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4화 〉[라쿤맨 비기닝] (181/507)



〈 184화 〉[라쿤맨 비기닝]

의상점의 사장인 중년 여성이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떠신가요 사장님?"

"음, 괜찮네요. 앞으로 계속 입을거 생각하면 나쁘지 않고요"

"어딘가 불편한 느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바로 다듬어 드릴테니까요"


"이걸로 괜찮을것 같아요"


나는 완성된 정장을 보고 전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내 몸에 맞추어진 정작은 세련미가 있어서 얼굴이 이런 나조차도 상당히 좋은 인상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뒷모습만 보면 건실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이겠네. 얼굴 보면 어디 조직의 2인자로 보이겠지만. 크윽, 태생이 이런 외모라 시온에게 미안해진다. 잘생긴 유전자를 받아도 여기서 좀  잘생겨진 모습일 뿐이니까......


"전 어떻습니까?"


"오, 예쁜데"

"감상이 그거 하나뿐입니까?"

"긴 말은 겉치례지. 중요한건 본질이야"

"사모님은 어떤 옷이던 잘 어울리셔서 완성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그럴만도 하지. 패션의 얼굴은 완성이라는데 시온의 얼굴이면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도가 200퍼센트다. 알몸으로 다녀도 그렇......아니, 그건 내 앞에서만 그러니까 나만 아는거겠군.


회색의  드레스를 입은 우리 마누라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나 다름없었다. 아니, 회색이면 타천사에 가깝다. 내가 신은 싫어해도 천사는 나쁘지 않아. 인간 아닌 애들이랑 얼마나 알고 지냈는데?


멀리 갈 필요 없이 팬텀네 둘째 형수님만 봐도 전생에 천사였다. 정확히는 천족이고. 지금이에 엘프......아니, 에로프이긴 하지만. 크윽, 팬텀 새끼 밤마다 빨릴듯.

"당신 옷도 꽤 괜찮습니다. 어디 불편한데는 없습니까?"

"괜찮아. 여기 사장님 실력이 좋은건지 불편한 곳은 없는데?"

진짜다. 움직이는데 불편함도 없고 옷도 괜찮다. 시온도 마음에 드는 눈치인지 불편한 기색은 없어보였다. 하기사 애초에 여기는 시온이 예약한 가게니까 당연하겠지.

거울 앞에서 한바퀴 돌아 살펴보는 시온의 모습은 천진난만과 색기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아, 귀엽다. 역시 우리 마누라가 최고야.

"좋습니다 사장님. 계산은 약속한대로 지불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의 영향이 크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일은 할 수 있는건 이 사회의 현 실태를 드러낸다. 솔직히 편해서 좋긴 한데 그래도 영 꺼림찍해서.

시온이 좋다고 하니까 그래도 나도 좋다. 이제 남은건 파티 참석 뿐이다.

"차는......솔직히 두명이니까 람보르기니 끌고가도 되겠지"

"원래 그런 자리에 그런 차 끌고가는건 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뭐, 알겠습니다"

"졸부처럼 보이겠지만 솔직히 졸부 맞잖아"

좋게 말해야 자수성가했다고 하지만 시온은 겨우 2년만에 지금의 지위와 돈을 얻게 되었다. 졸부마냥 돈을 팡팡 쓰고 다니진 않더라도 겉보기에는 졸부나 다름없어도 반박할 꺼리가 없다. 가진 돈에 비해서 일한 시간이나 노력이나 나이가 많은건 아니니까.

아무리 못해도 한 10년 사업해서 부자가 됐으면 또 몰라. 솔직히 졸부라 불려도 딱히 뭐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저는 몰라도 당신을 욕하는 사람은 데스노트가  기록해둡니다"

"뭐야, 데스 로드한테 노트 받았어? 아니, 그건 어지간한 초월자도 죽을것 같은 노트인데"


"별건 아니고 나중에 보복할겁니다"


"거참 사소한거 가지고......"

"만약 누가 저보가 창녀라고 욕하면 어떻게 할겁니까?"


"사지를 뽑아서 내던진 후에 억지로 숨을 붙인 다음에 완전히 골로갈 때쯤 뚝배기를 깨부수지"

"그런겁니다"

내가  욕하는건 참아도 시온 욕하는건 참을 수 없듯이, 시온도 자기 욕하는건 참아도 내가 욕 듣는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그걸 어느정도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수준에서 보복하는 것 뿐이지.


내가 물리적으로 조지면 시온은 사회적으로 조진다. 당장 카드 하나, 핸드폰 하나 못쓰고 인터넷 회원가입 하나 못한다고 생각하면 살아 있어도 살아있는게 아닌게 될테니까.

"솔직히 사회적으로 죽이는건 유토피아가 잘하는데 말이야......"

"그놈 이야기는 꺼내지 마십시오"

"명색의 사촌 오빠잖아"


"그런 사이코패스 사촌 오빠 둔 적 없습니다"

"결혼식 할 때도 청첩장 하나 보내지 않을정도면 뭐....."

"초대도 안했는데 오는거 보면 불청객입니다"

"흐으으음"

솔직히 나도 사이코패스 외계인은 좀......유토피아도 처남이면서 같은 대마왕 아니였으면 상종 안했을 녀석이고.

"옷도 맞췄겠다 토요일날 가기만 하면 되겠네. 따로  뭐 준비해야 할건 없지?"


"딱히 없습니다"

"그럼 됐어. 집에 들어 가기 전에 밥이나 대충 먹고 들어가자"


직업이 없어서 매일매일이 한가롭기는 한데......솔직히 좋기는 개좋아! 시온이랑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편하기는 엄청 편하다.

나중에 어디 여행이라도 한달 잡고 다녀오면 재미있을것 같은데. 아니면 시온이 샀다는 섬에서 한동안 짱박혀서 둘이서만 꽁냥꽁냥 지낸다던지.


"겨우 그런걸로 만족하십니까. 기왕이면 크루즈 선이라도 하나 사서 전국 일주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크루즈 선이라. 그것도 괜찮네. 근데 그건 나중에 좀 더 시간 나면 하자. 어차피 이번 생에 시간은 많으니까"

"당신이 아직 20대라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100년은 맘 놓고  수 있습니다"

내 인간으로서의 수명은 대충 평균이 120살 정도다. 인간치고 무척 오래 살지만 어디까지나 평균이기에 그보다 덜 살 때도 있고 그거보다 많이 살 때도 있다. 이 지구는 별일 없으니 길면 140살까지도 살지 모르겠다.


......솔직히 그때쯤 가면 의무방어전이 두려워지는데. 정력은 괜찮은데 허리가! 허리가!


"점심은 뭐 먹을까? 난 아무거나 다 괜찮은데 땡기는거 있어?"


"음.....오늘따라 무거운건 별로입니다. 고기는 빼고 면 종류로 합시다"

"흐음, 면이라고 하면 종류가 많아지는데"


중국집 가면 짜장, 짬뽕도 있고, 파스타도 있고, 길 가다가 가게 몇개 넘어가면  요리 있는데가 하나쯤은 나온다.

슬슬 쌀쌀해지니까 냉면 같은 차가운걸 제외하고 따뜻한걸 찾는다면 어디 국물 있는 메뉴로 고르고......그러면 생각나는건 칼국수나 우동, 그리고 쌀국수 정도군.


"쌀국수, 음, 나쁘지 않습니다"

"요 앞에 쌀국수 체인점 있던데 거기나 가자"


"좋습니다"


뜨끈한 쌀국수 국물을 후루룩 들이키면 몸도 녹고 기분도 좋다. 추위를 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날씨에 냉면 먹는것보단 낫지 않은가?


근처에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내려서 가게에 들어섰다. 가게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몇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시온에게로 쏠린다. 정작 당사자인 시온은 신경쓰지 않고 키오스크에 나와있는 메뉴에 눈이 가 있다.


"뭐 먹을거야?"


"일단 쌀국수 곱빼기에다가 다른거 시킵시다"

"그럼 나도 곱빼기로 시키고......여기 닭봉이랑 딤섬이랑 하나씩 시키자"


가격이 꽤나 싸다. 체인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단품 하나에 5000원이 넘지 않는다. 가성비는 괜찮네. 체인점이니까 어지간해서는 맛도 나쁘진 않을테고.


주문을 하고 영수증을 받은 후에 두명이서 마주보고 앉을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시선 신경쓰이지 않아?"


"당신 여자로 환생했을 때 그런 시선 신경 씁니까?"


"솔직히 별로 신경 안쓰지"


오히려 시온쪽이 낫다. 시온은 외모를 보니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본듯한 경외감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여자로 환생하면 얼굴을 안보고 가슴이랑 엉덩이만 봐서......상당수의 시선이 음욕에 가득찬 남자의 시선이라서 가끔 꺼림찍하다.

나도 여자일 때는 야한거 좋아하지만 아무한테나 몸 대주는 사람은 아니라고.

"저기......"

그러다가 누군가 시온에게 다가왔다. 평소의 헌팅인가 싶었는데 남자 뿐만이 아니라 여자도 있는거 보면 커플......아니, 얼굴이 닮은거 보면 남매로 보인다.


참고로 여자 쪽이 더 나이가 있어 보이니 백리네와 반대로 누나와 남동생이겠는데. 그리고 남동생 쪽은 미성년이다.


"SNS에 나온 모델 맞으시죠?"

"모델?"

"이거요"


누나 쪽이 핸드폰에서 전에 시온이 광명 동굴 갔을 때 했던 모델워킹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제목은 [광명동굴 엘프 모델녀의 워킹] 같은걸로 되어 있다.


흐음, 엘프는 아닌데. 정확하게 말하면 외계인이고  엄밀하게 종족명을 물어보면 하논이지 엘프는 절대 아닌데.

고기 짱 좋아하는 우리 마누라가 어딜봐서 채식 선호하는 엘프라고 생각하는건지.....외모를 비유든 것이라고 해도 솔직히 어울리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모델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유부녀입니다"

"모델이 아니세요?"

"네, 그런거 귀찮아서 못합니다"


"싸인 받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소문이 잘못 퍼진 모양이다. 하기사 인터넷이란 특성상 정보가 정확하게 퍼지길 기대하는건 어려우니까.

시온이 모델워킹한 것도 처음부터 촬영했다면 분명 모델이 아니란걸 알 수 있었을테지만  부분은 짤린 모양이다.

"딱히 연예인은 아니지만 사진 찍는 정도라면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슬쩍 시온에게 물었다.

"초상권 괜찮아?"

"어차피 이 모습으로 다닐 때는 이제 그런거 신경 안쓰기로 했습니다"


시온이 핸드폰을 촬영모드로 돌려 앞으로 내미는 남매에게 한손으로 V자를 만들어보이며 나름 서비스 해주었다.


이런 예쁜 마누라 두면 이런게 문제라니까.....그나마 이런식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약간의 해프닝 정도로 좋게 넘어갈 수 있지만.

"감사합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남매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가게를 나갔다. 나름 예의범절이 바른 사람이다. 세상에 저만한 사람만 있다면 한결 좋은 세상이 될텐데 말이야.

그때, 우리가 주문했던 요리가 나왔다. 나가 일어나서 쟁반에 올려진 요리들을 받아오고 물도 함께 떠 왔다. 이런 가게는 값이 싼 대신에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인지 상당수의 서비스가 셀프다.


"맛있어 보입니다"


"나름 괜찮네"

모락모락, 쌀쌀한 날씨에 대비되는 뜨끈한 국물의 온기가 올라온다. 위에는 고명으로 얹어진 소고기와 숙주나물이 눈에 띈다. 다만 고수는 들어가지 않았다.

"고수는 취향이 갈려"


"저는 고수 안먹습니다"


"편식쟁이인 네가 고수를 먹을리 없지. 나도 비슷해"

내가 요식업 종사자라서 어지간한 혐오 식품도 그럭저럭 먹기는 하는데 못먹는 몇가지가 있다면 바로 고수다. 이상하게 환생을 해도 영혼 레벨로 체질에 안맞는건지 먹으면 비누맛이 나더라.


아무튼 국물을 한모금 들이키고 숙주나물과 면을 젓고 고명인 소고기와 함께 들어올려 후루룩 입안에 넣는다.


끊지 않고 이어지는대로 입안에 넣으니 쌀국수의 고소한 맛과 육수가 어우러지면서 맛이 배가 된다. 흠, 간이 약간 심심한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네.

"좋네"


"괜찮습니다"

막 어디 TV에서나 나올법한 유명한 요리나 비싼 요리도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다.


곱빼기라서 양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로 한그릇씩 해치우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면을 마시듯 먹었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날이 차서 뜨거운게 잘 넘어간다.


"닭봉 드시겠습니까?"

"두개는 내꺼다?"

"걱정마십시오"


우리가 주문한 닭봉은 한 접시에 4개가 있었다. 반반씩 나눠서 두개씩. 딤섬도 반으로 나눠서 먹는다.

딤섬은......뭐, 그럭저럭, 닭봉도 소스가 괜찮아서 그런지 나름 맛있다. 은근 땡기네. 하나  시킬걸 그랬나.

"중국에서  끝내면 뭐 하실겁니까?"


"중국 일? 뭐, 거기서 프로메테우스 녀석 실마리 잡으면 그대로 잡아다가 조지는거지 뭐.  다음에는......흠"

지구에서의 볼일이 끝난다면 다음은 적성종 관련 안건이다. 적성종을 보내는 차원 너머의 문명에게는 명백하게 침략 의사가 있으니 대마왕으로서 나서야 한다.


차원침략은 중죄 중에 중죄다. 지구로 치자면 나치보다 더 질이 나빠서 대마왕들도 만장일치로 문명 소거에 들어간다.

......시온은 내가  일을 하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시온은 내가 사람 죽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일을 끝내라고 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언제 끝날지 기약없는 일이고. 은퇴는 아직 멀었다.


"이번 일 대충 끝나면 여행이라도 가자고"


"크루즈 세계 여행 어떻습니까? 쪼잔하게 몇달이 아니라  단위로 다니는겁니다"

"아까 말했던거 담아두고 있었어? 그럼 그러자"


조용히, 나와 시온은 미래의 이야기를 설계해 두었다. 몇달 수준이 아니라 년 단위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크루즈 여행이라. 재미있겠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맛집도 들러보고 특산물도 사서 먹어보고 그러자.

"틀림없이  될거야"


".......당신이  말하면 전부 망할것 같은 불길함 예감이 듭니다"


왜! 체리의 모든지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주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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