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라쿤맨 비기닝]
백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일요일. 우리 가게는 토요일날이 휴무라서 일요일은 영업을 하지만......일단 내가 치킨집을 대신 돕는 한이 있어도 백리를 보낼거다.
나야 배짱장사였으니 토요일날 쉬었지만 솔직히 치킨집이 주말에 쉬면 어떻게 하냐. 아무튼 장사하던 도중이라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빠르게 백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백리니?"
[아, 형. 무슨 일이예요?]
"아니, 부탁할게 좀 있어서. 지금 장사 중이야?"
[가스레인지가 고장나서 AS기사님 불렀는데 좀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장사는 못할 것 같아요]
"마침 잘 됐다"
[.......형, 아무리 저한테 다 맡겼어도 일단 형 가게였던 곳인데 장사 못한다고 잘됐다고 말하는건 좀 아니지 않아요?]
"아니,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데 말이야......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신세계 명대사 하기에는 개봉에서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어요?]
아무튼 나는 백리에게 권룡여제와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분명 나를 노리는것 같으니까 엿을 성대하게 먹여주고 싶으니 대타로 니가 가라고.
설명을 들은 백리는 기겁을 하면서 소리쳤다.
[미쳤어요?! 저 죽으라고 내보내시는거예요?!]
"내가 언제 너 죽으라고 그런적 있니? 내 덕분에 마스터 유저도 됐으면서 뭘 그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엿을 먹였는데 가만히 있겠어요?! 분명 처맞고 인질로 잡히는 꼴이 눈에 선하거든요?!]
"괜찮아. 일단 우리가 갑이니까"
권룡여제는 나에게 볼일이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만 대답해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걸 강행해서라도 물어보러 온게 틀림없다.
일단 라쿤맨의 정체는 비밀이니까 나를 찾고 싶다면 한국에 오는게 정답이긴 하다. 그게 과연 1호인지 2호인지 말 안했다면 온전히 내 판단이지만.
"일단 네가 나간다면 권룡여제한테 나랑 이어질 선은 네가 유일해. 나랑 척지고 싶다면 마구잡이로 대할리 없지"
권룡여제는 무식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밀고나가는 방식이지만 그만큼 돌아가는 것보다 지극히 효율적이고 그걸 어디에 쓸지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대신 백리가 나간다고 한들 섣불리 손을 쓸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저런 스타일은 이야기가 빠르다. 겉치례를 싫어하고 빠른 본론을 좋아한다.
말을 전하는 정도라면 백리도 가능하고. 일단 반은 마스터 유저니까 싸우더라도 시간 끌기는 가능하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라 백리가 배운 태극나선경 덕분도 있다. 태극권을 기반으로 한 만큼 공격보단 방어에 중시되어 있으니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쉽다.
"그리고 생각해봐. 만약 싸우면 너도 좋은거 아니냐?"
[뭐요?! 경험치 때문에요?!]
"아니, 그거 말고. 만약 싸우면 마스터 유저 검증은 건너 뛰는거잖아"
[......아, 그럴수도 있겠네요]
이경진 아저씨가 예전에 마스터 유저가 적었을 때는 권룡여제한테서 검증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는건 그녀에게서 마스터 유저라고 인증을 받는다면 검증 정도는 쉬운 일이다.
백리가 마스터 유저로 알려지는 것과 라쿤맨 2호가 마스터 유저로 알려지는건 다른 문제다.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오히려 이쪽이 이득이다.
게다가 나중에 정체가 밝혀져도 낫다. 그냥 좋은 무기 쓰는 라쿤맨이라면 범죄자로서 체포하겠지만 마스터 유저라면 어느 나라에서던 기를 쓰면서 영입하려고 할거다. 특히나 아직 마스터 유저 없는 상당한 국력을 자랑하는 국가들이.
"내가 보기에는 내가 얼굴 까발릴 때가 얼마 남지 않을것 같다"
[형, 예전에도 그런거 알고 있었는데 지금 확실하게 물어볼께요. 혹시 미쳤어요?]
"상황이 그래. 시온이 있어도 언제까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긴 글렀으니까"
이미 라쿤맨 대책팀인가 그쪽에는 내가 용의선상에 올라가 있다. 단지 시온이 이런저런 조작을 가한 덕분에 들키지 않은거지 아니였으면 진작에 까발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정체를 드러내면 지금처럼 조용히 사는건 힘들거다.
흠, 만약에 들킨다면 시온이 섬 하나 사둔거 있다는데 거기에서 둘이서 꽁냥거리며 사는것도 나쁘진 않다. 어지간한 설비는 호라이즌에서 제조 가능하니까 의식주 걱정 하나도 없다.
"아무튼 가라 라쿤맨 2호! 너로 정했다!"
[포켓몬 드립 치기에는 너무 나이 먹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포켓몬 쪽이예요?!]
"보면 피카츄 백만볼트 견디는 지우가 더 쌔지 포켓몬이 쌔겠냐"
[아, 그건 그러네요. 그런데 그런 논리면 로켓단은......?]
백리가 착한 애라서 다행이다. 보통 이런 부탁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나중에 진짜 여자로 환생하면 백리 동정이나 떼어줄까!
물론 그때까지 살아있거나 못해도 거기가 서야지만 말이지(무책임).
나는 시온에게 말을 해서 따로 백리의 라쿤맨 수트에 통신 기능을 나와 연결했다. 대략적인 상황 지시를 내려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혹시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면 내가 나설테니까 걱정마"
[휴, 다행이다. 난 또 저 버리고 튈줄 알았죠]
"적당한 초월자면 모르겠는데 마스터 유저는 아무리 쌔도 거기서 거기야"
권룡여제만큼은 어느정도 상향조절했지만 결국에는 초월자 반열에는 제대로 오르지 못했다.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반대로 진심으로 대할 수준도 아니다.
뉴스에서는 아직도 호텔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권룡여제를 촬영중이다. 아마 내가 나오지 않으면 며칠이고 거기서 버티고 있을 작정이다.
어차피 마스터 유저 쯤 된다면 먹거나 마시지 않고 며칠쯤 버틸 수 있으니 걱정은 없지만......기다리게 했다가 빡쳐서 불똥 튀면 귀찮다. 그리고 일은 먼저 끝내는 편이 낫다고.
"라쿤맨 2호를 이럴 때 써먹는구나. 수트 주길 잘했네"
[이럴줄 알았으면 안받을껄 그랬어요]
백리의 한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우리 마누라가 그러는데 후회는 언제해도 늦는다더라.
* * * *
권룡여제 용화정은 호텔 앞의 부지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아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을것 같았지만 특종에 목이 마른 기자들 한명 접근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일정 거리에서 떨어져 촬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접근하지 않는 이유는 위압감 때문이였다. 방금 그 방송으로 기자들에게 볼일이 끝났으니 접근을 허락할리 없다. 은은하게 주위에서 흐르는 기세가 그들을 압박해서 쉽사리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기자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고 어지간한 포스 유저도 정신적으로 밀리니 접근하는건 요원한 일이다.
그녀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나름 효율적이기도 하다. 정체도 모르는 라쿤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방송을 통해 알리는 수 밖에 없다.
천검 이경진이 라쿤맨과 아는 사이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협박을 하기에는 서로 마스터 유저라 서로 국제 문제로 번진다. 그렇기에 지금의 방법이 최선이다.
"왔나"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기이한 이명이 울리면서 날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라쿤맨?! 아니, 2호다!"
"왜 2호가? 1호가 와야하는거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는거 보면 라쿤맨도 신경 쓰고 있던게 틀림없군! 아무튼 찍어! 특종이야!!!"
하늘을 겨냥한 카메라는 날아오는 라쿤맨 2호를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지상으로 착지해 권룡여제 앞에 섰다.
그녀의 기세의 범위 안에 들어가자 백리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수트에는 온도 조절 기능도 함께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다.
"뭔데요?! 엄청 예쁜 사람이기는 한데 존나 무서워요!"
[무림에서는 자고로 어린애, 여자, 노인을 조심하라고 했지. 그러니 반로환동한 여자 무림 고수가 제일 위협적이야]
"미친 소리 하지 마시고요"
[알아보니까 저쪽은 50대라고 하더라. 그런데도 저 외모면 진짜 동안이네. 경지가 높은 탓도 있고]
"집에서 그게 느껴져요?"
[아니, 감]
감이라고 해도 무시할게 못된다. 최악의 두번째 능력은 '감각'이니까. 대충 찍어도 주관식 문제를 맞출 수 있을 정도다.
서로가 서로를 응시했다. 권룡여제의 눈이 백리를 꿰뚫어볼 듯이 보고 있었다.
"저, 음. 안녕하세요? 아, 한국어는 할줄 아시죠?"
"나름 할줄 알지. 그런데 1호가 아니라 2호가 온건 의외인데"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고 해서요. 대신 왔어요"
"가면쓴 히어로 치고는 휴일도 있나보군"
[뭐 어때! 난 취미로 히어로를 하는 사람인데!]
물론 본업은 수틀리면 문명을 멸망시키는 대마왕이다. 진짜 취미로라도 히어로 하는게 다행이지.
기자들은 두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서 침묵하고 녹음기를 꺼내들었지만 권룡여제가 손을 한번 휘젓자 소리가 차단되었다.
적어도 그녀 이상의 실력을 가지지 않으면 엿들을 수 없지만.....솔직히 최악이나 시온을 제외하면 가능한 사람은 없다.
"일단 라쿤맨 2호입니다. 형....아니, 1호를 대신해서 오긴 했는데. 제가 해도 되는 일인가요?"
"1호와 통신은 되나?"
"아, 네"
"그러면 문제없다"
조금 불편한듯 보였으나 그걸 노골적으로 내비치지는 않았다. 예상에 빗나간 사람의 당연한 반응 수준이였다.
어차피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건 그게 아니였다.
"제가 알기로는 물어볼게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가요?"
"라쿤맨이 러시아에서 했던 일 때문이다. 그에 관련해서 물어볼게 있다"
[초월자 관련 문답 사항인가?]
그런거라면 최악만 대답해줄만 하다. 딱히 초월자로서의 경지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의 문제가 되니까.
어느정도 전차원적인 레벨로 인정받을만한 초월자는 두세차원 넘으면 간간히 있다. 하지만 개중에 차원간 교류를 통해 충분한 정보를 얻은 초월자는 꽤나 드물다.
만약 권룡여제의 질문이 그와 관련된 문제라면 충분히 최악만 대답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얼마 전, 러시아에서 입수한 위성 사진 몇장을 내가 볼 수 있었다"
[어라? 그거 기밀로 했을텐데 볼 수 있었나?]
"대부분은 라쿤맨과 루루라고 불린 블러디어란 종족간의 전투를 찍었지. 하지만 개중에 단 한장. 다른 사람이 찍힌 사진이 있었다"
[.......어?]
러시아에서 최악이 저지른 일을 보고 그의 책임을 묻지 않은건 위성 사진을 통해서 사건의 전말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인간을 먹어치우려고 드는 괴물을 막다가 생긴 피해를 두고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을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귀빈 대우를 받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위성 사진을 입수하고 거기에서 다른 사람이 찍힌 사진이 있었다면.......짐작가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한 여성 같은 남자. 그는 누구지?"
[......킹 블러디어]
"킹 블러디어, 라고 하는데요?"
"들어본적 없는 이름이군"
최악의 감이 불길한 예감을 울리기 시작했다.
[백리야, 왜 그놈을 신경쓰는지 한번 물어볼래?]
"저.....왜 그 사람을 신경쓰는건가요? 킹 블러디어란 사람을요"
"뭐라 대답하기 어려운데.....일단 뭔가 제일 만나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되더군"
"어, 아는 사람이세요?"
"그런건 아니다"
권룡여제는 자신도 모르고 뭔가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 눈에 비친 감정은.....최악 정도 밖에 모르는 아득한 감정이였다.
천천히,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설명했다.
"위성 사진을 통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의 얼굴을 보는 느낌이였지. 조금은 다르더라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 사람을 만난다면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을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 설마.....!!!]
최악은 유래없을 정도로 당황했다. 일본에서 히비키를 만났을 때 처럼 이토록 당황스러울 적은 없었다. 등 뒤로 소름이 쭈욱 타고 올랐다. 백리처럼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무력적인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어린애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만약 그 어린애의 부모님이 검사나 변호사라면 좀 더 다른 의미로 무서워지는 것과 같다.
[히비키의 일이 있으니 대충 그럴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는데.....죽었다고 들었지만 환생해서까지 그게 유지되고 있었을 줄이야!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는건데!!!]
최악이 경악을 내뱉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다.
환생이라는건 전생의 기억을 지우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다. 최악조차도 환생 초기에 머리에 충격을 받으면 기억에 혼란이 발생하고는 했다. 초월자에 이른 지금은 모든 전생을 기억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는 사람이예요?"
[왜 권룡여제가 강한건지 이해가 되겠다. 애초에 수준부터 다른 사람이니까. 히비키의 전생인 슈텐도지보다 위였으면 위였지 아래인 사람은 절대 아닌 녀석이야!!!]
블러디어는 누구나 원본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러시아에서 나타났던 루루의 원본은 지배의 대마왕 시엔느다.
킹 블러디어라고 다르지 않다. 킹 블러디어의 원본은 썬더 로드이자 최초로 후천적인 절대자의 경지에 이른 전(前) 최강의 초월자인 그레이다.
그리고 그 그레이는 네명의 제자를 두었다. 한명은 마법사고 나머지 세명은 무림인이다.
첫째인 마법사는 최악처럼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고, 둘째와 셋째는 죽었고, 넷째는 아직 생존해 있다. 그 중에서 셋째가 남긴 제자는 최악이 스승님이라 부르는 천살제(天殺帝)다.
다른 이야기는 내버려두고 지금 이야기를 한다면. 둘째 제자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그녀는 그레이가 무공을 가르친 첫번째 제자이며 가장 그에게 집착한 여자이기도 하니까.
[그레이의 두번째 제자, 마룡후(魔龍后) 용하연!!! 환생을 해도 기억은 약간 남아 있었나!!!]
기억이 사라져도 남아 있는 집착에 최악은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