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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화 〉[라쿤맨 비기닝] (178/507)



〈 181화 〉[라쿤맨 비기닝]

의상점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그리고 그 길에서 아까 오다가 생각했던걸 실천할 때가 왔다.

내가 자랐던 시설에 들르는 것.


아무리 환생자인 나라도 자랐던 곳에 애착이 없을리 없다. 지금이야 시온이 있으니까 최우선 순위가 시온이지만 그래도 십 몇년간 지냈던 곳을 쉽게 잊진 않는다.

주말이지만 아직도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다. 학원에 가는 애들도 있고 PC방에 가는 애들도 있고 아니면 분식집 앞에서 군것질을 하는 애들도 있다.

"아, 저 분식집......나도 자주 가던 곳인데. 가끔 지나가다가 떡볶이에다 튀김 사먹으면 맛있었어"

"순대는 어쨌습니까"

"돈이 없어서 순대는 못사먹음. 떡튀순인데 돈 없으면 떡튀에서 끊어야지"


"순대 간에다가 떡볶이 소스 찍어먹으면 맛있는데!!"


"간은 소금 찍어야지!"


"이단이다!"


나와 시온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결국에는 개인 취향이다.

"저  떡볶이 맛있습니까?"

"그럭저럭 먹을만 했어. 안에서 먹으면 떡볶이 전용 초록색 그릇에 담아서 줬지. 거기 할머니가 손이 크셔서 많이 주셨는데"

"초록색 그릇! 요즘 보기 힘들다는  그릇!!"

"요즘 분식집은 브랜드 화가 많이 되어서 그런 그릇 쓰는 집이 별로 없지. 그것도 오래된 가게에서나 주로 쓰고"


요즘 세상 인심이 박하다고 하지만 어르신이 애들 보는것 만큼의 인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분식집을 운영하시는 할머니는 나이에 비해 정정하셔서 애들 보고 귀여워해 주시면서 가끔씩 덤도 얹어주시곤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학교 다니는 애들 상대로 하는 문방구도 있다. 가서 준비물 사려고 하면 몇학년인지 대답만 해주면 바로 준비물 세트로 묶은거 하나 주시더라. 어썸.

저기서 막 없는 용돈 모아서 콩알탄 사고 막 그랬는데......솔직히 그때는 추억이지. 단순한 재미 때문이라도 그런거 가지고 노는건 지금 해도 재미있어.


 요즘 TV에서 나오는 애들 합체 장난감도 예전에 비하면 퀼리티가 개쩔던데 그거 보면 가지고 싶고 그런다. 시바, 난 너무 일찍 태어났어!!!


"요즘은 전대물 기체보다 국산 기체가 더 간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더라. 최근 시리즈들은 죄다 덕지덕지 붙이더라고. 크윽, 엘드란물 시절에 나오던게 차라리 나았지......"

"그 시리즈는 저도 추억입니다"

"가끔 우리 학교 변신하는 상상 해보고 말이야. 그치?"

요즘은 그런 메카물이 안나온다. 하기사 그런건 예전에 일본이 버블 시절일 때 나왔던거니까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 뒤는 마치 IMF를 맞이한 한국과 같다. 일본의 부채가 얼마나 있더라.....?


방사능도 문제도 빚도 문제고. 아주 그냥 폭망으로 달려가고 있구나. 솔직히 아무짓 안해도 수십년 내로 망할것 같으니 느긋하게 지켜보자. 나 죽기 전에는 망하겠지 뭐.

"아, 여기다"

차를 근처에다 세워두었다. 길도 좁고 어차피 어린이 보호 구역이라  끌고 들어가기 뭐하다.


차에서 내려서 슬슬 안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멀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익숙한 정경을 살펴보면서 가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아, 여기에 낙서 해놓은거 아직도 있네"


"당신이 한겁니까?"


"난 아니고 같은 시설 아이가. 이거 때문에 나까지 덤터기 써서 혼났지"


뭔가 졸라맨 같은게   구석에 그려져 있었다. 이야, 졸라맨 하니까 솔직히 엄청 오랜만이네. 요즘 애들 중에 졸라맨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물어보면 아재 서냐고 물어보겠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자 서서히 시야에 시설의 일부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마치 조금  크기의 어린이집 같은 느낌의.......쉬운 비유를 든다면 짱구가 다니는 유치원 비슷한 느낌이다.


앞마당에 놀이터 작은게 있고 3층짜리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일단 1층은 초등학생, 2층은 중학생, 3층은 고등학생 애들이 주로 사용하는 시설이다.


내부는 기숙사 같은 느낌이다. 룸메이트와 같이 쓰는 방도 있지만 고시원 같이 작게 방 하나를 개인용으로 쓸 수 있는 곳도 있다. 솔직히 나는 후자가 편해서 거의 고시원 생활을 했다.


가뜩이나 공간도 모자란데 어떻게 그런식으로 만들었냐? 하고 물으면......2인실이랑 1인실이랑 비교하면 1인실 2개가 더 작거든. 보면 오히려 1인실이 많다.

"거의 고시원 아닙니까?"

"사람 좀 많이 사는 고시원 비슷하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솔직히 환경은 좀......"


에어컨도 구식 에어컨이 몇개 있을 뿐이고 그나마도 한창 더울 때 아니면 틀어주지 않는다. 하기사 한창 개판일 때 지었던 국립 시설이 이따위인게 당연하지. 중간에 빼먹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

주말이라서 그런지 앞마당에는 뛰어놀고 있는 애들이 있었다. 초등학생들도 있고, 중학생으로 보이는 머리 큰 애들은 축구를 하고 있다. 한창 활기찰 시기라서 참 보기 좋다.

"와! 예쁜 누나다!"

"진짜! 존나 예뻐! 외국인 누난데 개쩔게 예쁨!!"


"......요즘 애들 말버릇은 참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정보화 사회의 부작용이지 뭐"

정보를 얻기 쉬워지는만큼 거기서 생기는 부작용이 있는데 지금게 그 중 하나다. 애들도 정보를 접하기 쉬우니 예전과는 다르게 정신적 성숙이 빠르다. 욕도 잘하고.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막 매직키드 마수리 목걸이 하고 머리에 노란색 브릿지 넣고 콩알탄 던지면서 놀았는데 요즘 애들은......참 순수함이 많이 사라졌구나.


"아저씨, 아저씬 누군데 여기 들어와요?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인데"

"나도 여기 출신이야. 김 뚜껑은 안에 있니?"

"아, 그 별명 아는거 보면 진짜 여기서 살았나보네. 원장님은 안에 있어요. 원장실에 있을거예요"

"요즘은 그렇게 안불러?"


"예전에는 지랄맞았는데 요즘은  괜찮더라고요"

김 뚜껑. 본명은 김두석. 여기 시설 원장이지만 화나면 뚜껑 열린다고 해서 애들끼리는 김 뚜껑이라 부른다. 내가 없던 시절에도 계속  별명에 이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요즘은 괜찮다는건 무슨 뜻이지? 개과천선이라도 했나?

"애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뭐, 딱히 대공황 시절이 아니더라도 부모 없고 갈 곳 없는 애들은 있으니까. 이것도 많이 줄은거야"

내가 막 나올 때 쯤에는 방이 한두개쯤 남았으니까 지금 쯤이면 상당히 널널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애들은 좋겠네.

우리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원장실은 1층에 있어서 다같이 쓰는 공용 식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식당에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

"위생 별로인거 아닙니까?"

"오래된 곳인데 냄새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김 뚜껑이 애들 식중독 걸리면 감사 나온다고 위생은 칼같이 지키더라"


그리고 원장실 앞에 도착했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문을 열자 크게 변하지 않은 김두석 원장이 앉아 있었다. 다만 조금 다른점이 있다면 내 기억보다 조금 살이 빠지고 안색이 창백하다는 점이였다. 어디 건강이 안좋은건가? 솔직히 여러 병으로 고생할만한 나이이기는 하다.

"안녕하세요?"


"어? 너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것 같지만 내가 입대하고 난 뒤로는 본적 없으니 2년이 넘었다. 무려 2년일 수도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는 고작 2년일 수도 있다. 애들은 성장이 빠르니까.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 *   *



시온이 조용히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서 원장실 내부를 둘러본다. 그리 넓진 않았지만 여러가지 서류랑 책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고, 그래서인지 조금은 눅눅한 냄새가 나는것 같았다.


김두석 원장은 한동안 뚫어져라 시온을 쳐다보며 넋을 놓고 있다가 내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크흠!"

"어? 아, 그래. 미안하다. 이 새끼 나가서 연락 한번 없더니 어디서 이런 미인이랑 결혼까지 하고 말이야. 청첩장은 왜 안보냈어?"


"사정이 있어서 결혼식은 못올리고 서류만 냈어요"


"아무튼 신수가 훤한거 보니까 잘 사나 보구나.  됐다"


그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느낌이였다. 내가 보기에도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내가 보는 관상은 사람의 깨달음에 따라서도 변한다. 감정에 따라 짓는 표정도 있고 그 표정이 관상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지금 그의 모습에는 예전과 같은 사나움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좀 빠진 풍선 같다고 할까. 바늘로 찌르면 터지는건 같지만 그 소리가 다른것처럼 말이다.


본성은 변하지 않았는데 뭔가 조금 사건을 겪어서 조금은 변한 모습이 보인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있었나?

"거 안색이 나빠보이는데. 뭔일 있었어요?"

"........아, 이거"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윽고 말했다.

"너 군대 가고 몇달 뒤인가 애들한테 윽박지르다가 뇌졸중이 와서......그대로 병원에 실려갔었지"

"그러길래 술이랑 담배 좀 작작하시라니까"

"술은 몰라도 담배는 끊었어. 마침 애들 앞이라서 바로 병원에 전화도 하고. 3층에 준수도 있어서......아, 준수 알지? 너보다 한살 어렸던 애"


"포스 유저였던 걔요?"

"그래, 걔는 지금 성인 되자마자 국가 소속으로 시설 나갔거든. 아무튼 준수가 포스인지 뭔지 불어넣어줘서 겨우 살았다"

보통 드라마의 대명사 중 하나인 뒷목 잡고 쓰러지는 것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그리고 뇌졸중은 골든 타임을 잡지 못하면 그대로 죽고, 잘해도 반신불수가 되는게 현 실태다.

마침 포스 유저가 있어서 그 덕분에 사지 멀쩡했다고 본다면 그는 참 운이 좋은거다. 내가 알기로 우리 시설에 포스 유저는 준수 하나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그 타이밍에 시설에 있었을 확률까지 생각하면 정말로 운이 좋았던거지.

"눈 앞이 갑자기 컴컴해지고 병원에 실려갔는데. 애들이 빨리 돕지 않았으면 그대로 죽었을거라고 하더라"

"운이 좋았네요"


"그렇지. 내가 그렇게 대했는데 애들이 날 도와준거 보니까......솔직히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 했었고"

김두석 원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후회하는 자의 한숨이다. 익숙하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여태까지 애들한테 너무하게 대했지. 너무 돈에만 신경을 썼어. 애들은 전부 시끄럽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애들 덕분에 살았으니까. 참 부끄러운 일이지"

"........"


"너한테도 미안했다. 잔소리도 많이 하고 눈매 나쁘다고 갈구고 그랬는데.......정말 미안하다"

진심이 담겨 있는 사과다. 인생을 되돌아본 사람이 자기 족적을 보고 부끄러워 해야지만 할  있는 사과였다.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거 두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존중과 반성이다.


존중이 있다면 설령 법이 없어도 사람들간의 양심으로 세상이 화목하게 돌아갈 수 있고, 반성이 있다면 설령 죄를 짓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벌이 된다.

죄책감이란 수십년의 형벌보다 더 무거워서 평생을 떨어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만약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다시는 그렇지 않을테고.


"전 반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죄를 지었어도 반성부터 한 다음에 속죄나 벌을 생각해야죠. 그런면에서 원장님은 시작점에 섰지요. 겨우 시작이긴 하지만 세상에는 그 시작점에도 서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은걸 생각하면 훌륭하신거예요"


한번 선을 넘었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선을 넘지 않았다면 다시 돌아갈 여지는 있었다.

김두석 원장은 선을 넘지 않았으니 돌아갈  있었다. 충분한 반성과 사과는 돈 따위보다 귀중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그를 용서했다.

"그래도 뭐, 잘 지내고 계신거 보니까 괜찮네요. 요즘도 애들 용돈 조금씩 주고 그런건 아니죠?"


"얌마, 죽었다 살아난 뒤로 애들한테 잘 해주고 있어. 요즘도 가끔밖에  안내"

"아예 안내는건 아니고요?"

"애들 키우는데 화 안내서 키우면 버릇이 나쁘게 드는 법이야. 너는 의외로 크게 잘못한 일은 없어서 심하게 혼내는 일도 없었잖아"

"그거야 그렇죠"


솔직히 시온 없으면 식물처럼 조용히 사니까.


아무튼 김두석 원장이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고인 스크루지처럼 개과천선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쁘다. 아, 그런데 진짜로 이런걸 스크루지 효과라고 부리지 않던가? 어쨌든 내 학창시절에 조금 못되게 굴었어도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예수님도 그랬다. 의인 99명이 천국에 드는 것보다 죄인 1명이 회개하여 천국에 드는걸 더 기뻐한다고. 참고로 직접 들은 말이다.

과거는 중요하지만 두고 갈건 두고가야 한다. 나쁜 감정을 평생 지고가면 자기만 손해보고 다치는 법이다. 두고 갈 때가 왔으니 두어야지.

"건강 챙기세요. 또 쓰러지면 그때는 답 없을것 같은데. 몸에 좋은거 찾아 드시고요"


"짜식, 말이라도 고맙다. 그런데 금방 갈거냐?"

"이번에는 지나가다가 들른거라서요. 잠깐 저 쓰던 방만 보고 돌아갈께요. 내일 볼일 있어서 다시 올꺼니까 그때 선물이라도  가지고 오죠 뭐"


"혹시 사회 나가서 성공했니? 하기사 너 요리하는 솜씨는 여기서도 알아줬으니까 먹는걸로 성공한 모양이지? 그 뭐냐, TV에서 골목식당 나오는 그 사람처럼"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요"


프렌차이즈 만들기에는 내 경영 능력이 형편없다. 요리만 맛있게 만드는걸로는 어디 호텔 주방 셰프도 할  있겠지만 그 외의 재능은 영 별로라.


내일 의상점에서 가봉한 옷 입어보고 돌아올 때는 고기라도 사오자. 한창 어릴 때의 애들은 고기에 환장하는데다 이런데서는 고기 먹기 힘드니까.


"한우로 사올꺼니?"


"남기면 죽어요"

"우리 애들이 얼마나 먹는줄 알고!"

나와 김두석 원장은 예전의 묵은 감정은 털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래, 인생에는 이런 재미도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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