"그러면 됐습니다"

시온이 흡족한듯한 얼굴로 끄덕였다.

대충 준비는 끝나고, 초대장도 챙긴 후에 슬슬 집을 나서기로 했다. 토요일이라 오늘 쉬는 예진이가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 깜짝이야! 아저씨예요?"

"그럼 누군줄 알았어?"

"아니, 눈매가 평소랑 달라서 다른 사람인줄 알았어요. 혹시 화장하신거예요?"

"이미지 체인지 좀 해봤는데. 어때?"


"나쁘진 않은데 개성이 사라진 느낌 같아요. 으음......평소 모습이 익숙해서 그런가. 오히려 화장하기 전이 나은것 같기도 하고"

"친한 사람들끼리 있는 자리에 가는데는 평소가 낫겠지.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하긴 그러네요"


예진이의 무릎에 앉아서 자고 있던 댕댕이가 눈을 떠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이놈이 주인도 못알아보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꼴에 개과라고 마치 늑대가 우는것 같았다.

"으르릉!!"

"이놈의 새끼! 나야 나! 냄새로 알아볼 수 있잖아!"


내가 손을 내밀어주자 댕댕이가  손을 물었다. 어차피 댕댕이는 아직 새끼라서 물어도 크게 아프지 않다. 내 손을 물어뜯다가 이윽고 냄새가 익숙하다는걸 깨달았는지 손을 핥기 시작한다.

이미 그렇게 애교부려도 늦었다 너. 다녀와서 간식 안줄거야.


"저녁은 냉장고에 있는거 먹던가. 아니면 시켜먹던가 해.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아, 우리 없다고 백리 초대하면 안된다?"

"......아, 안하거든요?"


"왜 반응이 한발짝 늦었는지 설명해보실까?"

백리랑 예진이랑 풋풋한 호감이 솟아오르는것 같지만, 아직 연애 감정으로 발달할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청춘남녀의 사랑이란 감정은 지극히 변덕스러워서 언제 제대로 된 형태가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내일 당장 커플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몇년동안 썸만 탈 수도 있다. 뭐, 솔직히 어느쪽이던 상관없지만 예진이가 성인이 된 뒤의 이야기다.


백리랑 예진이가 서로 얼굴 붉히면서 뭔가 미묘한 낌새가 흐르면 그날로 백리 거시기 따는 날이다. 어어어딜 미성년자를!!!

성인이 된 뒤라면 원찬스. 패기롭게 아버님 따님을 주십쇼! 하고 온다면 주먹 한대로 용서해줄 수 있다.

"다녀올테니까 댕댕이랑 집 잘보고 있으렴"

"네, 걱정마세요"

"모르는 사람이 문 열어달라고 해서 열어주지 말고"

"요즘 초등학생도 그러지 않거든요?! 제가 무슨 어린애예요?!"

부모 눈에는 자식은 언제나 애들이란다.

아무튼 대충 준비는 끝났으니 외출 준비를 했다.

밖으로 나가자  앞에 람보르기니가 눈에 띈다. 아침에 걸어나가기 귀찮아서 차는 어제 미리 집 앞에 주차해뒀다.


시동을 걸자 경쾌한 엔진 소리가 느껴진다. 아직 해가 떠 있는데도 날씨가 쌀쌀한데 저녁이 되면 꽤나 추울것 같다. 일단 히터부터 틀자.

"춥진 않아? 원피스 한벌이면 감기 걸릴것 같은데"


"저야 체온이 높으니 괜찮습니다"


"하긴, 겨울에는 침대에서 우리 마누라 끌어안고 자는것 만큼 좋은 것도 없지"

"당신은 뭐 끌어안고 자는 버릇은 고쳐야 합니다. 불편한건 상관없는데 화장실  때 몰래 나오기 힘듭니다"

"거 환생 초창기부터 들인 버릇은 고치기 힘든거 알잖아. 냅둬. 그리고 외계인은 화장실 안간다며"

"......."

"반박할 말이 없으니 묵비권을 행사하다니. 치사하다"

뭐, 그런 부분이 귀엽기는 하지.

파티 때문에 성인 폼이라도 어쩐지 디폴트 폼이 겹쳐보여서 어린애 같이 볼을 부풀리는 시온의 모습이 생각난다. 예쁘긴 한데 귀엽다는 말이 뭔지 이해가 되는것 같다.


히터가 돌아서 적장히  내부가 뜨뜻해지자 그제서야 출발했다. 어차피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서 급하게 갈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일 파티를 호텔에서 여냐. 거  돈낭비 개쩌네"

"당신도 어디 왕정 국가 가보면 궁에서 생일 파티 하는거 보지 않았습니까? 그게  화려하면 화려했지 모자라진 않을겁니다"

"그러는 나라는 내가 좋은 눈으로 못보지. 아무리 왕정 국가라도 국민 세금으로 사치 팍팍 부리면 쓰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적당한 사치는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는 척도다. 그래서 사치를 완전히 하지 말라고는 안한다.

하지만 그걸 국민이 빈곤해질 정도로 세금을 걷어대면거 그 지랄을 하면 내가 아니더라도 자유의 대마왕인 누리가 '우린 노예가 되지 않는다! 우린 세상의 주인이  것이다!'하면서 길로틴 발명하고 흥미진진해질걸.

누리가 맘 먹으면 기득권층 외의 모든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참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가진 놈들은 여태까지 자기가 누구 돈으로 먹고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되고 그걸 깨달았다는게 너무 늦었다는걸 알아차린 뒤에는 성벽에 목이 걸린다.

여태까지 꽤 많이 봤기는 한데 그건 몇번을 봐도 재미있다니까.

"황금 같은 주말에 이런 파티에 참석해야 하다니"


"이런 파티가 뭐 어때서 그렇습니까?"


"위장이 얹힐것 같아"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합니다"

그나마 나는 낫겠지만 시온은 아니다. 돈도 외모도 받쳐주는데 관심이 쏠리지 않을리가 없지. 다가오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흑심이 있을거고 그런 시온을 두고 내가 떨어져 있을리는 없으니 옆에 붙어 있을거니까......솔직히 심적으로는 힘들다.

초월자라도 사회 생활은 어렵다. 마음에 안드는거 다 때려부쉈다면 진작에 지구는 내가 아작냈겠지만 그걸 존중하니까 지금 사회가 유지되는거다.

"여차하면 다 엎어버리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런 말 하는 것보다 네가 그런말 하는게 더 무서워"


내가 엎어버리면 사람이 죽을 뿐이지만, 시온이 그런 소리를 하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꼴을 보게된다. 붕괴된 사회에서 치안이 유지될거라고 생각해? 그럴리가.

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세상도 많이 봤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꼴은 어지간히 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슬슬 다 왔네"

아직 날이 그렇게 어두워지지 않았지만 높은 마천루마냥 솟아 있는 호텔에서는 조명이 반짝이고 입구부터 깔아놓은 레드 카펫이 눈에 띄었다.

이야.....왕족들이 그러는건 익숙해도 대기업 회장님도 레드 카펫 같은거 깔아두긴 하는구나. 난 또 연예인 시상식 할 때나 봤지.


주변에는 기자들이 몰려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기업 회장의 생일인 만큼 관심이 쏠리는 모양이다.

"언론 같은데 노출되도 괜찮아?"


"어차피 각오한 일입니다"

"알았어"


그대로 주행해서 레드 카펫 앞에 차를 세웠다. 제지는 없었다. 그냥 평범한 차라면 몰라도 딱 봐도 수십억은 호가하는 람보르기니인데 불청객이라기 보다는 초대받은 손님으로 보일게 확실하다.

시온은 바로 내리지 않았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이미 알고 있기에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려서 그녀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한순간 사진을 찍느라 바빠서 반짝이던 플래시들이 정적을 맞이했다.


"어......"

"........."

"우와......"


내가 내민 손을 잡아 에스코트를 받는 시온은 자연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주변의 시선과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운 은발을 뒤로 넘겼다.

이내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너도나도 열성적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터지는 플래시들은 보통 사람이였다면 코앞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번쩍였다. 한순간이지만 그 열기 때문에 주변 온도가 1,2도쯤 오른것 같은 느낌이다.


"주, 주차해 드리겠습니다"

"아, 여기"

나는 호텔 직원에게 차키를 건냈다. 추운데 고생이 많겠네. 스쳐도 평생 월급이 날아가는 우리 차를 주차해야 하다니.....아, 이런 경험 많을테니까 문제 없나?

시온이 내 손을 잡고 함께 레드 카펫을 걸어가자 시온이 움직이는대로 카메라의 앵글이 집중된다. 아름다운 은발과 대조되는 회색빛  드레스. 수수한 장식이지만 오히려  수수함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예쁜 마누라 둬서 좋다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습니까?"


시온은 기자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층 더 플래시 세례가 쏟아진다.


더 있다간 파티가 메인이 아니라 시온의 촬영회가 메인이 될것 같아 빠르게 호텔로 들어섰다.


"마치 악마가 가득한 던전 들어가는 느낌인데"

"대신 우리들은 둠가이입니다"

"아니, 거기서 둠가이가?!"


악마! 찢고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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