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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화 〉[라쿤맨 비기닝] (173/507)



〈 176화 〉[라쿤맨 비기닝]

환생과 윤회란 이 세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다.

태초에 영혼은 모두 순수한 형태였으나 그것이 삶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개성대로 변화했다. 그리고 다음 생을 위해 전생에 남아 있던 기억과 감정을 지웠다.

최악이나 시온 같은 경우는 정말로 드물다. 애초에 조 단위 조차도 귀엽게 보이는 영혼을 숫자를 생각하면 영점 하고도 소수점 몇번째 자리까지 넘어가더라도 종종 그런 사람이 생기곤 한다.

그래서 가끔은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최악은 운명의 절대자에 의해 가호를 받고 있으니 그 영혼이 보호를 받아 전생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지만 아주 가끔은 시온처럼 운이 좋아서 생기는 사람이 있다.

비슷한 예로 일본의 마스터 유저인 히에이 히비키가 있지만.....그는 미련이 없었기 때문에 환생을 하더라도 기억이 남을 일은 없다.


영혼의 격을 생각하면 높은 수준의 무력을 지니는건 당연하더라도 자기가 전생에 어떤 존재였는지 각성할 일은 없다.

하지만 생전에 미련을 가진 초월자가 환생을 한다면? 과연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물론 여러번 환생을 거듭한다면 분명 그 기억도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의지는 최상위 개념. 아무리 영혼을 관리하는 아레기쉬들이라도 간간히 한번씩 신경쓰는걸로 전부 지워질 가능성은 적다.

"요, 용하연이 누군데요?"


[자기 스승 따먹으려고 드는 개미친 얀데레년]

"아, 이해 했어요. 근데 그거 정신병자잖아요!!!"

마스크가 씌여져 있기 때문에 최악과 백리의 대화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게 다행이였다. 초월자라면 몰라도 마스터 유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면 두사람의 대화는 엿들을 수 없다.

그리고 최악의 말은 과장 하나 섞이지 않은 사실이였다. 자신을 거둬진 그레이에게 스승으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연정을 품은 소녀의 마음은 성장해서도 변하지 않고 심지어 환생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색만 빼면 그레이와 똑같이 생긴 킹 블러디어의 사진을 보고 라쿤맨을 찾아온 것이 그걸 증명한다.

[왜 그레이 제자놈들은 하나도 제정신인 새끼가 없냐! 데니스는 외팔이 애꾸눈 순애 등신이고 용하연은 지금 눈앞에 있고! 천살제는 폭유다 못해 초유인 우리 스승님을 남기고! 만병왕은 실시간 오네쇼타를 찍고 있고!!!!]

"오네쇼타요?!?!"


[그 새끼는 반로환동한데다 용왕의 딸을 따먹어서 그런거라고!!! 솔직히 오네쇼타는 대꼴이긴 한데! 대꼴이긴 한데!!!]


[제가 당신 10대일 쯤에 만나면 되는거 아닙니까?]

[외견상 그냥 순애로 보인다고! 아니, 솔직히 그게 낫긴 하다!]


"형수님?!"

시온이 통신 중간에 끼어들었다. 디폴트 폼이 초등학생 수준인 시온이랑 10대인 최악일아 만나면 그럭저럭 이해해줄만한 외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걸 둘째치고 일단 눈앞의 일이 중요하다. 권룡여제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백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이라는 이름을 아냐고 물어......아니, 그레이는 영문식이지. 무림이라면 그레이보다는 류천이란 이름을 썼을테니까. 류천을 아냐고 물어봐]


"저기.....류천이란 이름 혹시 아세요?"


"류천?"


권룡여제의 반응이 변했다.  이름이 나오자 한순간 굳건한 용에서 봄날의 첫사랑에 빠진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 되었다.


물론 한순간이지만 백리도 알만한 변화였다. 마치 무너지지 않을 탑 같은 그녀가 소녀로 돌아갔다는 것은 상당한 갭이 있었다.


"류천, 류천, 음.....류천. 꽤나 익숙한 이름이군. 정겨워. 그리운데다 머릿속에 맑아지는 느낌이군. 라쿤맨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지?"


"잠깐만요?!  지금 저 엄청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도망쳐도 되요?!"

[솔직히 나 같아도 도망치겠는데 네가 도망칠 수 있을것 같냐? 도망치면 잡을것 같은 판인데?]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쳤다간 백리를 쫒아 제주도까지 쫒아올 기세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백리가 수트의 기동성을 이용해서 도망쳐도 마스터 유저의 능력으로 쫒아올거다. 물론 사람으로서 한계가 있을테니 어느정도 거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제주도까지는 무리없을것 같다.


물론 마스터 유저라도 전력으로 뛰어서 제주도까지 가는건 힘들겠지만......사랑에 빠진 소녀의 마음만큼 좋은 원동력도 드문 법이다.

"네가 알고 있는걸 말해다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흠......]


최악은 고민했다. 물론 알려줘야 한다는 사실은 같다. 만약 알려주지 않는다면 지극히 귀찮하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목적이나 야망이 있는 것보다 사랑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이  위험하다. 자기가 나쁜짓을 하는걸 아는 사람은 내심 자기합리화를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른다. 최악을 찾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쓸게 분명하다.


그런 귀찮은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알려주고 빚을 만들어 이득을 보는게 낫다. 게다가 저런 타입은 빚을 확실하게 값는 타입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아틀라스의 중국 지부를 해치우려면 그녀의 도움을 받는게 나을것 같은데. 어차피 나도 얼마 있지 않아서 중국으로 갈 생각이였고. 본인도 나한테서 직접 듣는게 낫겠지.....]

"그렇게 설득한다고 통할까요?"

[나름 이성적이라면]


"얀데레보고 이성적이라고 하겠어요, 어떤 미친놈이?!"


[야! 그거 따질거면 내가 아니라 그레이한테 해야지! 썬더 로드.....아니, 심판의 절대자 이 십새끼가! 제자 잘못키운걸 나한테 똥물 튀기고 있어! 정신연령 10살짜리 수인이랑 결혼한 페도 수간충 새끼!!!]


"뭔가 욕이 너무하긴 너무한데요"


아무튼 계획은 대충 정해졌다.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은 그녀를 다시 중국으로 보내는 일이다.


마스터 유저가 자국에서 나와서 타국에 머무르는 행위는 경제적, 국제적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괜히 나중에 일이 커지는걸 바라지 않는다면 그녀를 우선 중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성급하다.

"어.....형이 일단 직접 이야기 하겠다고 했어요. 대신에 자기도 중국으로 가야 할 일이 있으니까 거기서 이야기 하겠다고 하는데요"


"그걸 믿을만한 근거는?"

[내 성격에 구라를 칠것 같니. 상대가 인간도 아닌 새끼라면 양심에 꺼릴건 없지만 그래도 사람과 사람간의 거래에서는 구라 안쳐]

"어, 어차피 협조를 구해야 하는 일이라서 당신 도움이 필요해다고 하는데요. 그러려면 반드시 당신이랑 거래를 해야하고. 그러면 결국에는 원하는걸 얻을 수 있다는데요"

[백리야 언제 그렇게 말빨이 늘었어? 이 새끼 다시 봤네. 이게 바로 번역가의 고충인가!!!]

"한국어 밖에 못하는데 무슨 번역가인데요"


[우리 남편어 번역가입니다. 흠, 세후 연봉 2억에 생활비 별도로 고용할 가치가 있습니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쇼 형수님"

[이 새끼 태세전환이 오지네]

권룡여제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지금 당장이 중요하긴 하지만 일방적인 관계만큼 깨지기 쉬운 것도 없다. 받기만 해봤자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게다가 중국에서 만나는거라면 그녀가 오히려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 한수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는가?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의견에 수긍한다는 뜻이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하지. 뭔가 다른 사항은 없나?"

[음.....중국이라면 한국인 입국하는데도 검사할 것 같으니까 그거  어떻게 해보라고 해봐. 아니, 애초에 말을 안하면 되려나? 들어가는 것도 모르는데 검사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중국으로 돌아가도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해]

"아무것도요. 대신 중국에는 라쿤맨이 입국할거라는 말도 하지 말라고 해달라는데요?"

"그러도록 하지. 이쪽에는 그럴만한 권한도 있으니까"


[생각보다 권력이 있는 모양이네. 아니, 중국이라서 그런건가? 거기는 북한보다 좀 더 낫지 독재 정권이나 다름없으니까. 내가 보기에는 멸망해도 싼 나라 중 하나거든]


백리의  뒤에 소름이 오도도독 돋아났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그러면 안무서운데 최악이 그러면 진짜로 할까봐 무섭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수를 한번 더 쓴다면 나도 가만히 있진 않을거다. 거짓말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용하연.....아니, 지금은 용화정인 당신은 믿어도 중국이란 나라를 믿지는 않거든. 애초에 내가 국가란 조직을 믿었으면 진작에 정체 까발리고 돌아다녔지. 안그래?]


"먼저 집안 간수 잘하시라는데요"


[백리 이새끼 요약 존나 잘하네]

"제가 형이랑 얼마나 알고 지냈는데요"

[기껏해야 몇달이잖아]

"어? 그러네?"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그렇지 이번달 초에서 시작해서 기껏해야 반년 안팍이다. 생각보다 적은 시간이지 만나자 마자 친구먹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간의 관계가 형성되기에는 충분히  시간이다.


아무튼 권룡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가 요약해준 말 뜻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본론은 끝났으니.....다음으로 넘어가볼까?"


"......다음이요?"


권룡여제의 눈이 백리를 향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백리의 뒤에 있는 최악에게 주던것 같은 시선이 이번에는 오로지 백리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백리의  뒤에서 아까보다 더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등이 축축해진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2호 였던가? 올해 나이가 몇이지?"

"스물......핫?! 이런거 알려주면 큰일나는거 맞죠?!"


"어리군. 한참 어려. 그런데도 마스터 유저인가?"


"아닌데요!!!"

"부정해봤자 소용 없다"


[백리야 넌 사람이 좋은게 장점인데 그게 단점이 되기도 하네. 묻는다고 대답해주는 등신이 어디있어?]

"집에서 엉덩이나 긁으면서 훈수나 두는 주제에 다물어요!!!"


[아니, 오또케 알아찌!!!]


"아! 씨! 루리랑 똑같은 소리 하고 있어!!!"


백리가 화를 내며 중얼거렸다. 조금 소리가 커서 그 소리 정도는 권룡여제가 들었지만 못들은척 넘어가 주었다.

"네 몸에서는 제어 하지 못하는 가이아 포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나름 조절을 하는것 같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어설프지. 아마 마스터 유저가 본다면 누구나 눈치챌거다"


"......그래요?"

[원래 제어못하는 힘을 갈무리 하는것 만큼 귀찮은 것도 없지. 근데 넌 야매라서 당연히 그런거고]

"그러면 힘을 갈무리 하는 방법부터 가르쳐 줬어야죠......"

[며칠 사이에 쟤가 올줄 알았냐? 그리고 어차피 마스터 유저 검증 받으면 좋은거잖아. 내가 없을 때를 생각해]

백리가 여기  목적  하나는 마스터 유저 검증을 받는 것이였다. 만약 검증을 받는다면 나중에 정체가 밝혀져도 섣불리 손을 쓰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하지만 권룡여제가 보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였다.

"게다가.....뭔가 움직임이 상당히 익숙하군. 처음 보는게 분명한데 익숙한 느낌이야"


"......형?"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네가 배운 태극나선경은 그레이, 그러니까 류천의 독문무공이야. 제자였던 사람이 정확히 기억은 못해도 완전히 잊어먹었을리 없지]


"진짜.....! 돌아가면 죽빵 한대 갈겨도 되죠?!"

[살아돌아올  있다면]

우득, 하고 권룡여제가 주먹을 쥐었다.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의 주먹에는 숨길 수 없는 흉터들이 가득했다.

재생이나 회복 특성은 없어도 마스터 유저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는 회복능력이 차원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터가 남아있다는건 그만큼 사투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여기서 백리를 순순히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다. 아니, 살려서 보내더라도 최소한 무력 검증은 할 생각이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라쿤맨?"


[오케이! 4딸라!]


"누가 사딸라예요?!"


[니 시급]


"으아아아악!!!"


백리가 비명을 질렀다. 반편이라도 마스터 유저는 마스터 유저. 권룡여제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세에 저항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포스를 사용해 몸에 두른다.


난데없이 벌어지는 전투에 주변의 다른 기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하지만 완전히 몸을 빼지 않았다. 권룡여제와 라쿤맨 2호간의 전투를 눈앞에서 찍을 수 있다면 그토록 원하던 특종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사람을 안전은요?!"

"걱정마라 그 정도로 요란하게 하진 않을테니"


[아,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팬텀 있지? 걔 따가리 중에 마룡왕이란 애가 있는데. 걔가  제자나 마찬가지거든. 근데 마룡왕이 뭐라고 했는줄 알아?]


"........뭔데요?"


[장래 유망한 녀석은 일단 굴려서 가르치고보는 사디스트라던데]

마스크에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백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경험이 부족한 백리가 보기에도 그녀가 뿜어내는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물리적인 효과마저 겸비해 주변의 작은 돌조각이 덜덜 떨리면서 기파에 밀려나간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굴ㄹ.....아니, 실력을 봐볼까?"

"굴린다고 했어! 방금 굴린다고 했다고요!!"

"한국어는 어려워서 실수가 좀 있다"

"거짓말!!!"


백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단 눈앞에서 신조차 약점인 라이트 훅이 날아온다면 피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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