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라쿤맨 비기닝]
다음 날 아침 개운하게 일어났다. 월요일은 월요병 걸리기 쉽다는데 솔직히 나는 이제 남에게 내세을 직업이 없.....아, (주)시온의 사장직이 있구나.
아무튼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직업은 없으니 월요병도 없다. 이건 백수도 같으려나. 이래서 사람은 직업이 있어야 하는데!
"일을 안하면 인간은 쓰레기가 되는게 느껴진다고......놀고 먹기만 하면 좀 그래"
"저는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캡틴이냐"
아침은 뭘로 먹을까 하다가 기름진건 들어가지 않을것 같아서 가볍게 먹기로 했다. 활기찬 아침을 보내기 위해서는 아침을 먹는게 좋고 그 중에서도 소화가 잘 되고 단 것이 좋다.
냉장고를 살펴보다가 뭘 만드는게 좋을까 고민했다. 솔직히 우리집 냉장고는 풍족해서 오히려 더 고민이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우유팩이 눈에 띄었다. 아, 타락죽이나 끓여볼까.
고구마도 좀 남은게 있고. 그러면 고구마 타락죽을 끓이는 것도 나을것 같다. 쌀가루가 없기는 하지만 그거야 즉석해서 만들면 되는거고.
능력을 응용해서 찹쌀을 허공에서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단숨에 산산히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매캐한 연기 하나 피어오르지 않는다. 섬세한 능력 사용은 이럴 때 좋다.
우유와 쌀가루를 5대4의 비율로 넣고 섞으면서 끓인다. 솔직히 타락죽은 이름만 귀해보이지 만드는 방법은 정말 쉽다.
단지 여기에 다른 재료를 첨부하려면 약간의 과정을 더해야 할 뿐이다. 고구마를 쪄서 껍질을 벗기고 누런 내용물만 으깨서 타락죽에 넣어 덩어리 지지 않게 뭉근하게 끓여준다.
"아, 냄새 좋다. 오늘 아침은 뭐예요?"
"고구마 타락죽. 옛날 옛적에 우유가 귀했을 때는 임금님도 보양식으로 먹었다는 요리야. 요즘이야 마트 가면 우유팩을 쌓아놓고 파니까 만들기 쉽지만"
"달달한 냄새가 참 좋네요"
"그치? 고구마 넣어서 그래"
원래 고구마의 단매가 죽이랑 섞이나 은은하게 퍼진다. 약간 간을 맞추려고 설탕을 조금 넣었더니 훨씬 맛있어졌다. 쌀도 아니고 쌀가루를 넣어 만들었으니 소화도 잘 될거다.
적당량 담아서 예진이에게 내주니 후후 불지도 않고 한입에 넣었다.
"아, 맛있다. 고구마 맛이 막 나는 것도 아니고 은은하게 나는데 우유랑 고소한 맛도 많이 나네요. 맛있어요"
"그치? 많이 했으니까 더 먹어"
그 무렵 시온도 씻고 내려와서 식탁에 앉았다. 언제나 보는 디폴트 폼이지만 어제는 상대적으로 길었으니까 오랜만에 본듯한 모습이다.
"오늘 아침 메뉴는 죽입니까?"
"고구마 넣은 타락죽이야. 솔직히 나는 밤을 넣는 편이 더 맛있기도 한데 말이야"
"음, 밤 넣어도 맛있겠어요"
"밤이랑 고구마의 단맛은 다르지"
예로부터 취향이 갈리는 메뉴는 얼마든지 있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물냉면이냐 비빔 냉면이냐, 감자나 고구마냐.
근데 난 감자나 고구마보다 밤을 더 좋아다. 생밤도 좋고 군밤도 좋고 다 좋다. 길 가다가 군밤 파는거 있으면 꼭 하나 사먹을껄.
참고로 과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건 복숭아. 그 중에서 말랑한 것보다 딱딱한걸로.
"예진이 너는 학교 갈테니까 점심은 학교에서 먹을테고. 저녁은......아, 난 저녁은 시설에서 먹겠네"
"왠 시설이요?"
"어? 내가 어제 말 안했나? 옷 보고 나온 뒤에 나 나왔던 시설에 잠깐 들렀거든. 그래서 오늘은 선물 사가지고 가기로 했어. 애들 고기 좀 먹이려고"
"아, 그렇구나......"
예진이는 문득 자기가 나온 시설을 생각하는건지 생각에 잠겼다. 좋은 추억이 있는것 같아서 일부러 건들지는 않았다. 이야기 하는거 들어보면 갱생 안한 김두석 원장이 있던 우리 시설보다는 낫더만.
나중에 예진이네 시설도 한번 방문해볼까......
"시온 너는 오늘 점심 뭐 먹을거야?"
"대충 집에서 때우겠습니다"
"거 분명히 중국집이나 배달 시켜먹을게 뻔한데"
"출장 요리 서비스라도 부르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건 너무 갔다"
"냉장고에 있는걸로 대충 때우면 됩니다. 우리집 냉장고는 풍족하니 말입니다"
"유통기한 지나기 전에는 먹어라"
"문제 없습니다"
"다이어트에는 지극히 안좋은 냉장고예요"
집도 넓으니 냉장고도 큼직한걸로 샀는데. 안에 먹을게 빵빵하게 들어 있다. 그날 사오는걸 주로 먹긴 해도 냉동으로 보관해둔 고기도 좀 있고 과일이나 야채도 많은데다 냉동실에는 슬슬 추워지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스크림이 한가득이다.
아무리 마른 사람이라도 우리집에서 며칠만 머무르면 10킬로가 찌는 기적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 먹이는거 잘하거든. 아무리 입이 짧아도 그 짧은 입에 딱 맞는 요리를 열량 높게 만들면 살이 찔 수밖에 없지......
"치즈도 남아 있으니 오늘 점심은 퐁듀입니다"
"치즈는 살쪄!"
"우유로 만든게 왜 살이 찝니까!!"
"그런식으로 따지만 야채를 썰어서 야채의 기름에 튀긴 감자 튀김도 살 안찌겠다!"
"감자튀김은 살 안찝니다!"
"아니, 여기서 그런 논리가?!"
거 참 살 안찌겠다! 사실 우리 시온은 마른 체질이라서 살 좀 쪘으면 좋겠지만!
거기서 좀 더 개인적인 욕망을 더하자면 겨드랑이랑 음모나 좀 났으면 좋겠다. 솔직히 너무 민둥민둥해서 적응이 안돼.
"외계인은 털 같은거 안납니다"
"아, 나도 나는데!"
"예진이 넌 다물고. 마치 융털도 없다는 소리를 하는 우리 마누라는 어떻게 해야할까?"
"융털도 없습니다"
".......?"
융털이랑 장에 나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화 흡수에 효율을 더하기 위해 털 같이 생긴 무언가지.
만약 장에 털 같은 것이 나 있다면 같은 부피로 더 많은 넓이를 통해 흡수할 수 있다. 그래서 소화의 효율을 위해서라면 인간인 이상 누구나 융털이 있다.
"융털이 없다고......?"
"체내에서 먹은걸 전부 전기분해 하는데. 소장으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저 화장실도 안가지 않습니까?"
"먹는데 화장실 이야기 하지 마세요!"
"아무튼 외계인은 털 같은거 안납니다"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이지 털이 아닙니다"
"이상한 논리네"
솔직히 화장실(큰거)안가서 시온이랑 밤에 할 때는 관장같은거 할 필요 없어서 편하긴 하지. 원래 애널로 하려면 여러가지 준비가 많이 필요한 법이다.
젊을 때 뒤로 많이 하면 나중에 후회할껄? 나도 예전에 평범하게 여자랑 결혼해서 할 때는 뒤로 하는 것도 많이 안했어. 시온은 조절 가능하니까 하는거지.
크으으윽, 역시 우리 마누라가 최고다!
"난 일단 가봉해놓은거 입어보러 갈거고. 예진이랑 사이좋게 있어야 한다?"
"애도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머니 지금 모습은 애 맞잖아요"
"그런데서 태클걸면 못쓰는 법입니다. 그리고 결혼 했으니 애가 아닙니다"
"나도 서러워서 삘리 결혼해야지. 백리 오빠가 요즘 눈에 띄던데....."
"백리는 안된다 예진아!!!"
딸 가진 아버지들을 위한 샷건이 필요하다! 프레드릭슨! 프레드릭슨은 어디있나!!!!
* * * *
집에선 나와서 어제 들렀던 의상점에 갔다. 솔직히 별로 큰 사건은 없었다. 그냥 가봉 해 놓은 옷으 입고 대충 맞춰보는 정도인데 뭐.
이래서 맞춤 수제가 좋구만. 서비스가 다르고 입는 느낌이 달라. 여기보다 더 발전이 덜 된 문명은 다 수제이기는 하지만 정성이 달랐다. 장인 정신이 있다고 할까.....대충 그렇다.
"빠르면 내일 저녁까지는 완성이 될겁니다. 그러면......"
"아, 가격은 전에 말한대로 할테니까 걱정 마세요"
"알겠습니다"
서비스가 다른 이유가 과연 돈 때문일까 원래 그런걸까. 의문이군.
아무튼 나는 가봉한 정장을 입어서 맞춰본 후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정육점에 들렀다. 시설 애들이 못해도 수십명인데 고기는 팍팍 사야지.
자고로 소고기. 가끔 돼지 고기는 먹을 때가 있어서 시설에서 소고기 먹을 때는 별로 없다. 그러니 닥치고 소고기다. 혹시 모르니 야채와 쌈장 같은건 샀다. 아무리 못해도 밥은 있을테니까 문제 없겠지.
"예, 얼마나 드릴까요?"
"소고기 구이용으로 있는거 다주세요"
"예?"
"소고기 구이용으로 있는거 다주세요"
"어, 음......"
"당장 들고 갈거니까 전부 주세요"
어지간한 정육점이라면 소 한두마리 잡은 양의 고기쯤은 있는 법이다. 그날 잡아서 그날 파는 가게는 생각외로 그리 없다. 자리가 좋지 않은 이상 단가가 맞지 않거든.
대충 수십킬로 쯤 되는거 그대로 싸주니까 묵직했다. 이야, 이거 무게가 아주 그냥 튼실하구만.
"서비스로 우족 넣어드렸습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우족은 끓여다가 애들 사골이나 해줘야겠다.
나는 들다 못해 어께에 짊어진 장바구니를 들고 그대로 시설로 직행했다. 우리 시설도 가끔 고기 해먹을 때는 있지만 기껏해야 삼겹살이다. 이렇게 소고기를 양껏 먹을 일은 별로 없지.
가끔 이렇게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다른건 몰라도 내 마음이 홀가분하네.
시설에 도착하니까 어제 왔던 나를 알아보는 녀석들이 몇몇 있었다.
"아, 어제 엄청 예쁜 누나랑 왔던 아저씨다!"
"아저씨라니! 나 아직 팔팔한 20대 초반이라고!"
"군대 다녀왔어요?"
"......다녀왔는데"
"그럼 아저씨지 뭐"
"나 지금 소고기 사온건데 넌 안먹을거냐?"
"형! 형! 나도 형처럼 예쁜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
"이 새끼 태세전환이 빠른거 보니까 사회 나가도 잘 살겠구나"
시설로 들어가니까 김두석 원장이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어께에 걸친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오, 진짜 왔어?"
"그럼 안와요? 전 말한건 지키는 놈이라고요"
"진짜 올줄은 몰랐지......그런데 뭔놈의 고기를 그렇게나 사와?"
"전부 소고기예요"
"이야, 얼마나 들었어?"
"몰라요. 가격은 안봐서"
한도 무제한 블랙 카드로 쓱 긁으니까 정육점 주인장 아저씨가 아무말도 안하더라. 할부도 안했는데 뭐.
참고로 영수증도 안받았다. 이런데 쓰는거 영수증 받아서 뭐하냐. 딱히 의미 없다.
"애들은 아직 학교에 있을텐데. 들어오려면 좀 더 있어야 할거다"
"저도 여기서 자랐는데 그거 모르려고요? 준비하는데 시간 걸리니까 걱정마세요. 저희 삼겹살 먹을 때 쓰던 버너는 아직 남아 있죠?"
"아직도 현역이니까 걱정마"
"그거나 꺼내주세요"
간만에 고기로 포식하는 날이다. 한창 먹을 때의 애들이 수십명이라도 고기도 수십킬로인데 이거 다 먹으려면 한사람 앞에 1킬로는 먹어야 제몫을 할거다. 솔직히 초등학생 애들도 끼어있는데 그만큼 먹으려면 좀 그렇지.
일단 서비스로 받은 우족부터 핏물을 빼두자. 이건 나 없어도 끓여먹을 수 있으니까.
"이야, 우족까지 있어?"
"정육점을 털어오니까 사장님이 서비스라고 주더라고요. 이거 손질해서 사골이나 끓일테니까 애들 급식 할 때 줘요"
"거참, 이렇게 돈 쓰는거 보니까 많이 성공했나 보구나"
"울 마누라 보셨죠? 울 마누라가 대성그룹 대주주예요"
"진짜?"
"진짜"
김두석 원장은 나도 예전부터 아는 사이니까 말이 편하게 나온다. 음......예전에는 이럴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말이지.
아무튼 밥을 앉히고 야채도 씻어서 손질하고 버너도 한번 꺼내서 닦은 다음에 세팅해두고 우족도 손질해서 끓이고 하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애들도 고사리 손으로 도와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할일이 꽤나 많았다.
슬슬 애들이 하교할 시간이 되어서 버너에 불을 붙이고 큼직한 안심 하나씩 불판 위에 올려놓았다.
학교 갔다 돌아왔는데 집에서 고기 굽는 냄새만큼 기대감이 높아지는 것도 드물다. 공부하고 돌아온 뒤에 먹는 고기맛은 꿀맛이지.
"어? 고기 냄새다"
"뭐지?"
"어! 최악 형이다! 어제 왔었다고 들었는데 오늘 또 왔네?"
"고기다! 소고기다!!!"
"애들한테 연락은 다 해라. 오늘 소고기 파티니까 못오는 놈은 자기 손해지"
""""와아아아아!!!!""""
본디 밥을 먹을 때는 영양 신경써서 먹지만 맛있는걸 먹을 때는 영양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 기름진 고기 위에 치즈 올려먹어도 맛있으면 그만이지!!!
수십명의 애들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조금 빽빽한 느낌이 있어도 식당에 전부 앉은 애들은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들을 보며 기대감에 차 있었다.
"술.....은 애들이라 안되고. 내가 탄산음료를 생각 못했네"
"술은 뭔놈의 술이야. 일단 내가 사둔거 있으니까 그걸로 때워"
"애들 마시는거 때문에 그래요. 야! 슈퍼 가서 탄산음료 큰걸로 좀 사올사람! 한사람이 가면 힘드니까 5명 선착순! 내가 용돈 준다!"
"나! 나! 나!"
"나 갈래요!"
"나도!!!"
재빠른 애들 다섯명이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그 애들에게 카드를 쥐어주고 따로 용돈도 현금으로 5만원짜리로 챙겨주었다.
"애들이 다 먹을거니까 넉넉하게 사와라. 들 수 있을만큼 들고와. 따로 과자 사오고 싶은거 있으면 사오고"
"얼마나 살 수 있는데요?"
"가게 통째로 사도 내가 말 안하마"
"와!!!!"
한도 무제한 블랙 카드로 겨우 슈퍼 하나 샀다고 큰일날리 없다. 아마 내가 여태까지 쓴 돈 중에 제일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새끼 진짜 성공했구나!"
"겨우 이런거 가지고 뭘요. 요 앞에 람보르기니도 주차해뒀는데"
"야, 그래도 구라는 좀 아니지"
"원장쌤. 진짜 여기 앞에 람보르기니 있던거 사진 찍어왔는데요"
"진짜로?!"
이런 분위기 참 좋다. 애들이 활기차게 떠들고 맛있는거를 먹으려고 하는 식사 분위기.....예의범절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기분은 좋다.
이윽고 음료수 사러갔던 애들이 돌아왔다. 과자랑 음료수를 잔뜩 사왔는데 봉투도 무슨 종량제 제일 큰걸로 가득 담아왔다. 잘도 끌고왔네 저 무거운걸.
그리고 고기가 익었다. 갈색으로 잘 익은 소고기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며 각자의 앞에는 앞접시와 음료수를 따라 주었다.
"오늘 고기 사온 졸업생인 최악 형이 한마디 할거니까! 다 조용히 해봐라!"
김두석 원장은 나에게 뭔가 연설을 시킬 생각으로 짬을 넘겼다.
나는 그에 웃으면서 콜라가 담긴 종이컵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오늘 고기 존나 잔뜩 사왔으니까 이거 다 못먹으면 방으로 올라갈 생각 말아라!!!!"
"와아아아!!!"
"고기! 고기!"
"형 짱 좋아!!!"
"그럼 먹어라!!! 먹는게 남는거다!!!"
애들은 각자 환호성을 질렀다. 눈앞에 불판에서 다 익은 고기에 젓가락을 뻗었다.
그래, 이런게 좋은거지.
간만에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들어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