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라쿤맨 비기닝]
유색공명기는 어줍잖은 강기는 따위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이자 이능력이다. 만약 누군가가 강기와 유색공명기 중에서 어느걸 팔까 고민한다면 나는 단언코 후자를 추천할거다.
물론 강기도 경지에 이르면 시간이라던가 공간이라던가 죄다 베어내겠지만 그거야 여느 초월자라면 평균이나 다름없는거고. 그러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일정 수준을 보장하는 유색공명기를 배우는게 낫다.
물론 허들이 높긴 하지만.......유색공명기는 누구나 배울 수 있지만 아무나 못쓰는 기술이다. 입문 자체는 아무나 다 배울 수 있어도 정작 유색공명기 자체는 마음을 재련해서 현실에 발현시키는 기술이기 때문에 그만한 재능이 없으면 못쓴다.
다만 유색공명기는 쓸 수 있다면 대처할 기술이 몇 없는 개사기 기술이다. 순수한 마음에서 발현된 의지에서 나오는 절삭력. 거기에 그 마음의 색에 따라서 발휘할 수 있는 특성이 각각 다르다.
이경진 아저씨가 쓰는 회색공명검의 회색의 의미는 호승심. 자기보다 확실하게 약한 상대에게는 쓰기 어렵지만 그 효과는 증폭이기 때문에 비장의 조커로 사용할 수 있을만큼 발군의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도 예전에 이경진 아저씨랑 싸울 때 회색공명검 보고 맨손이 아니라 일부러 멸룡으로 대처했다. 유색공명기를 막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이능력이라서 그런거다.
아무튼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샌것 같은데 유색공명기를 배우려면 먼저 그 선행학습이 필요하다. 나는 이경진 아저씨가 그걸 특성으로 넘어간줄 알았는데......아무래도 그 깨달음을 얻게 도와준게 권룡여제인 모양이다.
"그렇다는건.......내 생각보다 무력수치를 좀 수정해야겠는데"
최소한 경지만큼은 내가 무시할 수 없을만큼 대단할지도 모른다. 유색공명기에 이른건 순전히 이경진 아저씨의 재능이라고 쳐도 그 중간 단계를 놓아준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이경진 아저씨가 마스터 유저로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하더라도 그 시절에 그 수준이였다면 지금은 더 높은게 당연하다.
"그래도 만나는데 지장없는 사이는 아니잖아? 만나서 슬쩍 떠봐줄래?"
[전화로 하지. 직접 만나긴 좀 그러니까]
"쫄보"
[.........]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이번에는 내가 좀 심했네. 근데 당한게 있다고 해서 그렇게 겁 먹으면 평생 넘을 수 없을텐데 말이야"
[새겨듣지]
내가 괜히 노예 제도 있는 세상에 민주주의 전파 안하는게 아니다. 귀찮은 것도 있지만 인권이란 개념 자체도 이해 못하는 노예들에게 들고 일어나라고 해봤자 자유를 쟁취할 수도 없고 억지로 자유를 쥐여줘도 그 자유를 또 노예주인에게 줄 뿐이다.
즉, 노예 스스로 노예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한번 패배했다고 그 마음가짐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그걸 넘어설 수 없다. 마음가짐부터 등신인데 가능할리가 있나.
[일단 전화는 해보겠네. 하지만 나는 떠보는 일은 잘 못하니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일단 목적만 알면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니까 걱정마"
[잠시 후에 내가 다시 전화를 걸도록 하지]
이윽고 전화가 끊어졌다. 남은건 이경진 아저씨가 잘 하도록 기다리는 일 뿐이다.
* * * *
용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크흠, 이번 일로 주석께서도 서운함을 표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국가간의 관계가 있고 영위신장(靈位神將, 마스터 유저)으로서의 업무가 있으신데 이렇게 갑자기 언질도 없이 행동하시다니요]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사회가 필요하고 그 와중에 발생하는 이권 다툼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고고한 용에게 있어 그런 잡설은 그저 앵무새가 생각 없이 지껄이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수도 방위를 이대로 비워두실 생각이십니까? 용무가 있으시다면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고 절차를 밟아 가시면 됩니다. 저희에게 말씀 하신다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겨우 그런 소국(小國)에서 일부러 시간을 보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앵무새는 새치고는 똑똑한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봤자 외운 언어를 말하는 것 뿐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앵무새는 거의 없다.
재롱을 잘 부리는 앵무새라면 나름 귀여워 해줄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주인을 물어뜯고 위에 서려는 앵무새라면......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뿐이다.
"탕옌 위원"
[예, 말씀하십시오]
"혓바닥이 길군"
[.......!]
용은 지극히 권태롭다. 하지만 탐욕스럽지는 않다. 다행히도 용에게는 시중을 들어줄 앵무새들을 얼마든지 있었고 약간 귀여워 해준다면 필요한 것을 바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용은 유래 없을 정도로 한가지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자국에서도 파견 외에 수도인 베이징을 벗어나는 경우는 대공황 이후 20년을 전부 통틀어도 손꼽힐 정도다. 그런데 지금 자의로 한국으로 이르렀다.
주석에게까지 보고를 막고 억지로 밀어붙어야 했을 정도로. 그렇기에 이미 눈치빠른 몇몇 당원들은 암묵적으로 그녀의 행동을 용인했다.
단지 희생양으로 쓸 것이 필요해 주제를 모르는 앵무새를 내몰았을 뿐.
"내가 이곳에서의 볼일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 자네를 죽일 때까지 얼마나 걸릴거라고 생각하지? 이틀? 사흘? 길어야 일주일?"
[죄, 죄송합니다!!!]
"유언장과 재산분할 정도는 해두는걸 추천하지"
[제가 무례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20년전 대공황 시절 중국은 많은 인구수 만큼 큰 피해를 입었지만 러시아보다는 아니였다.
전체적인 인구수 대비 피해를 계산해본다면 중국만큼 대공황 시절을 잘 견뎌낸 나라도 드물다. 몇몇 국가는 그 시절에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살아남은건 그 뒷편에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포스 유저로 각성하자 마자 적성종을 쳐죽이기 시작한 그녀는 중국이 빠르게 추스려 사태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현 시대에 중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최소한이 중화연방이지.
그녀는 망설임 없이 통화를 끊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채로 조용히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다시금 전화가 걸려왔다. 탕옌 위원이 다시금 용서를 빌러 전화라도 걸었나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간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천검인가?"
감고 있던 그녀의 눈이 떠졌다. 갈색 한점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검은색의 눈동자가 핸드폰 화면에 표시된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꽤나 오래간만이군. 몇년 전에 파견 나갔을 때 만난 이후로 처음인데 말이야.......얼굴이라도 비치지 그러나?"
[여기는 제 나랍니다. 일단은 대기하고 있는게 당연한거 아니겠습니까?]
"피차 고생이 많군"
시덥지 않은 안부 인사가 조금 지나갔다. 둘 다 그런 이야기나 하러 전화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오신겁니까?]
"개인적인 용무"
[우리 사이에 그러실겁니까?]
"우리가 개인적인 용무를 알려줄만큼 친하던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국제결혼은 생각 없다"
[저도 그렇습니다]
의미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공방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을 고했다.
"서로 어울리지도 않은 떠보기는 그만하지. 너나 나나 이런건 성격에 안맞아"
[........]
"딱 한가지만, 서로 솔직하게 대답하도록 하지. 대신 먼저 물어봐도 좋다"
잠시간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경진은 이내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무슨 볼일로 오신겁니까?]
"라쿤맨을 만나러 왔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게 뭡니까?]
"딱 한가지만이라고 했을텐데?"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의 차례다.
"라쿤맨과 알고지내나?"
[...........]
"사실인 모양이군"
[......어떻게 아신겁니까?]
"솔직히 반신반의했지. 하지만 네가 직접 나에게 전화까지 걸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정답이였던 모양이군"
[저는 거기에 낚였고요]
"그래서, 라쿤맨은 어디에 있지?"
그녀의 물음에 이경진은 그녀가 했던 말을 다시금 돌려주었다.
[서로 대답해주는건 딱 한가지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한방 먹었군"
권룡여제 용화정은 남자처럼 너털웃음을 내보였다. 하지만 어색하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웃는 편이 더 어울렸다.
"하지만 이걸 보아하니 라쿤맨도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건 확실하군"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이경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여태까지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다. 확신이 섰다면 남은건 행동 뿐이다.
권룡여제는 호텔 창 밖의 지상에 몰려 있는 기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 * * *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은 대기"
"기다리는것 만큼 지루한 일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시간이 가지 않을 때는 로딩 중일 때지. 아무렴"
혹시 뭔가 다른 정보가 나오나 싶어서 뉴스를 돌려보았지만 딱히 좋은 소식은 없었다. 뉴스에서는 권룡여제가 머무는 고급 호텔 주변에 기자들과 경호를 맡은 포스 유저들이 진을 치고 있는 화면 밖에 나오지 않는다.
평범한 유명인사도 아니고 파견으로 온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용무로 와서 그 용무도 밝히지 않으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현재 권룡여제는 아무런 외부 활동도 하지 않은채 호텔에서 두문불출 하고 있습니다. 혹은 기밀을 요구하는 용무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외출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 저 아가씨 꽤 오랜만이네"
"아는 사람입니까?"
"그 왜 있잖아. 영등포 화재 사건 때랑 부산 참치 워리어 때 촬영하다가 땡잡았다고 밈 생긴 기자 아가씨. 이름이.....솔직히 기억 안나네"
"아, 저도 기억납니다"
[정부에서도 권룡여제의 공식적인 활동은 중국 정부로부터 공지 받은 사항이 없다며 순수한 본인의 개인 용무라고 했지만.......어?! 어어어?!?!]
그때, 뉴스에 나오는 화면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러다가 호텔 상층부를 노리며 카메라를 찍기 시작했다.
호텔 유리를 박살내고 떨어지는 인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인영은 공포에 질리거나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지만 눈치 빠른 누군가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지상에서 몇층 정도의 거리가 남았을 무렵. 카메라는 떨어지는 사람이 누군지 확실하게 비추고 있었다.
과, 과연 50세! 라고 말할 정도로 젊은 외모와 미모. 개량된 치파오를 입어서 묘한 색기까지 있는 흑발 흑안의 동양계 미녀는 지상에 가볍게 착지했다.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마치 깃털이 떨어진 것 처럼 착지한 그녀는 고개를 한번 저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기자들 앞에 나섰다.
[궈,권룡여제입니다! 난데없이 호텔 창문을 부수고 나타났습니다. 도대체 왜......?]
사람을 판단하는데 가장 중요한건 눈이다. 눈을 보면 사람의 내면도 볼 수 있다.
사람 관상 보는 내 특기로 판단하면 저런 스타일은 자기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서는 열정이 엿보인다.
조금만 더 넘어가면 집착과 광기로 승화될것 같은 열정이다. 고고한 외모에서 느껴지는 그런 언벨런스함은 상당히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지금,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는것이겠지?]
그녀는 능숙하게 한국어로 말했다. 약간 말버릇이 특이한 한국인이라 생각될 정도로 능숙한 한국어였다.
권룡여제는 기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촬영을 하고 있던 기자......나와 영등포와 부산등에서 인연이 많았던 여기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이크를]
[예? 아, 예!! 여기있습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마이크를 받았다. 남 위에 서본자의 태도지만 지극히 자연스럽다. 품위 없는 독재자나 졸부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권룡여제는 카메라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 너머지만 나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방송을 분명 보고 있겠지. 라쿤맨]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
그녀는 확실하게 나를 저격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주변의 기자들의 수근거리던 목소리도 어느새 조용해져서 잔잔한 권룡여제의 목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물어볼 것이 있지. 그게 무엇인지는 여기서 이야기 할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거라고 확신할 수 있지]
물어볼 것이 있다? 나에게?
뭘 물어보려는거지? 내가 알고 있을만한게 있나? 목적은 알았지만 오히려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었다. 목적은 밝혔지만 본심은 밝히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 와라]
지극히 간결한 대답이였다. 하지만 어지간한 사람은 들을 수 밖에 없는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 저건 사람 위에 서본 사람이 아니면 내지 못할 제왕의 기세다.
힘으로 사람을 부리는 자는 삼류고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부리는 자는 이류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으로 사람을 부리는 자가 일류다.
그렇지만......
"응 아냐~"
내가 누구 좋은꼴 보라고 직접 갈것 같냐?
하지만 무시하면 계속 저기에 있을거고 나도 행동하기 귀찮아진다. 어떻게 해서든 처리를 해야 나중이 편해진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가면 또 남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더럽다.
"어쩌실겁니까?"
"글쎄"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어디보자, 비읍, 비읍 란은 조금 더 내려가야.....아니, 내가 풀네임으로 등록했었지? 그러면 히읗이네.
천천히 넘기다 가장 마지막 란에 이른다. 거기에서 백리의 이름을 찾았다.
"딱히 1호보고 오라고는 하지 않았지?"
라쿤맨 2호 가즈아아아아아아!!!!